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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기성 「살인자의 시집」

by 답설재 2017. 2. 16.

살인자의 시집

 

 

이기성

 

 

안녕 프랑수아, 당신이 보냈다는 시집을 기다렸어요. 오늘도 시는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사이에 나는 이사를 했고, 킁킁거리는 이웃들은 나의 우편함에 관심이 많아요. 프랑수아, 당신은 먼 나라의 시인이고, 나는 당신의 말을 몰라요. 그래도 당신의 시가 내게 도착했다면 나는 기뻤을 거예요. 모르는 나라의 말로 쓴 시가 나를 기쁘게 하다니, 놀랄 것도 같았어요. 프랑수아, 당신의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의 혀에서 솟아난 말은 어디로 흘러갔을까요? 당신의 시가 밤하늘에서 한 글자씩 흩어져 내리는 꿈을 꾸어요. 하얀 말들이 창문에 쌓이고, 그것은 눈이 내리는 풍경보다 아름다울 것 같아요. 프랑수아, 나는 아침에도 기다리고 밤에도 기다렸어요. 어쩌면 당신의 시에서는 살인자가 눈 속에 피 묻은 칼을 숨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어느 저녁 나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다가 번뜩이는 칼날에 찔릴 거예요. 밤하늘을 깨문 백치처럼 웃음이 터지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집 속에서 새하얗게 쏟아지는 나의 비명은 당신의 것이에요. 안녕, 나의 살인자, 먼 나라의 모르는 시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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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  1966년 서울 출생. 1998년 『문학과사회』 등단.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현대문학상> 수상.

 

 

 

 

 

 

그처럼 목마르게 기다린다니……. 나는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있나? 나는 지금 뭘 기다리고 있나?

시집(詩集) 같은 건 말고,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대입해 봤습니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한가, 그것만 다르겠지요.

시인은 그게 이루어지면, 그 시의 말들이 창문에 쌓이면 눈이 내리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합니다. 간절하다면, 그리고 그걸 시로 쓸 수 있다면, 아름답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간절한! 차라리 "살인자의 칼"처럼 날카롭고 무서운 것!

 

 

 

『현대문학』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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