내가 만난 세상1159 여인들, 나의 여인-영혼을 그린 그림 〈검은 타이를 맨 여인〉 1917. 캔버스에 유채. 65×50㎝. 개인 소장. 1 변함없는 충실성, 다시 말해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믿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다.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명상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진정하지 않다. 나는 조각상들의 죽은 듯 표정 없는 눈을, 그 눈에 가득한 그 모든 고독을 생각해본다. 삶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그 존재들만이 오로지 삶을 판단할 수 있다. 움직일 줄 모르는 그들의 부동성이 우리를 움직여 우리 자신의 밖으로 넘어서게 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맹목이 우리의 눈을 밝혀준다. 오이디푸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어 한 곳을 응시하게 한다. 안티고네를 인도하여 그녀가 아테네의 찬란한 빛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이디푸스다. 나는 조각상들과 그림들.. 2019. 3. 19. 봄 봄 산수유꽃이 피고 있다. 봄이 와 있다. 가만히 보니까 지난해의 열매가 아직 붙어 있다. 지금 저 신선한 것들의 노랑처럼 저렇게 꽃이 피었던 자리에 맺힌 열매가 아직도 붙어 있는 것이다. 어쩌려고 저럴까? 언제까지 저러려는 것일까? 한때 꽃이었고, 여름 지나고, 가을 지나고, 마침내.. 2019. 3. 16. 푸르렀던 날들 (2) - 정영수(단편소설) 「기적의 시대」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창동인지 어딘지 당시의 나에게는 이름부터 낯설고 아득히 먼 곳처럼 느껴지는 곳에 살고 기타를 잘 친다는)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때 나는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말로 내뱉는 순간 그녀에게 실제와 다른 방식으로 가닿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그런 말이 아닌 실제로 다가가야 할 성질의 어떤 것이었다. 우리가 뭔가가 된다면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무언가, 적어도 전형적인 연애관계가 아닌 무언가여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러한 나의 진실된 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녀와 사귀고픈 .. 2019. 3. 9. 푸르렀던 날들 카페 키토를 지나 상수역까지 걸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눈이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눈을 털어내느라 걸음이 뒤처졌다. 반면 에이치의 걸음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길을 꿰고 있는 사람,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걸었고 나는 뒤를 쫓았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하늘을 봤다. 눈보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는 사람처럼 사거리에 잠시 서 있었다. 눈이 진짜 펑펑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공중에서 펑 하고 나타나는 것 같아. 여기 펑, 저기 펑. 에이치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머리 위의 눈을 털어주었다. 시 쓰지 마. 승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뉴질랜드 사람이야. 정지돈*의 소설 『야간 .. 2019. 3. 7. 외롭게 살려고 온 사람 1월 말이었지? 한 종편 방송에 70년대 가수가 보였다. 애절한 저음으로 작별(作別)에 관한 노래들을 부르던 가수. 쓸쓸히, 그렇지만 괜찮다는 듯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고 있었다. 공학자(工學者)였던 아버지는 월북했고, 어머니는 누나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자신은 동생과 함께 외가에 남았는데 그 동생마저 일찍 죽었다고 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무(全無)하다고 했다. 작별에 관한 노래로 한 시절을 풍미한 이가 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었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내와도 이혼하고 지인이 제공해준 소규모의 목조 '공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공간', 그 거처를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서 나는 한동안 그의 인터뷰를 듣지도 않고 '저 거처는 그저 공간(空間)이라고 불러야.. 2019. 3. 3. 책을 읽는 인간이… 책을 읽는 인간이… 1 두고두고 가슴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책이나 읽으면 뭐가 나온다더냐?" 그렇게 원망한 인간, 그렇게 빈정대고 조롱한 인간, 그 인간과는 지금 헤어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도, 말은 하지 않지만,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책이나 읽으며.. 2019. 3. 1. 죽을 만큼 지겨운가? 1 『시지프의 신화』(알베르 카뮈)에서 죽음(자살)에 이르게 되는 인간이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시점이 생각났다. 갖고 있는 몇 가지 번역본에서 그 부분을 찾아보았다. 어느 것이 충실한지 보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시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 1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 〈시작된다〉―이것이 중요하다. 지겨움은 어떤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들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2019. 2. 19. 서점에서의 감각 방금 어떤 작가가 다녀갔을 것 같은, 몰라서 그렇지 어떤 작가는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부자도 별 수 없을 것 같은, 그와 나를 구분하는 척도가 없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가져본 적 없어서 그럴까요? 마음이 안정될 때도 있었고 들뜰 때도 있었습니다. 잡념이 사라질 때도 있었고, 어떤 책을 발견하게 될까, 어떤 책이 나를 기다릴까,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되고, 할 일이 없으면서도 머리가 분주해지곤 했습니다. 여기에 더 있을까, 저곳으로 가볼까, 있을 만한 곳이 여러 곳인 놀이터였습니다. 사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서글픈 일일까요? 들고 가기에 부담스러울 정도여도 2~3만 원, 대부분 1~2만 원이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믿음직스럽고 부러.. 2019. 2. 7. 고백 고 백 "병풍입니다." 탁자 위에 놓으며 딱 그 말씀뿐이었는데,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더니 몇몇 선배들이 "받아도 된다" "받아야 한다" "우리도 전에 받았다"고 해서 얼떨떨한 상태에서 받고 말았습니다. 그날 그 선배들과 어느 호숫가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로 '어떻.. 2019. 2. 5. 저 강물에서 떠내려가다가 서로 만나듯 1 "그날이 그날"이라더니 어느 날이나 휴일 느낌일 때가 있습니다. '멀쩡한 날'을 잠깐씩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착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져 가는 것이죠. 2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함께 근무하다가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헤어지고 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을 다시 만난다는 건 여간해서는 어렵습니다. 하릴없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좀 만나자고 하는 건 무조건 우스운 일이고, 무엇보다 나를 끔찍해할 것 같고, 혹 그렇진 않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주 바쁘고 좀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저렇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그저 잠깐씩 만났다가 헤어지고 하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미물(微物)처럼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이니, 거기에 관한 무슨 철학이나 있는 것처럼 다시 .. 2019. 1. 30. 윤문(潤文) 1 윤문 요청이 왔습니다. 초등학교 수석교사인데 어느 신문에 기고할 글이라고 했습니다. 윤문은 귀찮은 일입니다. 심지어 내 글조차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읽고 또 읽고, 고치고, 또 고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해서 마침내 송고하게 됩니다. 남의 글 윤문이라니, 잘해서 빛나는 글이 되어봤자 내 이름이 빛날 것도 아니고, 좋은 글이 되었다며 원고료 일부를 받으라고 할 리도 없습니다. 원고료가 탐이 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귀찮을 뿐입니다. 2 윤문 요청이 왔을 때 싫건 좋건 거절한 기억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관계를 끊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상황대로 일을 해서 부치게 됩니다. '상황대로'라는 표현은 이 경우에는 중요한 말입니다. 원고가 90점짜리이면 적어도 95점짜리를 .. 2019. 1. 26. 하루 하루 하루 하루 2018.11.12. 2019년 1월 20일(일요일). 흐림. 저녁에 양치질을 하며 양치질을 참 자주도 하는구나, 오늘은 양치질 말고 무얼 했는가 싶었습니다. 이불을 펼 때는 하루 전에 이불을 폈던 일이 잠시 전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곧 봄이 오고야 말 것 같아서 초조하기도 .. 2019. 1. 21. 이전 1 ··· 44 45 46 47 48 49 50 ··· 9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