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찰스 부코스키(소설)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by 답설재 2019. 3. 25.

찰스 부코스키 Henry Charles Bukowski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2016

 

 

 

 

 

 

 

 

1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1998)를 보고 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우체국』(1971), 『팩토텀』(1975), 『여자들』(1978) 같은 건 없고 『호밀빵 햄 샌드위치』(1982)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지' 하고 빌렸고, 단숨에 읽었다.

 

 

2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며 어디에서도 위안을 찾을 길 없는 소년 헨리 치나스키의 이야기다. 유년의 희망과 기대, 고통과 좌절, 아픔의 순간들, 더러 아름답고 익살스럽고 순박했던 순간들…… 따지고 보면 웬만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있고 가슴 아프다.

 

「바지 벗어.」

아버지가 면도날 혁지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오른쪽 다리는 아직도 아팠다. 그전에 혁지로 여러 번 맞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 무심한 온 세계가 저기 바깥에 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백만의 사람들, 개와 고양이, 땅다람쥐, 건물, 거리가 저기 바깥에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와 면도날 혁지, 욕실과 나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혁지를 면도날을 가는 데 썼고, 나는 아침마다 아버지가 거울 앞에 서서 얼굴에 흰 거품을 바르고 면도하는 모습을 증오했다. 그때 혁지가 처음으로 나를 내려쳤다. 혁지 소리는 단조롭고 컸으며 그 소리가 고통만큼이나 나빴다. 혁지가 다시 내려왔다. 아버지는 혁지를 내두르는 기계 같았다. 무덤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혁지는 또 내려왔고 나는 생각했다. 이게 분명 마지막일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시 내려왔다. 나는 아버지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존재였고, 나는 그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울 수도 없었다. 너무 아프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울 수도 없었다. 혁지가 또 한 번 내려왔다. 그때 아버지가 멈췄다. 나는 서서 기다렸다. 아버지가 혁지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94)

 

이게 소년 헨리 치나스키와 그의 아버지다.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연약한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좌절과 애정 결핍, 따돌림과 외로움, 우울함은 결코 낫지 않는 그의 피부병처럼 줄기차게 그를 괴롭힌다.

그런 세상에 절망하고 반항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장한다.

 

 

3

 

아버지는 다시 나를 때렸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 눈은 이상하게도 말랐다. 나는 아버지를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죽일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년만 있으면 때려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죽이고 싶었다. 아버지는 별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데려온 아이일 것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나를 때렸다. 아픔은 그대로였지만, 공포는 사라졌다. 혁지가 다시 내려왔다. 욕실은 더는 흐리게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안에서 달라진 점을 감지했는지 더 세게, 몇 번이고 내려쳤지만 그가 나를 더 때릴수록, 나는 덜 느끼게 되었다. 무력한 쪽은 아버지가 된 듯했다. 뭔가 일어났다. 뭔가 바뀌었다. 아버지는 헉헉대며 멈추었고, 혁지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돌아섰다.

「어이!」 나는 불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두 대만 더 때려봐요. 그래서 당신 기분이 더 좋아지면.」(170)

 

성장이란 이런 것이다. '턱 아래와 목둘레에 몇 겹으로 늘어진 살'을 가진 아버지는 아들의 성장이 장차 훌륭한 학력이나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부와 권력으로 이어지든 아니든, 그 성장을 막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그런 가치들은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든 참 같지 않은, 허접한 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가치이고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일까?

 

 

4

 

선생님은 책상 사이로 걸어와 내 건너편 책상 위에 앉았다. 실크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예뻤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미소 짓더니 손을 내밀어 내 손목을 만졌다.

「부모님이 네게 별로 사랑을 주시지 않는구나. 그렇지?」

「그딴 거 필요 없어요.」 나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헨리, 사람은 모두 사랑이 필요하단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딱한 애구나.」

선생님은 일어서서 내 책상으로 오더니 두 손으로 천천히 내 머리를 잡았다. 선생님은 몸을 굽혀 내 머리를 자기 가슴에 댔다. 나는 두 팔로 선생님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헨리, 모두와 싸우는 짓은 그만두렴! 우리는 너를 돕고 싶단다.」

나는 웨스트팔 선생님의 다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좋아요, 섹스해요!」

웨스트팔 선생님은 나를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뭐라고 말했니?

「〈섹스해요〉라고 했어요!」(72)

 

더없이 저속하고 야비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고급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난처할 수밖에 없을 장면이 잇달아 나온다. 작가는 다만 세상의 일들을 거의 그대로 나타내고 싶어 한 것 같았다.

소년이 마침내 그럴듯한 인물이 되었다거나 멋진 직장에 들어가 설욕을 했다거나 하지 않고 해병이 된 친구가 진주만 습격으로 급히 귀대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럴 것이다. 그게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헨리 치나스키의 그 후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겠다.

 

 

5

 

작가 찰스 부코스키는 1920년 독일에서 태어나서 어릴 적에 미국으로 건너가 LA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오랫동안 창고와 공장 노동자로 전전했고 우연히 우체국에 취직해 12년간 일했다. 잦은 결근과 지각으로 해고 직전에 평생 글을 쓰면 매달 1백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은 직장에서의 경험을 쓴 『우체국』(1971), 글쓰기를 포기하고 잡역부로 일하던 청년기의 이야기를 쓴 『팩토텀』(1975), 50대의 일상을 담은 『여자들』(1978), 유년기의 이야기를 쓴 『호밀빵 햄 샌드위치』(1982)로 이어졌다. 주인공 이름도 매번 '헨리 치나스키'.

 

 

6

 

작가가 되려는 꿈을 나타낸 '아름다운 거짓말'에 대한 에피소드.

프레타그 부인(영어 선생님)이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방문 연설을 견학하고 글을 써오라는 숙제를 낸다. 아버지의 승낙을 받지 못한 헨리 치나스키는 그 현장에 가지 못하고 거짓으로 글을 써냈는데, 이 글이 "매우 독창적인 글"로 뽑혀서 반 전체에게 소개된다.

 

「이 멋진 글과 함께,」 프레타그 선생님이 말했다. 「여기서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아이들은 일어나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헨리는, 잠깐.」 프레타그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프레타그 선생님은 거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선생님이 물었다. 「헨리, 너 거기 갔었니?」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대답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아무 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뇨, 가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게 한결 더 놀라운 것이구나.」

「네, 선생님…….」

「가도 된단다, 헨리.」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그게 바로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보였다. 내게는 삶이 더 쉬워지겠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안과 걔 친구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다.(114~115)

 

찰스 부코스키는 소설 『술고래』(1987), 『할리우드』(1989), 『펄프』(1994) 등 60여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내고 1994년 3월, 백혈병으로 죽었단다.

 

 

 

 

책 날개의 프로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