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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슬픔19

"좋은 아침" 아파트 앞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 아침에 나는 직장에 다닐 때의 아침을 생각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아침. 어제와 같으면 내겐 좋은 아침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서 어제와 같을 리 없지만 그렇게 창문을 내다보는 아침에 나는 일쑤 어제 아침과 같은 아침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좋은 아침이라는 단순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좋은 아침'이던 그 아침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게 아쉽다. 막막하다. 2023. 3. 29.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 이재영 옮김, 창비 2011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픽 카운티로 도보여행을 떠났다.(10) 이렇게 시작된다. 파괴와 고통, 희생 같은 것들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슬픔으로 바라본 기록이다.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죽어갔고 폐허, 파괴의 흔적만 남아 있다. 보이는 것마다 공포와 공허, 덧없음, 우울을 보여준다. 슬픔은 끝이 없다. '토성의 고리'? 우리 모두는 우리의 유래와 희망이 미리 그려놓은 똑같은 길을 따라 차례차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우연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할수록 나는 점점 더 자주 나를 엄.. 2022. 3. 25.
여기 이 세상에 눈 내리는 날 점심때쯤 눈이 내렸다. 하늘이 부옇긴 해도 구름 사이로 자주 햇빛이 비쳐 내려서 곧 그치겠지 했는데 두어 시간은 내렸고 쌓이진 않고 곧 사라졌다. 바람이 불면 눈송이들이 스스로 갈 길을 찾아가겠다는 듯 제각각 흩날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난분분 난분분'이란 말이 떠올랐지만 그건 '흩날려 어지럽다'(亂粉粉)는 뜻이어서 눈송이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이 떠돌아다니는 듯한 그 모습을 '난분분'이라고 하는 건 마땅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 또 눈이 내리는구나 했고, 나는 나의 세상과 함께 점점 축소되고 있고 그렇지 않던 힘이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그걸 입밖에 내어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서글픈 일이 아닌가. 2022. 2. 21.
"사람의 일생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사람의 일생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종호, 「산등성이의 남향 참호」 『현대문학』 연재 《회상기回想記-나의 1950년》 제10회(2015년 10월호, 206쪽). "한국 인구에 다섯을 기여한 뒤 심장마비로 4·19 나던 해 쉰이 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뜬 작은이모의 전성시대"를 이야기하며. 나의 어머니도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은 죽어서도 흔들렸다. 나도 따라 흔들렸다. 2022. 2. 20.
『상실 수업』⑵ 편지쓰기(발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김소향 옮김, 인빅투스, 2014 때로는 과거를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들어 그것을 정화하려고 한다. 우리의 실수가 밖으로 퍼져나가기를 원치 않으며 특히 누군가를 잃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작업을 거치다 보면 그 사람의 전부 그리고 장단점, 밝고 어두운 면 모두 포함한 그대로의 모습을 애도할 기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150) 슬픔은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통과 슬픔은 오직 표현할 때만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사랑한 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실천하기 편하며, 단어를 밖으로 꺼내어 언제든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의사소통을 상실해버린 고인이 된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써야 하며 심지어 왜 편지를 써야 하는가? 기억나는 만큼 멀리 과거.. 2022. 2. 10.
장옥관 「질문들」 질문들 장옥관 당신 없는 나날이 수국의 적설로 쌓이고 앵두가 매달렸다 지고 지고 가죽나무 새순이 뜯겨진 자리가 꾸덕꾸덕 굳어갑니다 있다가 없어진 자리 어떤 질문을 얹어놓을까요 그 탐스런 모란꽃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온다던 사람 온 적 없다는 걸 당신의 의자에 앉아 오지 않는 오후를 하염없이 반드시 오지 않아야 한다는 무논에 저절로 일다가 주저앉는 어린 벼 포기 건드리고 가는 저 속삭임. ................................................................................. 장옥관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황금 연못』『바퀴소리를 듣는다』『하늘 우물』『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 2021. 3. 15.
문서 더미 지금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때, 아니 오랫동안 문서 더미에 둘러싸여 지내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게 지내는 사람을 부러워하긴 합니다.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를 읽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읽은 데를 또 읽고 또 읽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그런데도 짜증이 나거나 하지 않고 새로 읽을 때마다 뭘 좀 더 파악하게 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1장에서 다음 부분을 보고 여기에 옮겨두고 싶었습니다. 나는 저녁 무렵에 재닌의 사무실에서 플로베르의 세계관에 대해 그녀와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거기엔 강의를 위한 메모와 편지, 온갖 종류의 문서들이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종이의 홍수에 파묻힌 기.. 2020. 10. 20.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은 후에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이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읽는데(73 L5) 돌연 내 또래의 어느 가수가 떠올랐다. "주제넘다"고 할지 모른다.("너는 뭐 외롭지 않은 인간인 줄 아니?") 그는 TV에 출연해 이야기하는 내내 외롭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외로움' '슬픔'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인터넷에서도 살펴보았다. 거의 방송에서 본 내용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의 생활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시절, 그는 애절한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기타만 가지고 누군가가 제공해 준 조그마한 공간에서 지낸다. 자유로운.. 2019. 6. 15.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꺠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 2019. 3. 6.
「작은 배」 작은 배 김 상 미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라고 노래하던 가수가,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라고 노래하던 가수가, 어젯밤 아주 멀리 떠나버렸네. 혼자 남아 울고 있는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만 남기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렸네. 이 시대의 애끓는 한숨 소리처럼 깊디깊은 여름밤, 홀연히 춤추는 먼지, 허무의 장엄 속으로 떠나버렸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매혹의 뮤지션이 되어 곧 그리운 멜로디로 환생할 작별의 오선지 속으로, 캄캄한 밤이 내뿜는 혼, 미지의 쓰라린 감미甘味 속으로 떠나버렸네.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 한밤중에도 혼자 깨어 있을, 더없이 애틋하고 애잔한 제비꽃,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만 남기고……. 작은 배. 아주 작은 배. 울고 있.. 2017. 10. 28.
이장욱 「원숭이의 시」 원숭이의 시 이장욱 당신이 혼자 동물원을 거니는 오후라고 하자. 내가 원숭이였다고 하자. 나는 꽥꽥거리며 먹이를 요구했다. 길고 털이 많은 팔을 철창 밖으로 내밀었다. 원숭이의 팔이란 그런 것 철창 안과 철창 밖을 구분하는 것 한쪽에 속해 있다가 저 바깥을 향해 집요하게 나아가는 것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 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동물원의 자정이 온다는 것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나는 거대한 원숭이가 되어갔다. 무한한 어둠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꽥꽥거리며 외로운 허공을 날아다녔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것 그것보다 격렬한 것 당신의 .. 2017. 8. 31.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백 가지 슬픔의 문〉 《백 가지 슬픔의 문》 The Gate of the Hundred Sorrows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이종인 옮김, 『현대문학』 2017년 3월호 114~123 풍칭은 왜 그 집을 "백 가지 슬픔의 문"이라고 불렀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그는 내가 아는 한 발음하기 어려운 괴상한 이름을 사용하는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대부분의 이름들은 화려했다. 이것은 캘커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화려한 이름들을 직접 확인하곤 했다.1 아편 파이프를 석 대 피우고 나면 베개의 용들이 서로 움직이면서 싸우기 시작한다. 나는 수많은 밤 동안에 그 싸움을 구경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연기 양을 조정했고, 이제 열두 대를 피워야 용들이 움직인다. 게다가 이 파이프.. 2017.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