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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이야기

김소연「마음이 너무 많아서」

by 답설재 2016. 11. 28.

 

 

 

 

 

『현대문학』(2016.8)에서 평론 「너에게 이르는 길 : '나는 너다'의 모습들」(김종훈)을 읽다가 「마음이 너무 많아서」라는 시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눈을 내려볼게요. 마술사처럼 나도 '짠' 하고

 

하얀 추억들을 뿌려야겠어요.

 

너무 많이 우는 우리 엄마,

너무 많이 미안해하는 우리 아빠,

너무 많이 슬픔을 삼키는 우리 언니,

너무 많이 힘들어하는 내 단짝 주희,

 

내가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너무 많은 마음 위에

깨끗한 눈송이들을 조금씩만 골라보았어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오래오래 곁으로 보낼게요.

비가 오면 손을 뻗고요, 눈이 오면 혀를 내밀어주세요.

별이며 달이며, 자세히 보면 새로운 모양일 거예요.

제가 제 맘대로 디자인한 거예요.

좋다, 하고 말해주세요.

 

 

"김소연, 「마음이 너무 많아서」 부분(『엄마. 나야.』, 난다, 2016)"

 

그렇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부분"?

그게 참 아쉬웠는데, 인터넷에는 다 나와 있었습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경우 어디서 그 원문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짠' 하고>를 <짠 하고>로 해놓고 있었습니다. 옮긴 분이 따옴표를 놓쳤을 것입니다.

저 평론에서 인용하지 않은 다른 부분은 바르게 옮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원본을 보면 꼭 대조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뺄셈만 배워요. 뺄셈은 아주 가볍죠.

 

고통을 빼고 두려움을 빼고 안타까움을 빼면

내게는 추억들만 남아요.

 

나는 매일매일

마술사처럼 짠하고 추억을 꺼내 보여요.

그럴 때마다 저 지상에선 비가 내려요.

내가 누렸던 기쁨만큼 빗방울이 떨어지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만큼 우산이 펼쳐져요.

 

저는 지금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가장 높은 곳에서요.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꼬마들이

무당벌레처럼 보이는 아침.

건널목에는 녹색어머니들이 깃발을 들고 서 있지만

아주 작은 풀잎처럼 보여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언니가 준 용돈을 꼭 쥐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언니가 과자를 사올 시간인걸요.

언니가 사다주는 과자를 와작와작 먹는답니다.

먹는 소리를 들었는지, 언니가 잠시 하늘을 보네요.

 

가족이 그리울 때에만 잠깐 신발을 신어봐요.

정표를 나눠 가진 듯이 한 짝은 우리 집에 있어서

한 발은 여기, 한 발은 거기, 껑충 뛰어갈 수 있어서요

따뜻한 내 방 전기장판에 대자로 누워볼 수 있어서요.

 

태어날 때에 갖고 태어난 내 모든 행운들을

집안 곳곳에 숨겨놓고 돌아오곤 한답니다.

이곳은 행운이 필요 없는 곳이라서요.

내 몫의 행운들을 우리집에 두고 오면

잘 빼고 잘 챙겨둔 추억들이 곱셈을 한 듯이 많아져요.

 

내가 얼마나 친구가 많았는지 걔네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내가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얼마나 많이 웃게 했는지

열입곱, 열여섯, 열다섯, 열넷, 열셋 …… 그렇게 자꾸

한 해 한 해 조금씩 자라나던 내 모습들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러면 더 잘 알게 돼요.

그러면 더 잘 보이기 시작해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에서부터

학교 다녀왔습니다, 까지의 하루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어 더 잘 보여요.

 

엄마, 크리스마스에 내가 같이 놀아줘서 좋았죠? 아빠, 내가 만든 어설픈 생일 케이크, 기뻤죠? 언니, 내가 들려준 우스개들, 언니한텐 좀 싱거웠겠지만 그래도 즐거웠지?

엄마, 나도 참 좋아요. 내가 엄마의 보물 2호라서.

아빠, 나도 참 기뻐요. 아빠가 더 좋은 아빠가 되시려고 항상 애써주셔서요.

언니는 알 거야, 언니가 준 용돈들을 두 배 세 배로 갚고 싶었던 내 마음.

 

저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여전히 편식을 하고 여전히 수다를 떨면서요.

여전한 것들에게 여전히 인사를 건네면서요.

조금씩 키도 더 크는 것만 같고

조금씩 얼굴도 더 예뻐지는 것만 같고요.

 

제가 누렸던 행운들과 축복들을

하루에 하나씩 다디단 것들을 사탕을 고르듯 골라

볼에 머금어요. 조금씩 녹여 먹어요.

 

이곳에서 나는 날씨를 디자인하는 일을 맡았어요.

아직 서툴지만 구름의 무늬와 바람의 강약을 디자인해요.

날마다 햇살의 두께를 결정하고 날마다 어둠의 농도를 궁리해요.

 

정확해야 해서 수학을 잘해야 하고요.

통솔력도, 의사소통 능력도, 그림 실력도 있어야 해서

언제나처럼, 운 좋게도 내가 맡게 되었어요.

저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보이시죠 다들.

오늘의 스페셜 날씨입니다.

 

오늘은 눈을 내려볼게요. 마술사처럼 나도 '짠' 하고

하얀 추억들을 뿌려야겠어요.

 

너무 많이 우는 우리 엄마,

너무 많이 미안해하는 우리 아빠,

너무 많이 슬픔을 삼키는 우리 언니,

너무 많이 힘들어하는 내 단짝 주희,

 

내가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너무 많은 마음 위에

깨끗한 눈송이들을 조금씩만 골라보았어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천천히 오래오래 곁으로 보낼게요.

비가 오면 손을 뻗고요, 눈이 오면 혀를 내밀어주세요.

별이며 달이며, 자세히 보면 새로운 모양일 거예요.

제가 제 맘대로 디자인한 거예요.

좋다, 하고 말해주세요.

 

- 그리운 목소리로 혜선이가 말하고,

시인 김소연이 받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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