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은 후에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이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읽는데(73 L5) 돌연 내 또래의 어느 가수가 떠올랐다. "주제넘다"고 할지 모른다.("너는 뭐 외롭지 않은 인간인 줄 아니?") 그는 TV에 출연해 이야기하는 내내 외롭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외로움' '슬픔'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인터넷에서도 살펴보았다. 거의 방송에서 본 내용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의 생활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시절, 그는 애절한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기타만 가지고 누군가가 제공해 준 조그마한 공간에서 지낸다.
자유로운 성격인데 비해 모든 것에 대해 공유하기를 바랐던 아내, 그는 담담하게 이혼을 이야기했고 어렸을 적에 월북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와 누나 얘기도 했다.
동생과 함께 외가에서 지냈는데 그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 혼자 남은 그는 가수가 되었고, 자신이 그 가수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정작 만나게 되자 "나는 엄마가 아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만나 줄 수는 있다"고 하더라는 사연도 회상했다. 다 오래전 일들이었다.
그의 그 '슬픔'과 '외로움'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다른 부분을 읽을 때 또 생각났다.(153)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중단편소설집 《녹턴》에 대해 쓴 〈음악 서술자 시점〉이라는 글이었으므로 여기에 이 연상(聯想)을 적게 된 것은 신형철 작가에게도 가수에게도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떠올라서 적어 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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