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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죽을 만큼 지겨운가?

by 답설재 2019. 2. 19.

 

 

 

1

 

 

『시지프의 신화』(알베르 카뮈)에서 죽음(자살)에 이르게 되는 인간이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시점이 생각났다. 갖고 있는 몇 가지 번역본에서 그 부분을 찾아보았다.

어느 것이 충실한지 보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시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 1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 〈시작된다〉―이것이 중요하다. 지겨움은 어떤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들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의식의 자극이 시작되게 하는 것이다.1

 

# 2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렴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2

 

# 3 장치(裝置)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起床),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을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수월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의 빛깔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시작한다'는 이 말은 중요하다. 권태란 기계적인 생활의 모든 행위의 맨끝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식의 움직임을 시작케 해주기도 한다.3

 

# 4 무대 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일,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러한 길은 대개의 경우 쉽사리 이어져간다. 다만 어느 날 「왜」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어 놀라움에 물든 이 권태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4

 

 

 

2

 

 

이 에세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더할 수가 없다. 그럴 소양이 없다.

다만 저 인물을 만난다면 그러지 말고 더 견뎌볼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그 수많은 날들이 바람 불어간 것처럼 조용한 날이 오게 되면, 그 날들이나 그 날들을 되돌아보고 그리워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겪어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답답하겠지만, 덧없이 보낸 시간들조차 괜찮은 날들로 회상하는 삶도 굳이 나무랄 이유가 없지 않겠는지 물어보고 싶고, 책 한 권, 차 한 잔, 겨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가 있고, 그때 더 생각해도 늦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지겨운지, 죽을 만큼이나 지겨운지……. 감당을 못하겠다 싶은 건 아닌지…….

 

 

3

 

 

시지프의 신화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생각이 잡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에세이의 끝에 이르면 이런 문장이 보인다.5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그 주인공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한다는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그의 고통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그의 삶 속에서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 운명도 역시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것이 의식적인 게 되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무력하고 반항적인,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 범위를 알고 있다. 그가 산을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조건인 것이다. 그의 고통을 이루고 있는 그 명징함이 동시에 그의 승리에 왕관을 씌워 준다. 경멸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4

 

 

결론은 아마도 다음 부분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산기슭에서 시지프스를 떠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보다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준다. 그 역시 모든 것은 좋다고 결론짓는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세계가 그에겐 결코 메마르게도 헛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원자 하나하나, 밤으로 가득한 그 산의 광석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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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희식 옮김, 육문사, 1993(중판), 27.
2.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0(개정1판19쇄), 28.
3. 이정림 옮김, 범우사, 2011(4판1쇄), 38~39.
4. 이가림 옮김, 문예출판사, 1999(제2판제1쇄), 22.
5. 육문사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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