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276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집 이름을 아예 「픽션들」이라고 했는데도, 허구적 인물과 함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현학적·철학적이기도 하다. 각주들이 있어서 더 그렇다.충분한 설명을 해주는데도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꿈같기도 한 줄거리에 호기심으로 따라가게 하고 뜻하지 않은 결말을 기대하게 한다. 고양이의 새까만 털을 쓰다듬는 동안, 그는 그 감촉이 꿈이며 자기와 고양이는 마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 가운데, 즉 연속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마술적인 동물은 현재에, 즉 순간의 영원 속에 살기 때문이었다. 이건 「남부」에.. 2025. 2. 2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집 『픽션들』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옮겨 썼다. 독후감을 써 놓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학생으로서 암기에 지긋지긋해했고,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도 이 사회의 암기 혹은 기억에 대한 편중(偏重)에 지긋지긋해했다.그러나 내 힘으로는 그 막강한 성벽에 금이 가게 하기는커녕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 성벽 안 사람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 걸 보았다.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기억한 것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배경일 것 같았다. 기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기억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그렇지만 기억이, 기억을 위한 훈련이 교육의 최우선 덕목이 되고 있는 건 기이한,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 2025. 2. 20. 혼자 생각함 저렇게 서 있다.딴짓을 하다가 내가 볼 때만 점잖은 척하는 건 아닐 것이다. 뭘 생각하는 걸까? 혹 누구를 기다리나?그렇게 물으면, 너도 이러잖아, 할 것 같다. 궁금해할 것 없을 수도 있다.'내 생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지내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떠들썩한 곳이 세상 같지만 그런 시간은 짧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은 길다. 2025. 2. 19. 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2 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2여백 2013 최초의 남자가 경아를 망가뜨렸듯이 두 번째 남자 만준도 음습하고 우울한 생활 속으로 경아를 밀어 넣어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경아를 한 번 더 파괴해 버렸다. # 그렇게 버려진 경아는 술집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술 없이는 한시도 숨 쉴 수 없는, 술을 마시면 종달새처럼 지저귀고 노래하는 여인이 되었다.세상의 사내들은 아름다운 경아의 성을 가지고 싶어 집요하게 다가가고,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짓밟고 버린다.그림을 그리는 화자(김문오)도 그 사내들 중 하나였다.문오도 경아를 사랑했다. 문오가 경아를 사랑했으므로 경아도 문오를 사랑했다. 그러나 동거생활까지 한 문오의 사랑은 경아의 사랑과 다른 사랑이었다. 나의 외로움, 나의 슬픔, 나의 고독,.. 2025. 2. 18. 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1 최인호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 1여백, 2013 1947년생 오경아는 인형처럼 예쁘다. 밝고 낙천적이지만 외로움을 잘 탄다.혼자인 것을 잊기 위해 아이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인, 그러다가 울고 금방 또 웃는 여인, 혼자 있기가 싫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싶어 하는 여인, 불행한 사람이나 생명 있는 것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여인,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무엇이든 모아놓는 여인...... 열아홉 살 그녀를 농락한 사내가 있었고, 후처로 삼은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들은 경아가 술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세상을 버리게 했다. # 이 소설을 50여 년 전, 1973년에 읽은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남아 있지만 경아는 나 같은 사내들 때문에 이미 그때 세상을 떠났다.나는 왜 이미 사라.. 2025. 2. 17. 우수 가까이, 울렁거림 '이번 겨울은 영영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그런 느낌의 겨울은 나에게는 여러 번이었다.가을이 소식도 없이 가버리고 겨울이 왔을 때, 서서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완전하게 2024년 겨울이 그렇게 왔을 때, 나는 또 그런 느낌이었다.기이한 일은 그렇게 기세 좋게 온 겨울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 멀리 사라진 후에 가버렸구나 하고 깨닫곤 했다.그래서였는지 그렇게 가는 그 겨울들이 때로는 섭섭하기도 했다.이번 겨울은 더 그런 것 같다.시작될 때의 그 도도한 모습과 지금, 가겠다는 기별도 없이 가고 있는 모습을 상투적이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 같다고 해야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어제 저 거대하고 을씨년스러운 수채와 지저분한 개울과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한겨울에 이곳을 지나며 내려다보면 저 나뭇.. 2025. 2. 14. 김원길 「착한 스토커」 저녁 내내 안동 사는 김원길 시인의 시집 《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지내는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년에 자주 가는 식당 종업원으로부터 시 한 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던가 해서 "내가 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한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더러 노망이 나서 분명한 신변잡기를 행만 나누어 시라고 발표해서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늘그막에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경우로 김 시인도 그런 경우인가 기대를 갖고 있다. 시집 《덤》에는 인류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2025. 2. 13. 치어리더처럼 양손을 들어 흔들어준 그 간호사 아내와 병원에 다녀왔다.연중 둘이서 병원 가는 날짜를 다 헤아리면 한 달은 될까? 거의 그렇다.아내는 본래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지만 이런 날은 녹초가 되어 더 일찍 거의 쓰러져 잔다. 내가 병원에 갈 땐 나 혼자 가고, 아내가 병원에 갈 땐 천하 없는 일이 있어도 내가 운전사 겸 보호자가 된다.할 일이 많다. 출발 시각 정하기부터 병원에 도착하면 들러야 할 곳의 위치를 알아서 척척 앞장서고, 수납도 접수도 알아서 처리하고, 간호사에게 도착 신고하기, 진료 마치면 간호사의 설명 듣기, 식당과 메뉴 선택하기, 처방전 가지고 약국 가기, 뭐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다 생각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사실은 나도 파김치, 곤죽이 되는데 나는 지금 동관 주사실 간편 주사 담당 간호사를 생각하고 있다.그녀는 주사를 .. 2025. 2. 12. 유종호 문학평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 유종호 문학평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서정시학 비평선 18, 2009 제1부 '시와 말과 사회사'에서는 낱말 하나하나에 이르는 정독을 강조하고 그 사례를 보여준다. 제2부 '시론과 시인론'에서는 서정시의 근간, 시론, '청록집', 김춘수의 시세계(이데아의 음악과 이미지의 음악), 반시대적 서정시인 김영랑, 미당 서정주의 삶과 시, 시조의 오늘과 내일, 평가와 지적 유행, 친일시에 대한 소견을 이야기한다. 유종호의 글은 치밀하면서도 유연하고 재미있다.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다만 제1부에서 오독 사례를 이야기할 때 특정인을 호명한 부분들은 껄끄러웠다. 아름다운 모자이크에 흙물이 튄 느낌이었다. 그 다른 이가 그렇게 했더라도 그냥 설명했더라면 싶었다. '나의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게 아니라 나오자.. 2025. 2. 11. 그때 그 자리 나는 안동교육대학(2년제)을 나왔다. '선생'이 되려고 그 학교에 간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입시에 실패했고 한 해 동안 낭인처럼 떠돌다가 학비가 거의 안 들더라는 친구를 따라간 것이었다. 그러니 공부를 할 리가 없었다. 2년간 그냥 지내기만 했다.졸업하고 발령을 받았더니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며 졸졸 따라다녔고, 사범학교(고등학교)를 나온 교장 이하 여러 선생님들이 교육대학을 나온 정규 교사라고, 말하자면 '고급'의 교사라고 우대해 주는 걸 보고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교육에 관한 책을 새로 구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고, 그러다 보니 좀 알게 되었고, 다른 4년제 사범대학에 편입해서 공부를 더 했고, 대학원이라는 곳에 가서 공부해보기도 했다.나중에는 교육부에서 오랫동안 .. 2025. 2. 10. 김춘수 「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울타리는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철마다 피곤소리없이 저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외롭게 햇살은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歲月은 흘러만 가고꿈결같이 사람들은살다 죽었다. 오늘의 詩人叢書《金春洙詩選 處容》민음사 1974. 하루가 잘도 간다.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나도 지금 그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조금 전 일어난 것 같은데 밤이 깊었다.어제와 오늘, 내일이 한데 딱 들어붙어 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나는 곧 아침의 양치질을 하면서 이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주제넘게 '웬 제목이 不在일까' 하다가 不在보다 확실한 제목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생각해보면 내가 지나다닌 바로 그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 2025. 2. 8. 어떻게 하지? 박새? 곤줄박이?먹이 찾기가 어려웠겠지.눈을 쓸어낸 출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밤새 자꾸 생각났다.지금쯤 길 건너 산으로 갔을까? 영하 14도라지만 햇살은 따스하니까 눈이 녹을까? 2025. 2. 8. 이전 1 2 3 4 ··· 27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