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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82

시인의 봄 혹은 어처구니 없는 춘분 엄청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주 극성스럽게 말고 참 좋은 '아주머니' 혹은 '주부', 아니면 '여성분' '그대로' 살아가며 꽃 같은, 돌 같은, 혹은 강, 도자기, 어쨌든 그런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기를 기대하는 시인이다. 그 시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렇게도 함박눈 많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에요 봄날 건강히 지내셔요. 달력을 봤더니 글쎄 춘분이더라고요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강원도엔 오늘도 눈이 왔는데... 이 꽃은 무슨 봄꽃일까 들여다봐도 평범하질 않으니 알 길이 없네요 (시인의 봄이) 봄꽃 같기를 바라며... 바위틈에서 자라는 앵초란 꽃이에요 ㅎㅎ 계절이 때맞춰 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구요 2024. 3. 21.
나는 한밤에 벨기에에서 찬을 만났다 사람들은 찬이 작다고 깔본단다. " 하하하, 9살인가요?" 찬은 마음대로 웃어도 좋다며 대답한단다. "그렇지만 5분만 지나면 조용해집니다. 그냥 음악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전율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콜로라도의 노루님 블로그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밤에 지구 반대편 벨기에 로테르담으로 떠났고, 거기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세헤라자데를 들었다. 지휘자는 정말 작은 여성 엘림 찬이었다. 나는 45분간 엘림 찬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그 음악을 들었고 5분 정도 더 머물며 청중과 인사를 나누는 엘림 찬을 지켜보았다. 지휘자 찬이 있는 세상이니까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데도 아름답고, 찬도 아름답고, 연주자들도 아름다웠다. 세상은 엉망.. 2024. 3. 16.
'오늘의 운세'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별 희한한 걸 다...' 그 운세가 들어맞든 엉터리든, 뜬구름 잡는 식이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럴듯하든 영 어긋난 것이든 일단 ─지금까지 들어 온 바로는─ 그 사이트에 가입할 때 적어 넣은 내 생년월일이 음력으로 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운세라는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혹 양력으로 된 기록들을 일일이 음력으로 환산해서 찾은 운세라고 하자. 그래봤자 그렇다. 우리나라 나이가 고무줄 나이인 데다가 내 실제 생년월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비밀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 선친은 내가 태어난 1년 후에 나를 호적에 올렸고 그때 내 음력 생일로 신고했는데 그게 양력으로.. 2024. 3. 11.
영혼 ② 호통치는 강아지 살아 있는 '진짜' 강아지인데 태엽을 감아 놓으면 "멍! 멍!" 짖으며 방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하얀 장난감 강아지 같았다. 너무 더워서 일거리를 가지고 냇가로 나온 할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기웃거리고 있느냐"는 듯 내 오른쪽에서 녀석을 내려다보는 노인을 부릅뜬 두 눈으로 꾸짖고 있는데, 딴에는 앙칼지게(그래봤자 앙증맞게, 그러니까 귀엽게) 짖어대는 중이었다. 하도 용을 써며 짖어서 앞뒷발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번갈아 뛰어올랐다. 저게 어떻게 무슨 짐승이나 새를 쫓을 때 한 발을 쾅 쾅 구르며 위협하는 사람처럼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강아지는 한 발로 구르는 게 아니라 두 발, 아니 네 발을 다 써서 그렇게 구르며 호통을 치고 있어서 더욱 앙증맞고 귀엽고(딴에.. 2024. 3. 4.
"저 사진은 뭐야?"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여기 이 방은 내가 꿈꾸어온 바로 그런 곳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긴 하지만 이 정도로도 나에겐 과분하다.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생각만 나면 이 아파트 도로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자동차와 배달 오토바이들을 내려다볼 수 있고 건너편 아파트도 살펴볼 수 있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는 그 불빛들을 하염없이 내다보기도 한다. 부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산다는 티 하우스 뒤로는 지금은 눈 덮인 산, 가을에는 단풍이 드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저녁때는 서울 방향으로는 고운 석양도 볼 수 있다. 밤이 깊으면 24시간 운영 무인 카페(24 hours open cafe)의 음악이 실낱같이 들려서 그것도 좋다. 여기에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 한다. 여유를 찾고 싶어 한다. .. 2024. 2. 27.
2024년 2월 25일(일요일) 눈 눈이 녹기를 기다려 들어왔는데 또 눈이 내렸다. 비로 시작했는데 눈으로 바뀌었고, 가늘던 눈발은 이내 폭설이 되었다. 가슴속에만 남아 있어 애써 감추며 살던 것들마저 잃어버린 나는 시인이 한계령을 넘으며 만나고 싶어 한 그런 눈은 생각할 것도 없다. 눈은 외로웠다. 올해의 마지막 눈일까? 이 겨울에는 이미 여러 번 내렸지만 알 수는 없다. 3월에 눈이 내린다고 해서 큰일 날 일도 없고 가슴 무겁게 하는 그 봄이 더디 온다고 해서 탈 날 일도 아니다. 2024. 2. 26.
일본 영화 《플랜75》와 소설 《당신의 노후》 2022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하야카와 감독 인터뷰 기사를 봤다(「"경제 좀먹는 노인" 총살..."이젠 현실 같다"는 섬뜩한 이 영화」 중앙일보 2022.10.12). 기사의 전반부는 이렇다. "고령층이 일본 경제를 좀먹고,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부담감을 지우고 있다. 노인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 젊은 남성이 이 같은 주장을 남긴 뒤 노인들을 총기로 살해한다. 유사한 노인 혐오 범죄가 잇따르자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에게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제정한다. 이른바 '플랜75' 정책으로, 국민이 죽음을 신청하면 정부가 존엄사 절차를 시행해 준다. 이 제도를 택하는 노인에게는 '위로금' 명목으로 10만 엔(약 98만 원)도 지.. 2024. 2. 21.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일까? 안녕하세요 답설재 선생님, ○○출판사 편집부 ○○○ 인사드립니다. 도서 출판을 위해 원고를 편집하던 중 선생님의 칼럼을 활용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활용에 대해 문의드리며, 답변 말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활용하려는 원고] 한국교육신문의 칼럼 '교과서 주간'을 보내며 (https://www.hangyo.com/news/article.html?no=19401) [활용처] 대학교 교재의 쉬어가는 글 [활용목적] 본 교재는 초등수학교육의 과정사를 총망라하는 책입니다. 교과서의 변천사에 대한 내용을 '초등수학'에 조명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칼럼이 도서의 내용 전달에 큰 도움이 되어 활용을 문의드리게 되었습니다. 활용에 제한이 있을 시 답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기타 문의] 칼럼을 활용해도.. 2024. 2. 19.
"IT TOOK ME 90 YEARS TO LOOK THIS GOOD" 내 친구 김 교수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여기 오면 기분이 좋아요." '여기'란 우리 동네이기도 하고 그 카페이기도 합니다. 그는 메뉴판 들여다보는 시간의 그 여유를 좋아합니다. 매번 30분은 들여다보지만 그래봤자 뻔합니다. 살펴보고 망설이고 해 봤자 결국 스파게티나 리소토 한 가지, 피자 한 가지를 시키게 되고 우리는 그것도 다 먹지 못합니다. 그는 다만 미리 콜라를 마시며 그렇게 망설이고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즐길 뿐입니다. 지난 1월의 어느 일요일에 만났을 때는 그럴 줄 알고 내가 콜라 한 병을 미리 주문해 주었는데 얼음을 채운 그걸 마시며 이번에도 30분 이상 메뉴판을 이쪽으로 넘기고 저쪽으로 넘기고 하더니 난데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스테이크 시킬까요?" "그 비싼 걸 뭐 하려고.. 2024. 2. 13.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께 꼭 여쭤보세요" 병원에서 보내는 뉴스레터에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과 함께 이런 제목이 보였다.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께 꼭 여쭤보세요" 설날 부모 방문을 감안했겠지. 그렇다고 "얘야, 내게 이런 것 좀 물어봐다오" 하는 것도 우습고 뭔가 보기나 보자 싶었다. 명절이 되면 본의 아니게 부모가 생존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부담을 주는 일들이 흔히 눈에 띈다(부모가 세상을 떠난 사람은 그런 부담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거의 돈 때문이다. 전문(前文)은 이렇다.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사는 경우, 매일매일 부모님의 건강을 챙기긴 쉽지 않다. 때문에 생신, 명절 같이 고향을 찾는 날은 부모님의 건강을 점검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부모님의 건강을 지켜드리기 위한 가장 쉽고 중요한 방법은 부모님의 일상생활에 관.. 2024. 2. 9.
갑진년(甲辰年) 용(龍)띠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만 봐도 "갑진년은 언제부터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설날이 지나가고 그래야 줄어들고 사라지겠지요. 지난 1월 17일 "갑진년(甲辰年)은 언제부터죠?"라는 글에 '입춘(立春)부터'라고 하더라는 내용을 썼지만 그걸 알게 되기까지는 참 답답하긴 했었습니다. "갑진년은 언제부터죠?" ☞ https://blueletter01.tistory.com/7640722 달력을 만드는 분들이 이런 걸 분명히 해서 착오와 혼란이 없도록 해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갑진년생(生)이니 을사년생이니 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무슨 띠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입춘부터 태어난 아기는 용띠가 되겠지요? 아이들에게도 그건 분명히 알려주어야 할 것.. 2024. 2. 8.
"결국 입춘" 어제 한 불친이 제 블로그에 와서 "결국 입춘"이라고 했습니다. ☞ https://blueletter01.tistory.com/7640744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점점 더 나이들어 가고 그러는 세월에 대해 딱 넉 자로 갈무리한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답글의 심사는 만약 내년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더욱 짙어질 것입니다. 그나저나 갑진년은 입춘부터라지요? 그러니까 어제부터 용띠 아기가 태어나는 거죠. 2024.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