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를 먹었다
아침으로도 먹고 저녁으로도 먹었다 달고 부드러운,
살이 되고 피가 되겠네
그럴수록
바나나는 조금 아파 보인다
줄기를 벤 부위에 꾀죄죄하게 피가 말라 있는 게 보인다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을 피를 바지춤에다 슥슥 문질러 닦은 것같이 보인다
반창고도 하나 없이
짙은 흉터가 남을 것이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바나나 뭉텅이, 바나나 응어리, 하기도 했지만
바나나 한 손 a hand of banana
영어에서는 바나나를 손에 비유한다는데
바나나를 먹기 위해서는 그 손을 잡아야 하겠네
손을 잡은 뒤에는, 뒤에는
다시 놓으면 된다
다시 먹으면 된다
바나나 한 손을 검색하자 매끈한 모형 과일이 쏟아져 나오고
이런 건 언제 어디다 쓰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
외로워 보인다
서글퍼 보인다, 가끔은 진짜처럼
다시 잡으면 된다
그냥 버려도 그만이지만
아직 나는
나를 보리지 못했다
식탁 위에는 언제나 바나나가 있고
아홉 개의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꽉 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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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 1981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수첩』 등단.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한 사람의 닫힌 문』『있다』『수옥』. 〈노작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세상 여기저기 야단법석이다.
그렇지만 거의 다 소문이고 전쟁이래야 내게는 70여 년 전에 있었을 뿐이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나도 여기저기 아픈 곳 많다'고 생각한다. 치통, 관절통, 안질... 직접 느껴지진 않지만 사실은 더 무서운 지병까지 모두 찾아 생각한다.
이기적으로 다가오는 나의 아픔들.
비로소 내 시야, 관심 밖에 있었던 아픔들이 다가온다.
바나나의 아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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