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분류 전체보기2805

이서수(중편소설) 《몸과 우리들》 이서수 《몸과 우리들》 현대문학 2023년 3월호 ※ 일부 발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상태로 당신과 자는 기분. 잠시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 기관들 가운데 제가 이름 붙인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채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멋대로 이름 짓기 놀이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저의 입술은 캐러멜입니다. 제 가슴은 솜사탕입니다. 저의 질은 와플입니다. 어떻습니까. 디저트로 이름 붙인 신체 기관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상당히 퇴행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먹다니요. 신체 기관은 먹고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다시 이름을 붙여봅시다. 저의 입술은 지평.. 2023. 3. 21.
집에 대한 최욱(건축전문가)의 생각 1. 우리는 바다다. 바다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몸속의 농도도 바다와 비율이 같다.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 눈높이가 바다의 높이다. 앉으면 내려오고 서면 바다는 올라온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찍은 바다 영상을 보면(특히 영화 「부초」의 도입부) 무릎 높이에서 바다가 걸린다. 촬영기사가 엎드려서 찍었기 때문이다. 어떤 바다의 풍경을 가진 창을 원하는가? 창이 높으면 상대적으로 바다가 작게 보여 하늘이 보이는 창이 된다. 창은 바다의 높이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비례 상자이다. 로스코 그림의 틀과 같다. 2. 인간은 햇볕에 반응하는 해바라기다. 동해 바다가 서해와 남해 바다와 다른 점은? 낮에 바다를 보면 남쪽 바다는 햇볕 때문에 반짝이는 빛인 반면 동해 바다는 빛을 반사하는 색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2023. 3. 20.
소설 《어머니의 연인》에 등장한 음악들 「모차르트 교향곡 G단조」(7) 「돈 조반니」(8) 「천지창조」(8) 죄르지 리게티 (8) 콘라트 베크 (8) 브루노 발터 (9) 오토 클렘퍼러 (9) 브람스 (10) 베토벤 (10) 브루크너 (10) 리하르트 바그너 (10)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0) 제수알도 (11) 드뷔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2)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13) 「라 토스카」(15) 카루소 「여자의 마음」(23)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칸타타」(24) 벨러 버르토크 「조곡 4번」(29)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피콜로와 현을 위한 협주곡」(29) (지방 작곡가) 「프랑수아 리샤르의 그대 앞에 흐르는 시내 주제에 의한 다섯 개 변주곡」(29) 크레네크 (37) 부조니 (37) 스트라빈스키 「제2조곡」(37) 「랩소디 인 블루」(.. 2023. 3. 19.
리베카 솔닛(에세이)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김현우 옮김, 반비 2022(2016) 부모가 알츠하이머 혹은 치매에 걸렸을 때 함께, 그러니까 24시간 함께 생활해보지 않았으면 그 질환 혹은 환자에 대해, 환자와 함께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주제넘다. 이건 확실하다. 나는 그렇게 주장한다. 또 그 환자를 마음 깊이 사랑했다는 건 입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고 단정한다. 이 책은 그런 어머니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평생 딸을 못마땅해하고, 시기하고, 불평했다. 리베카는 그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죽은 후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2023. 3. 18.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그렇게 묻는 건 사치겠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 와서 아직도 나는 이러고 있네? 2023. 3. 17.
로런스 블록 엮음(단편소설)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엮음 《빛 혹은 그림자》(단편소설집) 이진 옮김, 문학동네 2017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 중 딱 한 편만 지루했다.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가 소개된 글을 읽었다.(《현대문학》2023년 1월호, 394~403 문소영 '에드워드 호포의 고독한 도시 그림에서 소설가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냈을까') 호퍼 그림의 텅 빈 건축 공간과 거기에 빛이 만든 도형과 상념에 잠긴 인물들은 한데 어울려 복합적인 관념과 정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그에 대해 평론가 롤프 G. 레너는 이렇게 말했다. "얼핏 리얼리즘에 충실한 듯한 호퍼의 회화는 (......)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복제하는 대신 빈 공간을 창조한다. 호퍼 작품의 심연은 서술 텍스트가 갑자기.. 2023. 3. 16.
"다시 태어난다면?" 그럴 리 없다. 사양할 것이다. 이번만으로 됐다. 강제하는 경우에도 더 나은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구차할 것 같다. 함께하는 사람을 고생시키면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건 할 짓이 아니다. 굳이 물어볼 것도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번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하다. 갚을 길도 없다. 뻔뻔하지만 그 정도는 안다. 2023. 3. 15.
시인과 쓸쓸한 공무원 시인 설목이 전화를 했습니다. (나) "여보세요~" (설목) "공문이 왔습니다~" (나) "무슨 공문요?" 마침 버스가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파트 앞을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여서 소음도 한몫하긴 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나는 공문이 왔다는 걸로 들었습니다. 공문과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산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나는 이렇게 젖어 있습니다. 이건 쓸쓸한 일입니다. 문득 지지난해 여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박수홍이 결혼을 했다는 뉴스를 본 아내가 내게 그 얘기를 할 때 마침 아파트 옆 오르막길을 버스가 용을 쓰며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는 거실 창문을 열어놓은 상태였습니다. "박수홍이 결혼했다네~" 아내는 그렇게 말한 것인데 이쪽 방에서 책을 읽던 나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복숭.. 2023. 3. 14.
히라노 게이치로 《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본심》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23년 2월호 "어머님의 VF(virtual figure)를 제작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VF에 관해서는 대략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일반적인 상식 정도밖에는......" "가상공간 안에 인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모델이 있는 경우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인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시카와 시쿠야 씨의 경우에는 모델이 있는 쪽을 의뢰해 주셨네요. 겉모습은 실제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될 정도예요. 이를테면 저의 VF와 저 자신이 가상공간에서 이시카와 씨를 만나더라도 어느 쪽이 실물인지 분명 구별을 못 하실 거예요." "그렇게까지 똑같아요?" "이따가 보여드리겠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믿어주셔도 좋습니다. 말을 건네면 아주 자연스.. 2023. 3. 13.
내 독서에 대한 나의 희망 나는 읽어야 할 책을 얼른 다 읽고 싶다. 읽어야 할 책? 사놓은 책, 꼭 한 번 읽으라고(그렇지만 이젠 누가 보낸 것인지도 모를 몇몇 권의 책) 아니면 내 책 좀 보라고 보내주는 책, 새로 나오는 책을 일부러 찾아서 사지는 않지만 더러 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게 되는 책...... 저 서장(書欌)에서 나를 기다리는 책. 읽을 책은 줄어들고 있나? 모르겠다. 줄어들기를 기대하며 읽는 수밖에 없다. 다 읽으면 할 일이 있다. 읽은 책 중에서 꼭 확인해야 할 내용을 찾는 일이다. 가령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서장에 관한 부분, 그 부분은 소설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에서 그 지독한 향수 전문가가 자신이 냄새 맡아본 몇 천 가지의 향수를 종류별로 자신의 뇌 속 창고에 보관하듯 수많은 책이 정리되.. 2023. 3. 12.
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어머니의 연인》 이노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9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아주 건강했다. 그는 입식 보면대 위로 몸을 굽히면서 「모차르트 교향곡 G단조」의 악보를 넘기다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그의 손에는 찢긴 악보 조각이 들려 있었다. 느린 악장이 시작되는 부분의 호른 연주부였다. 언젠가 그는 내 어머니에게 이 「교향곡 G단조」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말했었다.─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듯이 느는 언제나 악보를 읽곤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정열에 관한, 고집스러운 정열에 관한 이야기. 그 앞에 바치는 레퀴엠. 힘겹게 살아갔던 어느 인생 앞에 바치는 절'(157)이다. 어떤 여인이.. 2023. 3. 10.
내 눈물 아무리 딴생각을 하려고 해도 기가 막히다는 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일들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더러 외롭고 허전하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적막하고 더러 얼른 마치고 갈 수 있으면 싶고 그런데도 나는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없으면 이게 인간인가? 내가 지금 인간인가? 인간의 조건은 소나 개처럼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아는 게 아닐까? 눈물도 모르게 된 나는 인간인가? 2023.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