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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에릭 뷔야르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 La guerre des pauvres》

by 답설재 2019. 4. 10.

 

 

  에릭 뷔야르 Eric Vuillard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 La guerre des pauvres》

『현대문학』 (2019. 4.)

 

 

 

월간 『현대문학』에는 62회째 프랑스 문학이 소개되고 있다(이재룡 「소설, 때때로 맑음」).

그 중에는 번역본이 나온 것도 있고, 최근에 발간되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도 있다.

2019년 4월호에는 올해 나온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전쟁La guerre des pauvres』이 소개되었다. 다음 1은 그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1

 

그의 아버지는 교수형을 당했다. 모래 자루처럼 허공 속으로 툭, 떨어졌다. 사신은 밤에 어깨에 지고 옮겨야만 했고 입속이 흙으로 가득 찬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떡갈나무, 초원, 강, 강둑의 나물, 척박한 땅, 교회, 사방 천지에서 불이 났다. 그는 열한 살이었다.(原文)

 

1500년 독일.

열한 살의 꼬마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이다. 아이는 아버지의 시체, 특히 그가 미처 말하지 못했던 단어들이 매달려 있는 듯한 커다란 혀를 기억한다.

 

어린 토마스는 열다섯 살 때부터 동료를 모아 로마교황청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들판에 함께 누워 "하늘나라가 땅에도 임하길" 기도했다. 그리고 25년 후인 1525년 5월 27일, 그 역시 사형을 당하고 몸은 네 조각으로 잘려 버려졌다.

 

그보다 50년 전, 마인츠에서 뜨거운 반죽이 흐르더니 유럽 전역에 흘러 퍼졌다. 마을의 계곡 사이로, 사람들의 이름 속으로, 하수구 구멍 안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구절양장 퍼졌다. 글자 하나하나, 사유의 부스러기, 구두점 하나까지 작은 쇳조각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쇳조각을 나무 상자에 나눠 넣었고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쇳조각 하나씩을 골라 단어를 만들고 행을 이루고 한 페이지를 만들어냈다. 거기에 잉크를 묻히고 엄청난 힘으로 천천히 종이 위에 단어를 짓눌렀다. 열 번 스무 번 되풀이한 후 종이를 네 쪽, 여덟 쪽, 열여섯 쪽으로 접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순서대로 쌓아 풀로 붙이고 실로 꿰맨 후 가죽으로 겉을 감쌌다. 그것이 한 권의 책이 되었는데, 바로 성경이었다. 수도승 하나가 필사본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3년 동안 그들은 180권을 만들었다.(原文)

 

어린 토마스 뮌처는 성경을 읽으며 "회한과 사랑"에 숨이 막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라고 작가는 상상한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 수학한 후 여기저기에서 "새파란 나이의 신부"로 일하다가 마침내 1520년 즈비카우의 설교 신부로 부임하게 된다. 거기에서 급진개혁 성향의 신부, 특히 슈트로흐와 논쟁하여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이 굳어지면서 "거지들의 신이었다가 두 명의 도둑 사이에 끼어 죽은 신이 과연 이토록 화려한 성전을 필요로 할 것인가, 가끔 불편하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신이 묘하게도 끊임없이 부자들 곁에, 부자들과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의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을 전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을 전하던 뮌처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지비카우에서 추방되어 보헤미아 지방을 떠돌게 되었다.

 

2백여 년 전, 영국.

"존 위클리프는 인간과 신 사이에 직접적 통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 첫 번째 생각에서 논리의 흐름을 따라 인간 하나하나가 성서 덕분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정할 수 있다는 데로 이어진다. (……) 당연히 로마는 존 위클리프를 심판했고 그는 심오하고 진지한 설교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40년도 더 지난 후 콘스탄츠 공의회의 심판에 따라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다시 파헤쳐 뼈를 불살랐다." 위클리프의 생각은 존 발이라는 순박한 농투성이에게 작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혹시 노예와 주인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성경 어느 구석엔가 그 근거가 있지 않을까. (……) 농민 반란은 켄트 지방을 넘어 런던까지 번져갔고 왕의 진압군 로버트 크눌스는 두 달에 걸쳐 농민 수만 명을 처형했다. "인두세 철폐는 완전히 물 건너갔고 농노제가 폐지되기까지 2백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영국에서 존 위클리프의 심장이 박동을 멈춘 직후에 얀 후스라는 사람이 그 뒤를 이어받아 위클리프의 저서를 체코어로 번역했다. 프라하의 베들레헴성당에서 얀 후스는 회개란 면죄부를 사들이는 돈, 십자군의 폭력, 귀족의 권력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오로지 사랑, 기도, 심지어 예수의 적까지 포함해서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교했다. 돈, 폭력, 귀족이란 단어가 여기에서도 언급되었다. 얀 후스에 동조한 프라하 시민들이 봉기하여 시내에 불을 질렀다. 폭도들은 추방되고 대학생들의 목이 도끼로 잘렸다. (……) 콘스탄츠로 호출된 그는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원문)

 

"프라하게 도착하자마자 토마스 뮌처는 '프라하 선언'을 발표했다. 독일어로 쓴 그의 선언서는 체코어로 번역되었다. 뮌처는 신학자들의 토론을 인정하지 않았고 난해한 교리를 혐오했다. 그는 여론에 호소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함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이다. 가장 심오한 명제일수록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만 한다. 그의 표현 방식은 두서없고 충동적이며 그는 욕망의 뜨거운 길을 따라갔다. 토마스 뮌처, 그가 가진 욕망은 추기경이 되고 말겠다거나 당신도 토마스 뮌처가 되고 싶다는 것과는 달랐다. 그는 무서운 것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그는 분노에 빠져 있었다. (……) 뮌처는 후스와 달리 허기와 갈증에 시달렸다. 그 무엇도 그의 배를 불리고 목을 축일 수 없었다. 그는 늙은 뼈, 나뭇가지, 돌, 진흙, 우유, 피, 불까지도 삼켜버릴 것이다."

 

작가는 이 참혹한 민중 봉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젊음은 끝이 없고 평등의 비결은 불멸이며 고독은 황홀하다. 순교는 압제자들에게는 올가미가 되고 오로지 승리만을 염원할 것이다. 나는 그 승리를 이야기할 것이다."

 

 

2

 

* '정의' '정의로움' 같은 것들의 가치가 가진 자의 것이 되면 더없이 큰 폭발력을 보이게 된다.

* 그러므로 이러나저러나 누가 정의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3

 

이 책은 2019년 1월에 발표되었단다.*

번역본이 나오면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와 나란히 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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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룡「소설, 때때로 맑음 제62회 '동심이 깨지는 나날들'」(『현대문학』2019년 4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