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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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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이야기」 "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희경 그해 여름엔 참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딱따구리와 함께 보낸 장마 기간을 잊을 수 없다 빨간 머리의 딱따구리는, 적어도 내 방에서만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책장에 구멍을 내거나 구멍을 내는 소리로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나는 더러 그가 딱따구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딱따구리였다 시내 큰 서점에 가서 사 온 커다랗고 비싼 조류도감에도 한 치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딱따구리가 때론 포유류의 머리를 공격해 뇌를 파먹기도 한다는 경고를 그 책에서 읽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머무는 동안 나는 희미하고 끈질긴 두통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머리의 이쪽저쪽을 만져보면서 딱따구리.. 2024. 5. 23.
자네,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나 슈바이처에 대해서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는 건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단편적 지식은 양(量)으로나 질(質)로나 초라한 그 수준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창에 "슈바이처"라고 넣어보면 뭔가 좀 읽을 수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나는 그동안 동네 맛집은 자주 찾으면서도 슈바이처에 대해서는 그런 착안을 해 볼 생각이 아예 없었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출처 : 나무위키)   슈바이처는 산업시대의 인간을 부자유하고, 집중력이 없으며, 불완전하고,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가 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규정하고, 많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힘을 잃고 소속된 집단의 세력에 자신을 내맡긴 채 살아가고 있.. 2024. 5. 21.
바꾼다고? 싫어! 좋은 거라도 싫어! 나는 교사 시절부터 교과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부에 들어가 일할 때에는 그 관심을 증폭되어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했다.그렇게 해서 지병을 갖게 되었고, 퇴임은 내겐 그 고초의 시작이 되었고, 심할 때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구나' 싶었다. 오늘 낮에도 문득 옛일을 떠올리다가 '아, 그건 우리나라 역사상 내가 처음 도입한 거지'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모든 걸 생각하기도 싫어졌다. 무슨 일이든 하던 대로 하면 저항이 없다. 작은 일이라도 바꾸자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귀찮고, 잘못되면 책임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꾸려면 웬만한 일은 아예 지시하듯 해버려야 하고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으로 추진해야 .. 2024. 5. 20.
우리가 떠난 후에도 제자리에 남아 거실 창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저 나지막한 산은 규모는 그저 그래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기상은 믿음직합니다.새잎이 돋아난 연둣빛이 수줍은 듯 곱던 날들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녹음에 싸여 저기 어디쯤 들어가 있으면 누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싶고, 몇몇 산짐승이나 새들, 온갖 벌레들이 한동안 마음 놓고 지낼 듯해서 더 푸르러라, 아주 뒤덮어버려라,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우리 인간들이 걸핏하면 괴롭히지 않습니까?매연도 그렇지만 저렇게 좋은 산을 야금야금 파먹어버립니다. 이래저래 가만두질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변화가 그들에게는 결코 이로울 게 없는데도 자연은 웬만하면 그 상처를 스스로 덮어버리고 우리가 잘라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저 자리를 지키면서 저 싱그러움, 푸르름으로 눈길을 끌어주고, 내가 그.. 2024. 5. 17.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김연덕  산속에 묻혀 있던 우리 집에서 언니는 한밤중에도 비이올린을 켜곤 했다 언니 방 방문에는 검은색 니트를 입은 카라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언니가 활을 꺼내 송진을 문지를 때마다 그 지휘자 옆으로 사라져버릴까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흑백의 세계로 언니가 사랑하는 외국으로 빨려 들어갈까 무서웠다 언니 방 바깥으로는 창문과 너무 가까이 뻗어 자란 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높은음을 켤 때마다 잔가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기진한 채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할 것처럼 조금씩만 떨리곤 했다 가지 몇 개가 어둡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어린 나는 활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거칠고 고집스러운 흑백의 사랑을 느꼈다 비가 오.. 2024. 5. 15.
제국주의의 짐, 범죄의 백과사전·선행의 백과사전 현직에 있을 때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면 다 '매국노'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고집스러운 역사학자들을 여러 명 봤다. 장관과의 조찬 모임에서 교육과정을 개정해서 역사 가르치는 시간이 줄어들게 한 사람들을 '매국노'라고 하는 사람도 만났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그 말을 들으며 아침을 먹는 나는 장관이 뭐라고 답하는지 살피며 매우 슬펐다. 학창 시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만든 교과서로 역사를 배웠다.'이 사람들은 왜 이럴까?'뭔가 미심쩍어하면서도 다 우리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어서 그럴 것이라고 애써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혹 다른 견해로 쓴 책을 보면 '조금 별난 역사학자' 정도로 받아들이곤 했다.그건 세계사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으며 내 눈은 '완전'(.. 2024. 5. 14.
고마운 젬마님... 교육 관료들 사이에서는 힘주며 사셨겠지만... 젬마님이 불친이 된 건 지난 4월 11일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살았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시도 교육청 장학관, 장학사 회의 때 어깨에 힘주고 들어오는 장학관들을 보면 나는 당장 지적했었지요."그 어깨에 힘 빼고 목 좀 부드럽게 하세요! 여기 와서도 그렇게 하는 장학관이 학교 선생님들을 어떻게 대할지 안 봐도 뻔하죠! 우리가 교사시절에 관료들이 잘난 체하던 꼴 역겹지도 않았나요?!"그런 지적이 거듭되니까 그 당시엔 내 앞에서 어깨가 오그라들던 그들이 내가 교육부에서 나오는 순간 어떻게 처신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죠. 이미 재작년 봄에 나왔고, 교육에 관한 글은 보나 마나 재미없을 것 같으니까 아예 외면해서 어느덧 사라지고 있던 책이 젬마님 손에서 파란 잎을 달고.. 2024. 5. 12.
내가 듣는 것들 소식 없다고 서운했겠지.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의 일이야. 저기 있을 땐 음악을 들어. 여기 있을 땐 책을 '듣고'. 그것뿐이야. 다른 일은 없어.저기 있을 땐 또 생각하지. 여기선 음악을 '듣고' 거기 가면 책을 듣는다고. 다른 일은 없어. 세상의 일도 내 일도 나의 것이 아니야. 음악은 왜 들어? 책은 왜 들어? 그렇게 물으면, 둘 다 같은 거야. 음악은 지금의 나와 지난날들, 더러 앞으로의 내가 이리저리 떠오르는 것이고, 책은 구체적이어서 '그래,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 정도야.결국은 같은 거야. 둘 다 듣고 나면 그만이야. 그것들은 다 '순간'이야. 앞으로도 소식 없을 거야. 나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2024. 5. 10.
민들레꽃 바라보기 "뭘 그렇게 들여다봐? 지나가다 말고.""너희 좀 보느라고.""한심해? 초라해?""굳이 후손을 퍼뜨려보겠다고, 일찌감치 꽃 피우고, 어디로든 좋은 곳으로 날아가서 내년에 꽃으로 피어나라고, 그렇게 꽃씨를 달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서 있는 가련한 꼴이라니...""어쭈구리, 너희 인간들은 다른 줄 알아?""우리가 왜?""고달프긴 마찬가지지. 오죽하면 결혼을 마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고달픈 것만도 아니지. 온갖 이유가 다 있을걸?""그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경우지. 애써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지.""내가 그 말이야, 이 사람아!""자식 두는 의미가 뭔지 의구심이 들긴 해.""잘해주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자식도 있지? 그렇지? 갖다.. 2024. 5. 9.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차경아 옮김, 까치 2012       이 책을 2012년에 구입했다. 그전에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그릇된 환상의 종말무궁한 발전에 대한 위대한 약속─자연의 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무제한적인 개인의 자유에 대한─은 산업시대 개막 이래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 온 토대였다. 사실상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가 개막되기 이전까지는 그 지배력에 한계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을 기계 에너지가, 나중에는 핵 에너지가 대신하고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가 대신하기까지 산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무한한 생산과 아울러 소비의 도상에 있으며, 과학과 기술에 .. 2024. 5. 8.
실리콘 코킹 기사들 보름 전에 통화한 코킹 업체 사장은 분명히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는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젊은 기사 두 명이었다. 일이야 기사들이 한다 쳐도 사장이 있어야 제대로 될 것 아닌가 싶었다."사장님은요?"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두 젊은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들인데요, 아버지는 나이가 좀 많아서 (어쩌고 저쩌고)... 저희가 일 끝내고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로 했습니다."그 해명이 공손하고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아파트 뒷마당에서 올려다보며 어디쯤이 물이 새는 창문틀인지, 그런 곳이 어디 어디인지 가늠해 보고 업체 측에서 도착하면 깔끔하게 설명해 줄 작정이었고 그러면 그들은 "늙은이치고는 섬세하네" 할 것까지 예상해 두었는데 ('이런!') 그들은 실내로 들어오더니 .. 2024. 5. 7.
저 정교함! 햇빛만 받으면 그만일 텐데 굳이 저렇게 정교한 이유가 뭘까?내가 한 일 중 저 모습을 닮은 것이 있었나?나는 이렇게 허술한데 인간은 어떻게 해서 ─옳은 일이었든 그른 일이었든─ 자연을 정복해 버릴 수 있었을까? 나는 저 정교함에 대해 감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론들은 저것을 설명하려는 것이었겠지?저 정교함은 어떤 이론에 대해 기분이 좋을까?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를 읽고 메타세쿼이아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금방 참 좋은 나무구나 싶었다. 건축사 무라이 슌스케가 실제 인물 같고, 그가 사무소 직원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존경받는 것이 부러웠고, 그가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무소 정원의 메타세쿼이아를 바라보며 살았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 .. 2024.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