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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사랑59

우르스 비트머(소설) 《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 이노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9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주 건강했다. 그는 입식 보면대 위로 몸을 굽히면서 「모차르트 교향곡 G단조」의 악보를 넘기다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손에는 찢긴 악보 조각이 들려 있었다. 느린 악장이 시작되는 부분의 호른 연주부였다. 언젠가 그는 내 어머니에게 이 「교향곡 G단조」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었다.─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듯이 느는 언제나 악보를 읽곤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정열에 관한, 고집스러운 정열에 관한 이야기. 그 앞에 바치는 레퀴엠. 힘겹게 살아갔던 어느 인생 앞에 바치는 절'(157)이다. 어떤 여인이.. 2023. 3. 10.
사랑 그 열정의 덧없음 :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The Sensible Thing" 허창수 옮김, 《현대문학》 2022년 12월호 조지는 잔퀼이 보고 싶어서 보험회사에서 해고당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고 잔퀼에게로 달려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언제나 마음 같진 않다. 다른 사내들이 케리를 집적거리는 걸 보게 되고 날씨조차 덥다. "많이 덥네요. 선풍기 좀 틀어야겠어요." 선풍기를 조절해놓고 난 뒤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그는 예민해진 분위기를 피하지 못한 채 숨기려 했던 구체적인 얘기를 불쑥 꺼내고 말았다. "언제쯤 저와 결혼할 생각입니까?" "저랑 결혼할 준비는 다 되셨나요" 갑자기 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빌어먹을 .. 2022. 12. 16.
영혼 ② 저 소 눈빛 좀 봐 내가 축사 앞에 서면 쳐다보기도 하고 설설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듯한 표정입니다. - 왜 들여다봐? - 심심한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생각해? - 거기 축사 안에서만 평생을 지내다가 가니까. (도살장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어렵다. 저들도 안다.) - 너희 인간들은 달라? 갇혀 살지 않아? - 글쎄, 우리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잖아. 달나라에도 가잖아. - 그게 대단해? 속담에도 있잖아. 오십 보 백 보... - 오십 보 백 보...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네. 나는 저 어미소와 아기 소(송아지)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저리도 다정할까요? 저 앉음새의 사랑 속에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겠지요? 나는 축사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2022. 9. 11.
송화가루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근무하다가 교장 발령을 받아서 나간 학교는 참 조용했습니다. 광화문의 그 번잡함에 길들었던 나에게 그 조용함은 결코 서두르지는 않는 변화의 상징처럼 느껴졌습니다. 뭐랄까, 아득하고 아늑한 느낌이었습니다. 가을 아침 교장실에 들어가면 귀뚜라미가 그제도 울고 있었고, 아이들이 공부에 열중하는 아침나절의 고요함을 뻐꾸기 혼자 깨어보려고 목청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주차장으로 가면 자동차 유리창이 노란 송화가루로 덮여 있었습니다. ○모네는 명절이 되면 송화가루로 다식을 만들었습니다. 꿀로 버무린 그 다식을 입에 넣으면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나 싶고 나보다 딱 한 살 적은 ○모의 아들이 부러웠습니다. ○모네 말고는 아무도 송화가루로만 만드는 다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네.. 2022. 5. 9.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었다」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었다 김 윤 식 몸을 포갠 저것들 떨어지지 않게 위에 있는 놈이 밑의 놈을 꽉 껴안고 있다 남의 눈을 피하려는 듯 기쁨의 소리를 죽인 채 밑의 놈이 버둥거리며 나아간다 몸을 섞어 하늘 아래 한몸을 이루는 일 참 환하고 부끄럽다 잔등에 녹황綠黃 광택을 입은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다 ――――――――――――――――――――――――――――――――――――――――――――― 김윤식 1947년 인천 출생. 1987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북어·2』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옥탑방으로 이사하다』 『길에서 잠들다』 『청어의 저녁』 2014년 7월 『현대문학』 에서 이 시를 읽을 때는 교미 중인 풍뎅이의 우스꽝스럽고.. 2022. 4. 18.
앨리스 먼로 ... 기억 보트가 움직이자마자 옆자리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트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항해 내내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갑판으로 나가 사람이 거의 없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구명 용품이 든 통 중 하나에 자리 잡고 앉은 그녀는 익숙한 장소들, 또 알지 못할 장소들에 대해 아련한 아픔을 느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기억'함으로써 그 모든 일을 다시 한 번 경험한 후 봉인해 영원히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놓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날의 일을 순서대로 재구성해 마치 보물인 양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해 넣어두려는 것이었다. 메리얼은 두 가지 일을 예상할 수 있.. 2022. 2. 23.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윤수남 옮김, 청림출판 1989 19세 약혼녀(유부녀)와 16세 소년이 애정 행각을 펼친다. 15분 동안 나는 정신없이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 나서 식사 도중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10분 동안이나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동안이면 심장의 고동도 가라앉으려니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세차게 뛰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 뻔했다. 그런데 마침 옆집 창문에서 한 여자가 아까부터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수상쩍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가 마침내 나를 결심시켰다.(44) 난로 앞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몸이 어쩌다 스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이 행복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이 느껴져서 되도록 가만히 있었다... 2022. 1. 11.
"아빠! 얼른 또 만나~"(아빠들에게, 세상의 선생님께) ★ 아빠들에게 2011년 8월 23일 오후, 전철역에서였습니다. 열차를 갈아타려고 걸어오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별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아빠! 또 봐~" "아빠! 잘 가~" "아빠! 얼른 또 만나~" "아빠! …………" "…………" 멀어져 가는 거리를 그 외침으로 메워보려는 듯 그 아이는 연달아 외치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외침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환승역은 언제나 번잡합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의 외침이 너무나 애절해서, 아주 또렷하게 들려서 '아빠!' 그 외침이 들려오는 곳을 찾아 주변을 살폈습니다. 아이는 이미 인파에 묻혔을 것입니다. 순간! 키가 큰 삽십 후반 아니면 사십 초반의 그 아빠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얼.. 2021. 12. 17.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2005 장영희 교수는 유방암의 전이가 척추암이 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주었습니다. 젊었던 날들, 장왕록이라는 번역자의 이름을 자주 보았는데 장 교수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신문의 칼럼에서 그 이름이 보이면 열심히 읽었습니다.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은 왜 그랬는지 읽다가 말았고, 독자들이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을 찾도록 해 달라는 신문사의 주문으로 쓴 칼럼을 엮었다는 이 책은 아예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2021. 12. 6.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 2007 줄거리로 보면 의아하다 싶을 수 있다. 켄 부드르와 조헤너 패리가 결혼하는 데는 둘 사이에 구체적인 미움이나 우정, 구애, 사랑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한 사내 부드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로 늘 곤란을 겪는다. 아내 마르셀이 죽고 딸 새비서마저 장인 맥컬리 씨에게 맡겨 놓고는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가져간다. 세월도 실없이 보낸다. 괜히 공군을 뛰쳐나왔고 주제넘게도 동료 문제로 비료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용주에게 몸을 낮추지 않다가 보험회사에서도 쫓겨났다. 빌려준 돈 대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을 차지했는데 이 건물을 식당 겸 술집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장인에게 또 돈을 좀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쓸모가 전혀 없어서 철거하는.. 2021. 11. 22.
사랑에 빠졌다는 것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거리의 악사 데이비드에게 그런 사람을 위한 일을 하는 레긴스 박사가 묻습니다. "항상 그렇게 돌아다닐 이유가 있나요?" 레긴스 박사가 물었다. 아니라고 데이비드는 대답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이유는 그의 여자 친구가 헤로인 중독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랑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요." "그녀를 사랑했나요?" 박사가 물었다. "사람들은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하더군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내가 어리석었어요." "어쩌면 어리석은 것과 사랑에 빠진 건 같은 건지도 몰라요." 박사가 말했다. "동감이에요, 박사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솔로이스트』(스티브 로페즈, 랜덤하우스 2009)의 한 장면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건 어리석은 것과 같다? 사랑에 빠지는 건 어리석기 때문이다?.. 2021. 7. 1.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남순우 옮김 / 혜원출판사 2005 딸 다섯을 둔 가정, 그 딸들의 결혼을 이야기한다. 베넷 씨는 날카로운 재치와 풍자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신중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23년이나 함께 생활한 그의 아내조차도 남편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반면에 그의 부인은 속으로 감추지 못하고 쉽사리 노출시키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지식이나 교양이 풍부하지 못하여,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자기 신경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혼자 결론을 내리곤 했다. 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 그녀의 인생 목적이었고, 다른 집을 방문하여 수다를 떠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8) 이 집의 .. 2020.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