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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당신이 옳다》

by 답설재 2019. 6. 9.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

해냄 2018

 

 

 

 

 

 

 

 

1

 

상처는 속마음에 꽁꽁 숨겨져 있다. 드러내면 더 불리해지고 더 수치스런 일이 생길 것이라는 피해 경험 때문이다. (…) 억누르려고 해도 두더지처럼 튀어 오르거나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고통도 많다. 그런 경우는 상처를 꺼내고 해결해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150~151)

 

감정을 드러내는 걸 유치하다고 여기고 이성으로써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그건 버려야 할 믿음이다. 그걸 도와주는 방법이 '공감'이다.

'공감'의 방법은 "당신이 옳다"는 관점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든 감정은 옳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런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218~219)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으니 그녀의 파괴적 행동과 판단도 옳은가.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늘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까지 옳은 건 아니다. 별개다.(167)

 

 

2

 

사례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다. 모두 감정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거의 유사한 사례들이고 읽고 나면 필자의 처방이 옳다는 걸 알게 되고 그 답이 쉬운 것 같은데도 '이런 경우 필자는 어떤 처방을 할까?' 매번 궁금했고 나의 예상은 거의 빗나갔다. 필자의 '적정심리학'을 모른 채여서 그럴 것이다.

 

'상처'라는 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관계 끊어버리기'도 있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적인 사람도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공감자가 아니라 혹독한 감정 노동으로 웃으며 스러지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지만 나만 잘한다고 되지 않는다. 상대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다. 그것까지 내가 짊어질 이유는 없다.(170~171)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기쁨과 즐거움이거나 배움과 성숙, 성찰의 기회일 때다. 그것이 관계의 본질이다. (…) 끊어야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관계들이 의외로 많다. 관계를 끊으면 그때서야 상대방도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계기를 만들지 못해서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되어도 그건 그의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203~204)

 

이것은 충격이었다.

 

 

3

 

전문가란 이런 경지여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적정심리학'이 개별적인 것(혹은 용어)이라면 전문가들은 각각 개별적인 전문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는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환자 아닌 사람의 내면을 만나면서 사람에 대한 혼란스러웠던 시간들이 안개 걷히듯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22)면서 약물에 의존하는 정신과 의사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면 필자 같은 '진짜 전문가'를 찾고 싶을 건 당연하다. 그렇지 못한 의사들은 아직 덜 배우고 덜 연마한, 아직 덜 전문가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9년 5월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환대의 서사'를 연재한 평론가 왕은철은, 환대를 논하며 타자의 얼굴이 갖는 윤리적 함의를 강조한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를 거의 매번 인용해왔다.

 

타자의 얼굴이 호소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면 환대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을 두고 누군가는 환대하고 누군가는 환대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의 얼굴과 눈에서 슬픔과 눈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타자로서의 장애인」

(『현대문학』 2019년 5월호 267~283)에서의 인용.

 

 

'공감'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마다 레비나스의 그 '환대'의 의미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이는 데는 배경이 되는 경험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