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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리움22

조숙향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오는 소리 조숙향 하늘 사이로 구름이 흘러갑니다 구름 사이로 하늘이 흘러갑니다 하늘과 구름, 틈 사이에서 긴 여름을 견뎌낸 연보랏빛 구절초 한 송이 사뿐히 길섶으로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습니다 태풍 '볼라벤'이 물러가자마자 '덴빈'이라는 게 올라온 날 오후에 불광역 근처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비바람 때문에 스산했습니다. 차들은 바삐 돌아가고 싶어 초조해하는 것 같고, 다른 날보다 일찍 날이 저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우산이 뒤집어질 뻔했고, 어떤 여자 노인은 "아이구 추워!"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세상 일이 다 이렇습니다. 아주 더워서 가슴이 다 답답하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며칠간 태풍들이 오가고 나면, 언제였느냐는듯 당장 가을입니.. 2012. 9. 4.
내게 인디언 이름을 붙여준 그 아이 책을 참 많이 읽는 여자애였습니다. 그 학교 도서실의 책은 거의 다 읽어버리고 교장실로 나를 찾아와서 새책 좀 많이 사면 좋겠다고 한 아이입니다. 어떤 종류가 좋겠는지 물었더니 문학은 기본으로 치고 역사, 과학 같은 것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조용하고, 오랫동안 “언제까지라도 멍하니 있고 싶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블로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2007년 어느 봄날, 내게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습니다. ♬ "교장선생님 같은 분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우리 교육을 걱정하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자주 안부 전하겠다고 굳게 약속하던 선생님들도 생각나지만, 그들의 그 언약은 부질없다는 것을, 사실은 약속을 받아주던 그 순간에도.. 2012. 1. 12.
「기차는 간다」 기차는 간다 허 수 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그리운 것들만 가는 걸까? 나를 남겨 놓고 저.. 2011. 8. 11.
봄! 기적(奇跡) 봄! 기적(奇跡) ♣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재해는 갈수록 험난하고, 정치, 종교, 교육, …… 우리가 더 잘 살아가려고 하는 일들로 인한 갈등이 까칠하게 느껴져서 때로는 그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이 봄날, 그런데도 햇살은 야.. 2011. 4. 13.
金春洙 「千里香」 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 2011. 3. 6.
CLAUDIO ABBADO가 들려주는 모차르트 병석에 있으니까 별 게 다 그립습니다. 심지어 …… 심지어 …… 그 그리움이라는 걸 털어놓는 건 얼마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감상적이기도 한 일이기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고,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심지어 두 번째로 병원에 가기 전, 그러니까 지난 봄부터 추석 무렵까지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던 그 시간들, 올림픽도로 주변의 그 정경들도 다 그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사실은 얼마나 한가로웠고, 그 한가로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는지요. 그러면서 들은 음악 중의 한 가지가 CLAUDIO ABBADO의 모차르트입니다. 단호하게, 박진감 넘치게, 군대의 행렬처럼 나아가다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바뀌어 가고, 그래서 가령 고등학교 입학식이나 대학생 입학 축하 파티를 하며 이 음반을.. 2010. 11. 10.
문정희 「겨울 사랑」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 사보(社報)에서 읽었습니다. 병원 뒤편 한강 그 하늘 위로 다시 이 해의 눈이 내릴 때 나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벗어나는 그곳에서 3박4일을 지내며 평생을 아이들처럼 깊이 없이 살아온 자신을 그 풍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눈송이들이 이번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건물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듭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담배까지 피우며 걸어다닙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들은 무성영화 같습니다. 풍경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로.. 2010. 2. 8.
실존 Ⅱ ●●병원 ○○○실 출입구 맞은편 벽 아래 초라하고 삭막한 표정의 벤치에 앉아 이 삶을 가슴아파해준 사람이 그리운 밤. 2009. 12. 25. 늦은밤에. 2009. 12. 26.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Ⅳ - 만남, 그리움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부분입니다. 질베르트의 출현과 산사꽃 …(전략)… 생울타리 틈으로 정원 안의 오솔길이 하나 보였는데 그 길가에 피어난 재스민, 팬지, 마편초 사이로 꽃무들이 열어 보이고 있는 신선한 주머니는 옛 코르도바산 가죽으로 지은 향긋하고 빛바랜 장밋빛인데, 한편 자갈 위에는 초록색의 물 호스가 풀어져서 길게 뻗어 있고 그 뚫어진 구멍들에서 꽃잎들 머리 위에 다채로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나와 프리즘 같은 수직의 부채를 만들어 세우며 꽃향기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어떤 환영이 나타나서 단지 우리의 시선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지각을 요구하고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손아귀에 넣어버렸.. 2009. 12. 23.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1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에 두고 온 아이들입니다. 지금 이곳 아이들도 충분히 아름답고 중요하고 정겹고 자랑스럽지만, 그 아이들도 늘 그립습니다. 그 아이들은 이제 나를 다 잊어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정지된 순간을 보고 앉아 있는 것은 무료하지 않고 오랫동안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게 합니다. 이 '작품'은 그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여 사랑했던, 지금은 늘 그리운 서영애 선생님께서 2006년에 보여준 것입니다. 지난날들은 왜 모두 그리운 것입니까? 2007.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