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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8

재숙이네 채소밭 "쌤, 잘 계시나요?" 어제 오후에 재숙이가 전화를 했다. 정초 인사였다.재숙이는 짐작으로 61세? 62세? 딸 둘을 결혼시켜 손주들을 보았다. 막내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초등학교 6학년 다닐 땐 못 먹어서 그랬겠지? 호리호리하고 도무지 말수도 없고 내 표정만 빤히 바라보았다. "재숙이구나!"연휴라서 남편과 함께 채소밭에 나왔단다."이 추운 날 채소밭에는 왜?""쌤, 여긴 겨울에도 농사지어요.""허, 그래?"재숙이네는 남해의 섬에 산다. 날씨와 겨울채소 가꾸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나는 재숙이의 설명을 들었다. "손주들은 재숙이 닮았겠지?""쌤, 저 닮으면 안 되죠! 공부도 제일 못했는데..."('그건 그랬지.')"넌 일 나가시는 엄마 대신 동생들 보느라고 공부를 할 시간이 도통 없었잖아.".. 2025. 1. 31.
설날을 앞둔 날 밤의 꿈 러시아에 대한 수업으로 정할까 싶었다.러시아?광활한 그 영토나 역사, 문화, 유명한 독재자, 소설, 음악, 옛 소련,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등 설명할 내용은 많지만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5분이나 10분쯤이면 끝장날 것이다.그나마 아이들이 경청할 리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차라리 아이들에게 맡기는 게 나을 것이다. 수업방법으로도 옳다. 요즘 세상에 아는 척하며 설명이나 하는 교사가 어디 가서 명함을 내겠나.아이들은 아는 것도 많지만 호기심, 관심, 의욕 등등 이야기의 촉매제가 다이너마이트 같을 뿐만 아니라 듣고 보고 읽은 것들이 그들 각자의 창고에 가득가득 쌓여 있다. 혹 입을 열지 않으면?그럼 외부의 촉매제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가령 러시아 지도! 러시아 지도는 귀하니까 아시아 지도! 아시아 지도에.. 2025. 1. 29.
내 지팡이는 지팡이가 아니다 나는 자주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그건 내 의지가 아니다. 아내 때문에 갖고 다닌다. 연전에 나는 어처구니없이 보도블록이 깔린 길바닥에 엎어졌었고 얼굴 일부를 다쳐서 피를 많이 흘렸고 그 상처 때문에 몰꼴이 말이 아니었었다. 아내는 놀라진 않았지만 곧 지팡이를 써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버렸다.그 결정을 듣는 순간, 이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싶었지만 길바닥에 엎어져 다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그 사실은 무슨 대단한 일로서 방송이나 지역 언론에 발표되는 식으로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하필이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공개된 일이어서 아내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그 결정을 갈아엎고 되돌린다는 건 결국 나에게 무엇으로든 '손해'가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손해'라니, 무슨 손해?그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 2025. 1. 28.
기이하게 된 내 판단력 우리 초등 동기생 세 명은 A-4에 배정되어 있었다.뭐든 얘기해도 좋은 사이지만 주고받은 얘기들을 각자 자신의 아내에게 전하고 안 하는 건 알 수가 없다.C와 C' 둘 다 아내와 다른 방에서 잔다고 했다. 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나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얘기를 전하지 않았다. 쓸데없기 때문이었다).나도 그들에게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었다.우리는 그 사실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고 즐거워하거나 서글퍼하지 않았고 울거나 웃지도 않았다. 오늘도 C가 주로 얘기했고, 나는 적극적으로 들어주었고, C'는 관심 갖고 듣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데다가 C의 음성은 요즘 더욱 탁해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짐작으로 대충 듣지만 C'는 평생 한결같이 그렇게 들었다.. 2025. 1. 26.
바흐를 좋아하시나요? 어언 60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가을날 교정에서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읽어봤는지 물은 그 여학생을, 그로부터 50년쯤 후 남한산성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에서 만났다.그 교정에서 그 여학생은 예뻤다. 짝을 찾는 일을 제쳐놓고 실속 없는 일에나 정신이 팔린 내게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노트 복사물을 만들어 은밀하게 건네주기도 했다.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은 호젓하진 않았다.그 옛날 우리 반 동기생들이 남한산성 아랫마을 한 식당에 많이 모였는데 그녀와 나 중 어느 쪽의 의도였을까,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던 그 길에서 어느 순간 그녀와 내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었다. 다른 얘기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남편을 만난 얘기만 또렷하다.그 남편도 우리 반이었으므로 나하고.. 2025. 1. 19.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 책을 읽을 땐 온갖 생각, 온갖 짓을 다 한다. 남은 책장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누가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책을 들고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한숨을 쉴 때도 있고, 한 줄 한 줄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아껴가며 읽기도 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숨 가쁘게 읽기도 한다. 김경욱이라는 작가가 쓴 "현대문학" 1월호의 단편소설 「도련님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는 숨가쁘게 읽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나, 한탄도 하고 이미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생각 좀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반성도 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가정교사인 화자가 제자로부터 배우는 장면 중 하나이다.   "무슈는 꿈이 뭐예요?"하루는 강선재 군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비올라 양 아버님이 .. 2025. 1. 17.
영화 "알리타" 지금 알리타(사이보그)가 그녀의 남친 휴고(인간)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저 정도에 그치고 '12세 이상 관람 가'여서 뜻을 알 만한 웬만한 아이들은 다 봐도 될 것 같다. 알리타는 연약해 보여도 악의 무리를 여지없이 무찌르는 멋진 전사다.남친 말고도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그녀의 몸이 망가지면 복구해 주는 의사 이도 박사가 그녀와 함께 지낸다.저렇게 사랑을 나누고 돌아와서 묻는다. "인간이 사이보그를 사랑할 수도 있나요?"이도의 대답은 명쾌하다. "사이보그가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이 영화는 저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날을 26세기로 잡았다.그럼 대충 500년 후라는 얘긴데 50년 후가 될 수도 있다. AI(인공지능)라는 것이 지금 우리 주위를 얼씬거리는 걸 보면 불가능한 건 아무것.. 2025. 1. 11.
청둥오리에 대한 고양이의 생각 오른쪽 중간쯤의 냇물에 청둥오리 세 마리가 있다. 한 마리는 이쪽 풀숲으로 나와 있고 한 마리는 나오는 중이고 한 마리는 아직도 냇물 속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냇물의 이쪽 기슭을 따라 왼쪽으로 올라오면 풀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고양이 한 마리의 상체를 볼 수 있고, 냇물 건너편 저쪽에는 이쪽 고양이의 아내인지, 아니지, 새끼 고양이겠지, 통통한 고양이 한 마리가 돌 위에 옹크리고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 엄마가 저 세 마리 중 한 마리만 잡아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나는 굳이 어느 쪽 편을 들고 싶진 않아서 그냥 지나오긴 했지만 고양이들이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고양이 가족이 '청둥오리 전골 파티'를 포기해서 오리 가족이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아마도 안전했겠지.. 2025. 1. 9.
삶을 시처럼 음악처럼... ⇧ Elle Magazine 2024년 4월호 표지(부분)     "니콜 키드먼, 18년 동안 결혼생활하는 비결 “양방향 샤워기+화장실 2개 덕분”(해외이슈)" 인터넷 서핑 중이었다. '뭐라는 거지?'  할리우드 배우 니콜 키드먼(57)이 컨트리 가수 키스 어번(57)과 18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을 털어놓았다.그는 3일(현지시간) W매거진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양방향 샤워기를 갖고 있다”면서 “양방향 샤워기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비결이다”라고 말했다.이어 “별도의 화장실”을 설치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이하 생략)  18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자랑한 것도 그렇지만('나와 다른 세상 사람이긴 하지') 화장실을 2개(별도의 화장실) 설치한 걸 비결이라고 한 것도 어처구니없었다.내겐 .. 2025. 1. 8.
소한(小寒)에 내린 눈 소한 날 눈이 많이 내렸다.지난 초겨울의 폭설처럼 볼 만하진 않고 여기로는 세 번째여서 '또 내리는구나' 싶었다. 눈발 속으로 구세군의 모습이 떠올랐다.이 동네 중심지에 나와 있던 구세군은 엊그제 봤더니 이미 철수해 버려서 그 자리가 썰렁했다.그들이 추위를 지켜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아직 추운데 벌써 가버렸나 싶었다. 이 눈 내리고 나면 며칠간 많이 춥겠다고 했다.'소대한 지나면 얼어 죽을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지만 소한이 춥다는 속담은 더 많다.'춥지 않은 소한 없고 푹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에 집 나간 사람 찾지 말라.'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 '소한이 대한 집에 몸 녹이러 간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라도 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 고비 지나고 나면 좀 낫겠지.그러다가 마침.. 2025. 1. 5.
태양이 지구를 삼키건 말건... 태양은 수소를 원료로 핵반응을 함으로써 열과 빛을 생산해서 지구까지 보내주고 있어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지만 헉!!!영원하지는 않단다.서서히 식어버려 붉은빛이나 내는 별이 되고 마침내 지구를 삼켜버린다는 것이다.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지?  별의 일생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의 태양을 예로 들어보자. (...) 태양은 수소를 융합하여 헬륨을 만들고 있으며, 이 과정은 앞으로 50억 년 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50억 년이면 꽤 긴 시간이지만, 무한대하고는 거리가 멀다. 즉, 태양의 수명은 영원하지 않다. 수소를 원료 삼아 핵반응을 계속하면 태양의 중심부에는 헬륨이라는 부산물이 타고 남은 재처럼 쌓이게 된다. 그리고 태양은 엄청나게 크지만 무한히 크지는 않기 때문에, 언.. 2025. 1. 5.
치토스와 빼빼로와 나 사진을 뒤적이다가 이 풍경을 발견했다. 아파트 앞 슈퍼에 다녀오던 저녁이었다.'치토스'와 '빼빼로'를 두 봉씩 샀다.당연히(!) 한 봉씩 사려고 갔었다.그런데 치토스가 두 가지이고 빼빼로는 몇 가지인지 세기도 어려웠는 굳이 셀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나는 그 변화의 신기함에 황홀했고, 갈등을 느꼈다.'최소한'이라고 여기며 두 가지씩만 샀다. 그걸 들고 돌아오는데 저 앞에 퇴근하는 사람이 보였다.문득 그렇게 퇴근하며 지내던 서글프고 춥고 하던 날들이 떠올랐다.야근을 하면 그 서글픔, 썰렁함 같은 감정들이 훨씬 더했다.때로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이 나라에 이 직급의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므로 그 서글픔, 썰렁함 같은 것들을 당장 물리치곤 했다.일요일 포함해서 집에서 저녁식사하는 것이.. 2025.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