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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리움22

지도 위에서 길을 잃어 지도를 보다가 '여기가 어디지? 내가 지금 어디를 헤매는 것일까?' 하고 당황할 때가 있다. 지리학을 공부해서 중등 사회과(지리) 교사 자격증을 받았는데도, 그러니까 지도학 강의를 몇 강좌나 이수했는데도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지도 위를 헤매게 된다. 눈을 따라 마음도 길을 잃는다. 어제저녁에는 문득 오래전에 살았던 곳이 생각났고, 거기에서 속절없이 헤어진 사람이 갔다는 곳을 지도에서 찾아보았다. 당시에는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행정구역으로는 멀지 몰라도 거리상으로는 그리 먼 곳도 아니었다. 영토가 작은 나라이니 어디인들 그리 멀다고 할 것도 없다. 그러다가 나는 지도 위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서 그때 살았던 도시도, 그 사람이 떠나간 곳도, 심지어 지금 내가 사는 곳도 찾지 못하고 허둥대고.. 2022. 9. 25.
유다의 그리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소설 《유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확신한 유다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 예수를 부추겨 예루살렘에 이르게 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그만 그 곁을 떠나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직전입니다(405~406). 이 장면을 읽으며 모처럼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리움에 대해 소홀했습니다. 나는 얼굴이 곰보인 임신한 여종이 내 앞에 가져다준 고기 접시를 개 먹이로 식탁 밑에 내려놓았다. 포도주는 식탁 위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 난 일어서서 주머니에서 우리의 돈 꾸러미를 꺼냈고 일견 거칠다 싶은 동작으로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 젊은 여인의 품에 던져 주었다. 그렇게 .. 2022. 9. 13.
몰입의 기술 2015년 1월 18일, 나는 이 신문기사 사진을 휴대전화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러니까 7년 전, 나는 아직도 무엇엔가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40년의 세월에서 그렇게 산 경험도 있고, 그 경험에 대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마음으로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에게 몰입은 마술은 아니어서 저 기사의 '몰입의 마술(魔術)'을 '몰입의 기술(技術)'로 바꾸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마술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부르는 건 주제넘은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 몰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내게도 있었고 나는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마 다시 7년이 지나가고 그때도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 2022. 3. 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할머니의 목소리 전화를 통해 듣는 할머니 목소리가 묘사되어 있는 걸 봤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늦은 밤, 그런 할머니는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이렇게 기록되는 할머니, 이렇게 소중한 목소리로 기억되는 경우는 얼마나 드문 것인지 한 자 한 자 필사를 하던 초겨울 밤이 있었습니다. 그 밤, 나는 욕심을 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이 포스팅에는 댓글란을 두지 않았습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할머니가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적마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 하는 말을 언제나 두 눈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 얼굴의 펼쳐놓은 악보에 비추어 따라 읽었을 뿐 할머니의 목소리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는.. 2021. 5. 3.
판모밀 # 퇴근을 하려는데 S가 '판모밀'을 먹어봤냐고 물었습니다. 칼국수는 아니라 해도 짜장면이나 짬뽕, 콩국수 정도에서 벗어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더니 '그럼 그렇지!' 빙그레 웃으며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판모밀이란 것의 '마니아'인 듯해서 '나는 이런 것에조차 뒤졌구나……' 싶었습니다. 우리가 근무하는 학교는 그 도시의 가장 번화한 곳 중 한 곳에 있었습니다. 판모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기도 했고, 묘한 음식을 파는 그 일식당이 학교에서 아주 가까워서 그것도 좋았습니다. # 그가 종업원에게 '호기롭게' 혹은 둘이 왔으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판모밀 2인분!" 했고 우리가 뭔가 몇 마디 나누는 사이 곧 그 판모밀이라는 '물건'이 나타났습니다. '이게 판모밀이구나!' 그건.. 2018. 4. 7.
김소연 「마음이 너무 많아서」 『현대문학』(2016.8)에서 평론 「너에게 이르는 길 : '나는 너다'의 모습들」(김종훈)을 읽다가 「마음이 너무 많아서」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눈을 내려볼게요. 마술사처럼 나도 '짠' 하고 하얀 추억들을 뿌려야겠어요. 너무 많이 우는 우리 엄마,너무 많이 미안해하는 우리 아빠,너무 많이 슬픔을 삼키는 우리 언니,너무 많이 힘들어하는 내 단짝 주희, 내가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너무 많은 마음 위에 깨끗한 눈송이들을 조금씩만 골라보았어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오래오래 곁으로 보낼게요.비가 오면 손을 뻗고요, 눈이 오면 혀를 내밀어주세요.별이며 달이며, 자세히 보면 새로운 모양일 거예요.제가 제 맘대로 디자인한 거예요.좋다, 하고 말해주세요.   "김소연, 「마음이 너무 많아서」 .. 2016. 11. 28.
창(窓) 창(窓) 자주 저 창 앞으로 갑니다. 저것도 숲이라고 한겨울에도 새들이 와서 지저귑니다. "들립니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여름엔 저 길이 보일 듯 말듯 합니다. 저 풍경은 내다볼 때마다 바뀌어 있고 밖에서 보는 모습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모습도 서로 다릅니다. 1980년대에 살던 아파트.. 2016. 2. 17.
선물 혹은 그리움 청소기를 앞세우고 돌아다니다가 발견했습니다. ― 자칫하면 지울 뻔했구나. 고것들이 와서 남겨 놓았습니다. ― 어느 녀석일까? ― 뭘 하려고 이쪽으로 갔을까? 다 그만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2015. 8. 11.
장 자끄 상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그림 『얼굴 빨개지는 아이』 김호영 옮김, 열린책들 별천지 2009 초등학교 졸업 때였습니다. 중학교에 가려면 호적초본인가 뭔가를 떼어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면사무소는 6년간 오르내린 학교 앞 도로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곳에 들어갔는데, 그걸 떼는 건 예상외로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건물 계단을 내려오며 주루룩 눈물을 흘렸고, 그러다가 자칫하면 굴러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런 아이였던 내가, 이렇게 뻔뻔해졌습니다. 웬만해선 눈도 깜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저들과 상대하고 저들을 누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런지, 겉으론 이렇게도 뻔뻔하고, 이렇게 뻔뻔한 척밖에 못하는 것인지, 아이들이나 볼 것.. 2014. 9. 24.
그렇게 더워요? 남양주시청에서 발간하는 『쾌한도시』 8월호 표지 뒷면입니다. 전철을 타고 오며 펼쳤습니다. 철썩 철썩 파도소리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빠, 엄마와 함께 쌓던 모래성, 혹시라도 파도에 쓸려 내려갈까 조심조심 토닥이며 한 단, 한 단 모래를 쌓으면 아슬아슬한 나만의 성이 맞이해 준다. 이 글과 그림을 보며 아무것도 없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나의 여름방학들을 생각했습니다. '모래성'은 무슨…… '아빠, 엄마'는 무슨…… 나는 방학만 되면, 방학숙제를 했다 하면, 커다란 수박과 넓고푸른 바다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 위의 저런 그림과 글들이 주는 막연한 '기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습니다. 내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겠지 이번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그렇게 여섯 번의 여름방학과 여.. 2013. 8. 14.
'고추잠자리'(조용필)에 대하여 무대에서 내려서면 시지몽은 더이상 대수로울 게 없다. 두 시간 후엔 그가 밖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을 일러 인생은 하나의 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지몽 뒤에 또다른 사람이 온다. …(중략)… 이렇게 수많은 세기들과 수많은 정신들을 휩쓸고 자신이 될 수 있는 혹은 자신이기도 한 사람을 흉내냄으로써, 배우는 그 다른 부조리한 인간인 나그네와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된다. 나그네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엇인가를 소모시키면서 끊임없이 움직여 나아간다. 그는 시간 속의 나그네이며, 그것도 잘해봤자 영혼들에게 추적당하면서 쫓기는 나그네인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살하기보다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렇게 썼다.* 배우는 .. 2013. 6. 7.
「The End of the World」이 그리움... '강변'은 저 남녘의 화가입니다. 그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사진을 보여줍니다. 나는 날마다 그 '강변'에 가고 있습니다. 그가 덧붙이는 음악이나 詩보다는 사진들이 아름답지만 때로는 그 사진에 어우러진 그 음악, 시가 사무쳐서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합니다. 저 사진에 붙여진 「The End of the World」는 꼭 46년 만에 듣는 노래입니다. 그간 더러 들었겠지만 '그 옛날 그는 그때 내게 왜 이 노래를 들려 주었을까?' 새삼스럽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때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한 해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고 딱 2년만 공부하면 취직할 수 있다는 친구의 종용으로 그 대학 생활을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그 2년의 시간에 이루어질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2년만 흘러간 .. 2013.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