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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바나나 한 손 / 박소란

by 답설재 2025. 5. 18.

바나나를 먹었다

아침으로도 먹고 저녁으로도 먹었다 달고 부드러운,

살이 되고 피가 되겠네

그럴수록

바나나는 조금 아파 보인다

 

줄기를 벤 부위에 꾀죄죄하게 피가 말라 있는 게 보인다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을 피를 바지춤에다 슥슥 문질러 닦은 것같이 보인다

반창고도 하나 없이

 

짙은 흉터가 남을 것이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바나나 뭉텅이, 바나나 응어리, 하기도 했지만

 

바나나 한 손 a hand of banana

영어에서는 바나나를 손에 비유한다는데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는 그 손을 잡아야 하겠네

 

손을 잡은 뒤에는, 뒤에는

 

다시 놓으면 된다

다시 먹으면 된다

 

바나나 한 손을 검색하자 매끈한 모형 과일이 쏟아져 나오고

이런 건 언제 어디다 쓰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

 

외로워 보인다

서글퍼 보인다, 가끔은 진짜처럼

 

다시 잡으면 된다

그냥 버려도 그만이지만

 

아직 나는

나를 보리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언제나 바나나가 있고

아홉 개의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꽉 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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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한 사람의 닫힌 문』『있다』『수옥』. 〈노작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세상 여기저기 야단법석이다.

그렇지만 거의 다 소문이고 전쟁이래야 내게는 70여 년 전에 있었을 뿐이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나도 여기저기 아픈 곳 많다'고 생각한다. 치통, 관절통, 안질... 직접 느껴지진 않지만 사실은 더 무서운 지병까지 모두 찾아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다가오는 나의 아픔들.

 

비로소 내 시야, 관심 밖에 있었던 아픔들이 다가온다.

바나나의 아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