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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279

올해 스물여덟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새해 준비 11월 하순에 접어듭니다. 단풍은 남아 있습니다. 눈 남은 건 잔설(殘雪)이라고 하던데 단풍 남은 건 뭘까요? 가로수에 꼬마 점멸 전구들(은하수 전구?)을 매달고 있습니다. 별처럼 반짝이겠지요. 나는 올해도 이렇다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세월을 따라왔습니다. 점검하고 반성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내년이라고 뭐가 달라질 리도 없습니다. 자주 초조해지기만 합니다. 별일 없으면 다행인 줄 알며 지내려고 합니다. 2022. 11. 21.
정훈희 '안개' 안개의 도시였습니다. 가망 없다는 느낌인데도 다른 길은 없어서 학교나 다녔고, 더러는 아무도 몰래 안갯속으로 빠져들어가 낮에 함께 공부하던 이성을 만났습니다. 안개 때문에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고 만나서 무얼 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소녀 정훈희의 '안개'가 저녁마다 거리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 노래는 누가 어디서 누구와 만나 어떤 얘기를 하는지 샅샅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가망 없다는 느낌만으로도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그 '안개'가 휩쓸고 지나가는 바로 그 거리를 끝없이 헤매고 있었습니다. 내게 다가온 사람들은 내가 가망 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런 기대나 희망을 느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느낌으로 하나씩 하나씩 멀어져 가버렸고 .. 2022. 11. 20.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게 되었다. 2022. 11. 16.
BTS "봄날" 나는 요즘 우울합니다. 우울한 날에도 늙어가긴 합니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도 시간은 갑니다. 혼자서 BTS 부산 공연 실황 중계방송을 보던 밤이 떠오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보라색 함성'이 지금도 다 그대로 "보입니다". 그때도 나는 우울 모드였는데 아, 이런...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우울했고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을밤이 그립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그 때가 '가을밤'이었습니다. 그런대로 좋은 가을밤이었었습니다. '봄날'이었지요, 아마? 그들이 끝에, 개별로 이별 인사를 하기 전에, 그러니까 공연 마지막에 불러준 노래... 봄날... 그들은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면 오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그 "여러분"의 한 명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022. 11. 14.
나는 '꼰대'가 되어 살아가네 묻지도 않았는데 늘 먼저 '답'을 주려고 하고, 심지어 그 '답'조차 유효기간이 지났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그 사람을 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묻지도 않은 답을 들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 답 속에 섞여 있을 자신에 관한 평가나 판단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 기질은 나이 드신 분에게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오래 일했고, 많이 경험했으니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이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구범준 세바시 대표 PD 「나이 들수록 '?'가 필요해」(《○○○○○》2022.11.)에서. 사람들이 "꼰대" "꼰대" 해서 어렴풋이 나이 들어 망령이 나기 시작한 사람을 보고 그러는가 보다.. 2022. 11. 7.
아내의 큰소리 나의 큰소리 평생 죽은 듯 지내던 아내도 오기가 발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는 저 사람에게 막 대해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게 막 대하고도 남을 만한 일을 충분히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백 번은 생각해 놓고는 아내의 그런 반응을 눈치채는 순간 '이것 봐라?' 하고 이번에는 나의 진짜 오기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큰소리를 냅니다. 말하자면 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나의 오기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만 입을 닫고 맙니다. 그리고 그게 또 나를 괴롭힙니다. '아, 내가 이러지 않겠다고 백 번을 다짐해놓고 또 이렇게 했구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는 "동정을 요구하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메마른 아라비아의 신월도(新月刀) 같은 부친.. 2022. 11. 3.
왜 나는 자꾸 시시하고 한심해지는 걸까? 내 눈길은 왜 자꾸 시시한 것들에게 머물게 될까? 왜 나는 이렇게 한심해지는 걸까? 2022. 10. 27.
꼭 가보고 싶은 '행복 베이커리' 기회가 되면 가보려고요.^^ 어렵겠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학교 가는 아이들이 굶지 말고 공부하라고 매일 아침 갓 구워 낸 맛있는 빵과 요구르트를 마음대로 가져가게 한다네요.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일해서 그렇게 무료로 나눠준다고요. "유퀴즈온더블럭"에 나와서 빵집도 전세로 빌렸고, 재산은 십몇 년 된 자동차 한 대밖에 없고, 방송에 출연한다고 정장 한 벌을 마련했는데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서 '빵쟁이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가슴과 어깨에 태극기를 수놓은 그 검은색 '빵쟁이 옷'이 멋있게 보였습니다. 어디서 상을 준다는 걸 극구 사양하다가 부상으로 상금이 있다고 해서 빚 갚으려고 그 상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며 곤충학자 파브르가 생각났습니다. 그가 교사 시절에 그의 수업을.. 2022. 10. 24.
가을에 돌아왔네 나는 돌아왔다. 내가 꾸민 나 말고 남이 꾸며준 나 말고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늦게나마 다행한 일이 아닌가. 다시 꾸밀 수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다시 꾸며줄 이도 없는, 마침내 여기 서성이고 있는 나 말고는 다른 내가 없다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2022. 10. 23.
노인들은 왜 조롱을 받을까? '노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을 읽으며 신화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되었을지 궁금했습니다(흔히 신화에서 근원을 찾지 않습니까?). 제우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의 시대를 지배했던 티탄족과의 초기 전투에서 승리해 권위를 얻었다. 크로노스는 자기의 모든 자식들을 삼켜버렸으나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는 제우스를 돌과 바꿔서 그를 구했고,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메티스를 삼켜서 한 몸에 힘과 지혜를 지니게 되었다. 제우스의 실용적 능력은 유명했으며 전혀 틀림이 없었고, 그의 판결은 비평의 여지가 없었다.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정의의 황금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 2022. 10. 10.
인생은, 두서없이 삭제되어 가는 기억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②)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도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할, 노인이 보기에 비참한 내용이지만 베게트에게서도 "종말의 비참한 쇠락을 통한 삶에 대한 비판"(보부아르)을 발견한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썼다.(298~299) 〈승부의 끝 Fin de partie〉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쓰레기통에서 쓰레기통으로 전전하며 지나간 행복과 사랑을 언급하다가 모든 사랑과 모든 행복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영화 La Dernière〉와 〈아! 아름다운 날들이여! Ah! les beaux jours!〉에서 잔인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기억의 풍화 작용, 우리 뒤에 남은 우리의 모든 삶의 풍화 작용이다. 추억은 두서없이 삭제되고 파손된 채로 생소.. 2022.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