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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65

이 아침의 행운 창 너머 벚꽃이 만개한 아침이다. 어찌할 수 없는 상실과 아픔, 지울 길 없는 아픔과 슬픔으로 이어져 온 생애의 기억들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는 느낌이다. 꽃그늘을 걷는 사람들 표정이 먼 빛으로도 밝고, 문득 이 아침이 행운임을 깨닫는다. 이런 시간이 행운이 아니면 그럼 언제 어디에 행운이 있겠나. 2024. 4. 9.
말씀 낮추시지요 허리를 구부리고 뭘 좀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럴 때 "예~"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게 불가능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달려가 울타리 사이로 내다봤더니 웬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이웃'이라고 했다. 반가워하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불쑥 "전 올해 육십입니다. 자주 뵐 텐데 말씀 낮추시지요."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수가 있나. 응겁결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도 너무나 좋습니다." 종일 생각했다. '아, 이거... 어쩌다가 육십 먹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됐지? 말을 놓으라니, 그런다고 덥석 말을 놓진 않겠지만 빈말이라도 그렇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난 이젠 정말 늙었나 보다. 이거 참...' 도대체 난 뭘.. 2024. 4. 7.
산책로의 오리구이 전문점 나는 산책을 할 때 웬만하면 저 집 앞을 지나가는 길을 선택한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신점·신수·결혼운·사업운·궁합·택일'이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점집이 있다. 나는 무엇을 물어볼 수 있을까... 신수? 그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당신은 워낙 박복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하나?... 생각만 깊어져서 지나간다. 저 방갈로 모양의 집은 오리 고기 전문점이다. 지난 초봄 어느 토요일, 동탄 사는 내 초등학교 친구 부부가 저 집으로 찾아왔었다. 오리구이는 워낙 맛이 좋아서 우리 내외는 먹을 겨를이 거의 없었다. 아내에게 좀 미안해서 며칠 후 둘이서 새로 찾아갔는데 그날은 또 내가 실컷 먹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니까 아내는 어이가 없었을 것 같다. 바야흐로 목련이 한창 피어나기 시.. 2024. 4. 4.
잡초는 쉬질 않네 해마다 저 세석 사이로 잡초가 올라온다. 잔디 사이로 올라오는 건 더 쉽다. 봄에만 올라오는 것도 아니다. 한겨울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며칠만 기다리면 그들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다행한가. 그 잡초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게 주어지는 일을 한다. 2024. 4. 2.
봄 속으로 들어간 아이들 어떤 선생님일까... 아이들을 봄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선생님. 2024. 4. 1.
이 치약 괜찮지 않아? 이 치약 괜찮네 싶어 또 구입하자고 생각했다. 거품이 너~무 심하게 일어도 거북하지만 적어도 가짜 같은 느낌이고, 특이한 맛이 나거나 특이한 냄새가 나면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밍밍하면 지금 장난하나 싶고 적당히 톡 쏘고 적당히 매워야 그럴듯하다. 그럼 이 치약은 평범하면서도 적당한가? 나는 성격이나 취향 같은 건 고약해도 평범한 치약을 좋아하는 '치약적인 면'에서는 평범한 사람인가? 모르겠다. 필요하면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치약에 대해서도 특이하다(평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 그걸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나? 치약 연구가들이나 제조업 종사자들은 비교적 잘 알겠지? 이 튜브에 그걸 밝혀 놓지 않았을까? "이건 평범한 치약의 일종이다.. 2024. 3. 27.
에디슨 흉상 보기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 '에디슨 흉상'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디슨 흉상이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에디슨 흉상을 하나 사고 싶은 걸까? 에디슨은 돈을 많이 벌어서 요즘 갑부들처럼 온갖 호사를 누려보았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에디슨'을 넣으면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도시로 토머스 A. 에디슨의 연구실이 있던 곳이라는 설명도 있고, 영어권의 인명이자 성씨인데 으레 사업가이자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을 가리킨다는 설명도 보인다. 에디슨은 묘한 인물, 재미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병아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달걀을 품고 앉은 그를 어머니가 발견한 이야기, 학폭을 저질 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엉뚱한 짓, 황당한 행동을 하다가 퇴학을 당해서 어머니가 데리고 오며 걱정 말라고.. 2024. 3. 25.
이별하기 사무실에 나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자.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고 헤어지자. 뭐라도 갖고 가게 하자.'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했는데 사람이 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해 놓고도 얻어먹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도 했다. 그리고는 곧 코로나가 번지고 점점 더 심각해졌고 이래저래 사무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소득 없는 아이디어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요즘도 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누굴 만나든, 누가 찾아오든, 이번엔 누가 내야 할까를 계산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를 읽다가 그때.. 2024. 3. 22.
시인의 봄 혹은 어처구니 없는 춘분 엄청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주 극성스럽게 말고 참 좋은 '아주머니' 혹은 '주부', 아니면 '여성분' '그대로' 살아가며 꽃 같은, 돌 같은, 혹은 강, 도자기, 어쨌든 그런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기를 기대하는 시인이다. 그 시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렇게도 함박눈 많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에요 봄날 건강히 지내셔요. 달력을 봤더니 글쎄 춘분이더라고요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강원도엔 오늘도 눈이 왔는데... 이 꽃은 무슨 봄꽃일까 들여다봐도 평범하질 않으니 알 길이 없네요 (시인의 봄이) 봄꽃 같기를 바라며... 바위틈에서 자라는 앵초란 꽃이에요 ㅎㅎ 계절이 때맞춰 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구요 2024. 3. 21.
나는 한밤에 벨기에에서 찬을 만났다 사람들은 찬이 작다고 깔본단다. " 하하하, 9살인가요?" 찬은 마음대로 웃어도 좋다며 대답한단다. "그렇지만 5분만 지나면 조용해집니다. 그냥 음악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전율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콜로라도의 노루님 블로그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밤에 지구 반대편 벨기에 로테르담으로 떠났고, 거기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세헤라자데를 들었다. 지휘자는 정말 작은 여성 엘림 찬이었다. 나는 45분간 엘림 찬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그 음악을 들었고 5분 정도 더 머물며 청중과 인사를 나누는 엘림 찬을 지켜보았다. 지휘자 찬이 있는 세상이니까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데도 아름답고, 찬도 아름답고, 연주자들도 아름다웠다. 세상은 엉망.. 2024. 3. 16.
'오늘의 운세'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별 희한한 걸 다...' 그 운세가 들어맞든 엉터리든, 뜬구름 잡는 식이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럴듯하든 영 어긋난 것이든 일단 ─지금까지 들어 온 바로는─ 그 사이트에 가입할 때 적어 넣은 내 생년월일이 음력으로 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운세라는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혹 양력으로 된 기록들을 일일이 음력으로 환산해서 찾은 운세라고 하자. 그래봤자 그렇다. 우리나라 나이가 고무줄 나이인 데다가 내 실제 생년월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비밀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 선친은 내가 태어난 1년 후에 나를 호적에 올렸고 그때 내 음력 생일로 신고했는데 그게 양력으로.. 2024. 3. 11.
영혼 ② 호통치는 강아지 살아 있는 '진짜' 강아지인데 태엽을 감아 놓으면 "멍! 멍!" 짖으며 방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하얀 장난감 강아지 같았다. 너무 더워서 일거리를 가지고 냇가로 나온 할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기웃거리고 있느냐"는 듯 내 오른쪽에서 녀석을 내려다보는 노인을 부릅뜬 두 눈으로 꾸짖고 있는데, 딴에는 앙칼지게(그래봤자 앙증맞게, 그러니까 귀엽게) 짖어대는 중이었다. 하도 용을 써며 짖어서 앞뒷발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번갈아 뛰어올랐다. 저게 어떻게 무슨 짐승이나 새를 쫓을 때 한 발을 쾅 쾅 구르며 위협하는 사람처럼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강아지는 한 발로 구르는 게 아니라 두 발, 아니 네 발을 다 써서 그렇게 구르며 호통을 치고 있어서 더욱 앙증맞고 귀엽고(딴에.. 2024.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