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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82

엄마, 엄마, 엄마, 엄마 2024년 6월 4일 화요일 맑음. 엄마는 팔을 뻗으며 다가왔다.생시보다 눈동자가 뚜렷해보이고 눈가가 촉촉했다.사이를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연이어 네 번 "엄마"를 부르고 두 손으로 엄마의 두 손을 잡았다.아쉽지만 그게 끝이었다.손을 잡으며 잠에서 깨어나버렸고, 누운 채 엄마를 생각했다.우리는 52년 전에 영영 헤어졌다. 2024. 6. 4.
달빛 가득한 밤 서울에 가면 이런 시간에도 불야성이겠지.서울 아니어도, 가로등만으로도 밤새 하얗게 밝은 곳도 얼마든지 있지.자칫하면 세상이 쓸쓸한 줄도 모르고 외로운 곳인 줄도 모르게 되지.건너편 아파트를 내다보면 매일 밤 몇 집은 밤새 불을 밝히고 있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나?' '누가 아파서 도저히 불을 끌 수가 없나?'...... 그런 걱정 없이 자리에 들며 그나마 다행이라는 느낌으로 잠들게 되지. 이곳은 전혀 달라.가로등이 없어.너무 적적해.개울 건너편 나지막한 집 보안등만 밤새 반딧불처럼 깜빡여.나만 불을 밝혀두면 온갖 벌레들이 다 모여들겠지. 내가 모르는 짐승 두어 마리가 저 집 뭐 하는지 가보자고 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건 싫어. 걱정스러워. 그렇게 잠들면 반쯤 열어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달빛.. 2024. 5. 29.
이 영어쌤 줄 공책에 검은색 사인펜만 가지고 만들었네!글씨도 다채롭고 스펙도 잘 나타내고 자신감도 보여주고...화지(畵紙)도 없고 색연필도 없고 줄공책과 사인펜 한 자루밖에 없었을까? 혹 일부러 그랬나?아파트 각 동(棟) 출입구마다 붙였다면 몇 장이나 만들었을까? 복사는 한 걸까?아 전단지 제작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였겠지?어떤 성품을 지녔을까?정말로 잘 가르칠 수 있을까?  2019년 2월 25일에 붙였던 전단지니까 그새 5년이 지났다.과외는 성공적이었을까?지금은 어디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2024. 5. 28.
오늘의 운세, 고마운 덕담 디지털에 약한 나는, 데스크톱으로 보는 세상과 핸드폰을 써서 보는 세상이 서로 다르다. '이걸 핸드폰에서는 어떻게 찾지?' 싶은 것이 있고, '데스크톱에는 이런 게 안 뜨던데...' 싶어도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물어볼 데도 없다. 되는대로 지내면 된다. 아침에 데스크톱을 열면, 두 가지 사이트 중 한 곳에서는 '오늘의 운세'를 읽는다. 내 생년월일은 엉터리여서(음력을 양력인양, 더구나 한 해 늦게 태어난 것으로 신고해서) 그게 누구의 운세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그 '오늘의 운세'를 내 것으로 삼기로 했다. 누가 "당신은 당신의 것이나 봐!" 하면 나는 서럽거나 억울할 것이다(인터넷 사이트 개설 때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을 적어 넣지 않으면 아.. 2024. 5. 27.
우리가 떠난 후에도 제자리에 남아 거실 창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저 나지막한 산은 규모는 그저 그래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기상은 믿음직합니다.새잎이 돋아난 연둣빛이 수줍은 듯 곱던 날들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녹음에 싸여 저기 어디쯤 들어가 있으면 누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싶고, 몇몇 산짐승이나 새들, 온갖 벌레들이 한동안 마음 놓고 지낼 듯해서 더 푸르러라, 아주 뒤덮어버려라,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우리 인간들이 걸핏하면 괴롭히지 않습니까?매연도 그렇지만 저렇게 좋은 산을 야금야금 파먹어버립니다. 이래저래 가만두질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변화가 그들에게는 결코 이로울 게 없는데도 자연은 웬만하면 그 상처를 스스로 덮어버리고 우리가 잘라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저 자리를 지키면서 저 싱그러움, 푸르름으로 눈길을 끌어주고, 내가 그.. 2024. 5. 17.
내가 듣는 것들 소식 없다고 서운했겠지.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의 일이야. 저기 있을 땐 음악을 들어. 여기 있을 땐 책을 '듣고'. 그것뿐이야. 다른 일은 없어.저기 있을 땐 또 생각하지. 여기선 음악을 '듣고' 거기 가면 책을 듣는다고. 다른 일은 없어. 세상의 일도 내 일도 나의 것이 아니야. 음악은 왜 들어? 책은 왜 들어? 그렇게 물으면, 둘 다 같은 거야. 음악은 지금의 나와 지난날들, 더러 앞으로의 내가 이리저리 떠오르는 것이고, 책은 구체적이어서 '그래,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 정도야.결국은 같은 거야. 둘 다 듣고 나면 그만이야. 그것들은 다 '순간'이야. 앞으로도 소식 없을 거야. 나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2024. 5. 10.
민들레꽃 바라보기 "뭘 그렇게 들여다봐? 지나가다 말고.""너희 좀 보느라고.""한심해? 초라해?""굳이 후손을 퍼뜨려보겠다고, 일찌감치 꽃 피우고, 어디로든 좋은 곳으로 날아가서 내년에 꽃으로 피어나라고, 그렇게 꽃씨를 달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서 있는 가련한 꼴이라니...""어쭈구리, 너희 인간들은 다른 줄 알아?""우리가 왜?""고달프긴 마찬가지지. 오죽하면 결혼을 마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고달픈 것만도 아니지. 온갖 이유가 다 있을걸?""그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경우지. 애써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지.""내가 그 말이야, 이 사람아!""자식 두는 의미가 뭔지 의구심이 들긴 해.""잘해주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자식도 있지? 그렇지? 갖다.. 2024. 5. 9.
실리콘 코킹 기사들 보름 전에 통화한 코킹 업체 사장은 분명히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는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젊은 기사 두 명이었다. 일이야 기사들이 한다 쳐도 사장이 있어야 제대로 될 것 아닌가 싶었다."사장님은요?"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두 젊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들인데요, 아버지는 나이가 좀 많아서 (어쩌고 저쩌고)... 저희가 일 끝내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그 해명이 공손하고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아파트 뒷마당에서 올려다보며 어디쯤이 물이 새는 창문틀인지, 그런 곳이 어디 어디인지 가늠해 보고 업체 측에서 도착하면 깔끔하게 설명해 줄 작정이었고 그러면 그들은 "늙은이치고는 섬세하네" 할 것까지 예상해 두었는데 ('이런!') 그들은 실내로 들어오더니 .. 2024. 5. 7.
저 정교함! 햇빛만 받으면 그만일 텐데 굳이 저렇게 정교한 이유가 뭘까?내가 한 일 중 저 모습을 닮은 것이 있었나?나는 이렇게 허술한데 인간은 어떻게 해서 ─옳은 일이었든 그른 일이었든─ 자연을 정복해 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저 정교함에 대해 감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론들은 저것을 설명하려는 것이었겠지?저 정교함은 어떤 이론에 대해 기분이 좋을까?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를 읽고 메타세쿼이아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금방 참 좋은 나무구나 싶었다. 건축사 무라이 슌스케가 실제 인물 같고, 그가 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존경받는 것이 부러웠고, 그가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소 정원의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보며 살았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 .. 2024. 5. 5.
개구리 소리에 대한 생각 개구리마을  이 동네 개구리 소리는 유별난 데가 있다.실내에서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이웃 사람들 이야기 소리처럼 도란도란 들려오는데 문을 열면 돌연 어느 길잡이가 "야! 저 노인 문 열었다!" 하고 외친 것처럼 온 동네 개구리 소리가 일제히 이쪽을 향해 범람해 온다. 이건 완전... 전 동네 개구리란 개구리는 모두 들고일어나서 노래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초등학교 교장일 때, 우리 학교 합창단 아이들이 생각난다.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겠지 하고 강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일제히 '교장이다!' 하고 자세를 바꾸었다. 노래도 안무도 지휘를 더 열정적으로 수용한다. 그 개구리 소리가 절대로 일정하진 않다는 걸 이번에 알아냈다.밤이 이슥하거나 말거나 지치지 않은 척, 배 고픈 줄도 모르고.. 2024. 4. 29.
새들의 불평 혹은 비난 일찍 일어났다. 늦은 줄 알고 스트레칭을 다 하고 나서 시계를 봤더니 아직 다섯 시 반쯤이었다. 좀 속은 느낌이지만 다시 눈을 감아봤자 스트레칭을 해버렸으니 잠이 올 리 없다.아침식사를 했는데도 일할 시간이 되지 않았다.뭘 좀 들여다보다가 나갈까 하고 어정대는데 새소리가 들린다. 왁자지껄, 저희들끼리 야단이 났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고, 불평 혹은 비난을 늘어놓는 것 같다. 식사 마쳤으면 나오지 않고 뭐 하고 있나? 뭘 꾸물거려? 요즘은 해가 일찍 뜨는 거 몰라? 중천이야, 중천!참 나... 일단 나가보았다.조용하다.이것들이 어디로 갔지?차근차근 준비해서 나가려고 들어왔더니 이런! 바깥은 다시 시끄럽다.얼른 준비해서 분주히 나갔다.서늘하던 공기는 겨우 열 시가 되자마자 한여름 뙤약볕처럼 뜨겁다.얼.. 2024. 4. 27.
세수하고 거울 보다가 세수를 하고 거울 들여다보다가 이 얼굴이 이제 가랑잎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직 봄이고 몸무게도 줄지 않았는데 왜 그럴까? 계절은 봄이지만 내겐 가을이 깊었거나 겨울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가랑잎인지도 모르지. 가랑잎? 그러면 이의제기 같은 것 없이 따르면 그만일 것이다. 순순히 따른다? 그건 "六十而耳順' 할 때의 그 이순(耳順)처럼 느껴지는 말이지만 나는 옛 성현처럼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애초에 그런 이순(耳順)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유감없이' '미련 없이' '홀연히' '표표히'... 뭐 그런 의미쯤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2024.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