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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16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준비한다고 말끔하게 이루어지는 건 별로 없다.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상담실'은 암통합진료센터에 있었다.마음은 바쁘지만 상담사의 말머리를 따라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이분이 지금 날 데리고 뭘 하자는 걸까?' 싶은 걸 몇 가지 묻더니 미소를 지으며 "만점이네요!" 했다. 테스트에 통과해야 제정신이고 의향서는 제정신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시험 같은 건 더 이상 볼 일이 없겠구나, 이십몇 년 전에 그 생각을 했었는데 엉겁결에 한 가지 시험을 치렀다.호스피스 이야기도 했다. 기회가 오기나 하면 좋겠다. '중단 항목'은, 그 시간이 되면 이 중 어느 항목이 나에게 그 '중단'의 행운(!)을 가져다줄까 생각하게 했다. 2024. 11. 10.
영등포 고가차도의 '선글라스' 서울시가 영등포 고가차도 철거를 시작으로 영등포 로터리 구조개선 사업에 착수한단다. 10월 25일, 어젯밤 11시부터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내년 4월까지 약 6개월간 작업을 진행한단다. 하거나 말거나.그렇긴 하다. 나는 이제 저런 번화한 길로 내 차를 몰고 갈 일이 없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한물간 사람이어서 두렵기 때문이다. 부천 소사 살며 광화문 교육부 나갈 때는 저 길로 다녔다. 마포로 들어가고 서대문 쪽을 거쳐 광화문으로 진입하는 그 길을 겁도 없이 다녔다. 2004년 8월 말까지였다. 허구한 날 야간근무를 했지만(수십 명 직원 중 한두 명이 남아 있으면 나는 무조건 남았으니까), 재수 좋은 날은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그런 날 지금 저 차량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귀가하다 보면 참 많이도 밀리고.. 2024. 10. 26.
"얼른 안 와?" "얼른 안 와?"어느 사서가 창턱에 어마어마하게 큰 책 한 권을 얹어 놓았고, 다른 사서는 그 위에 자그마한 화분 두어 개를 올려놓았다.나는 저 창을 바라보면 볼일을 그만두고 도서관으로 직행하고 싶어진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사람이 책만으로는 살 수 없고 책에서 빵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건 뻔한 일인데도 그렇다."그러니까 얼른 와." 방학이 다가오는 어느 날 행정실장을 불러 '받아쓰기'를 시키던 일이 떠오른다."실장님, 받아써 보십시오. '얘들아! 우리 학교 도서관에 좋은 책 많아. 그리고 참 시원해!' 다 썼습니까?""예, 교장선생님!""그걸로 현수막을 만들어 교문 위에 걸어주세요."순간, 그분의 눈에는 내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자랑스러웠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런 현수막만.. 2024. 10. 24.
지나온 길 · 가야 할 길 2024. 10. 6.
아버지, 꽃이 피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누워 있었다. 어머니 산소 앞이었다.거기 한 길쯤 자란 덩굴에 대여섯 송이 탐스러운 꽃이 피어 있는 걸 보고 내가 말했다. "꽃이 피었어요.""그러네."꽃을 살펴보고 아는 척했다. "장미꽃이네요.""응."10월 1일 밤 자정 조금 넘은 시각, 그새 꿈을 꾸었다.어머니가 떠난 지 52년, 아버지도 23년이나 되었다. 며칠 전까지 무더웠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단 하루도 어렵지 않은 날이 없었던 지난여름이 자꾸 떠오른다.그리운 거지? 떠날 때가 가까워져서 그런 걸까? 2024. 10. 4.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뭘까?잡초 뽑기?청소?손빨래?라면 끓여 먹기?책 읽기?칫솔, 속옷, 작업복 같은 것을 제외한 내 물건 특히 옷가지 구입하지 않기?외로워도 그냥 있기?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난 참 허접하네.그래도 이 정도로 허접할 줄은 몰랐는데...사람이 참 별 수 없네.더 있긴 하지. 가령 남 비난하기. 남(가령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잘잘못을 따져서 이야기하기 등등. 그런 것들은 더 잘해서 나에게나 남에게나 덕 될 건 아니지. 그러고 보면 더 있을 것도 없네.그럼 그중에서 내가 정말 잘하는 건 뭘까?잘할수록 좋은 건 뭘까?잡초 뽑긴 분명 중도 탈락이 되겠지?청소? 그걸 그렇게 잘할 필요가 있나? 미루지나 말고 하면 그만이겠지? '청소 선수'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빨래도 해내면 그.. 2024. 9. 1.
이 하루하루 나는 종일 몇 마디 말을 하지 않는다.그 몇 마디 때문에 나의 하루는 길어진다.그렇지만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를 마련할 때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는 걸 의식한다.눈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날의 그 시간이 머릿속에 엊그제 일처럼 찍혀 있는 날짜를 따져보면 이미 다섯 달이 지났고, 다시 5개월쯤 지나면 또 눈이 내리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시간과 순간의 의미이다. 2024. 8. 1.
쉰 목소리 바이든과 트럼프가 TV토론에서 맞붙었단다. 어느 신문은 토론 이후 바이든이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라면서 토론 내내 쉰 목소리였고 여러 차례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이면서 81세 고령과 건강 문제가 다시 부각되었다고 했다. 최근 다시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고 델라웨어 사저에서 요양 중이라는 것도 덧붙였다.이 기사대로라면 트럼프는 바이든에 비해 젊은이처럼 인식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을까?바이든이 현임이니까 재선 가능성이 높을까?바이든은 결국 사퇴하고 말까?제3의 인물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까?알 수가 있나... 나는 바이든이 단상에 올라서 괜히 몇 발자국 뛰는 흉내를 내는 게 더 안타깝다. '뭐 하려고 저러지?'때로는 웃기려고 저러나 싶기조차 했다. 뛰어봤자 함께 .. 2024. 7. 21.
저녁노을 속을 달려 집으로 가는 부부 "남편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저녁노을. 남편이 지는 해가 이쁘다고 사진 찍으라 했다." 불친 W님의 블로그에서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 영 연방국의 교육과정(curriculum)에 대해 알아보려고 보름간 여행한 적이 있는 그 나라가 그리워졌다. 그들 부부는 그 노을 속으로 달려가며 떠나버린 이 나라를 그리워했을까? W님은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달리며 찍은 저녁노을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글은 단 두 마디였고, 위의 문장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실제로는 지는 해가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는데 사진으로는 이것이 최선이어서 아쉬웠다." 그렇겠지?아름다움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사진이 어디 있을까? 그러려면 그 사진에 W님 부부의 마음까지 고스란히 스며들어야 한다. 노을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거의.. 2024. 7. 11.
김연덕 「브로치」 브로치  김연덕  집안의 여자 어른이 갖고 있던 장신구의 이미지를 따라 살게 되는 삶은 얼마나 따뜻하고 끔찍한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안방의 직각 거울할머니는 마음 한쪽을 깊이빼앗긴 책을 읽는 것처럼그 책을 아기로 다루는 것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곤 했고 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 그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그릇그릇 안의 크고 작은 브로치들이었다 여러 색의 원석이 도금된 세찬 형태의 브로치들은 꼭 그릇 안에서 잠든 곤충처럼 보였지할머니는 외출 때를 제외하고 내성적인 그 곤충들을 잘 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에 브로치들도 종종 자기들만의 빛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 2024. 6. 13.
산딸기 나무 그냥두기 이런 나무를 관목이라고 할까? 키는 그리 크지 않고 옆으로, 옆으로 번지는 나무.나는 관목과 교목을 구별하기가 어렵고, 물푸레나무가 뭔지 모른다. 둔해서 그렇겠지? L 시인이 이 사진을 주었다.산딸기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 발견하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끼던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그대로 스러져갈 기억이었을 것이다.저절로 솟아난 자그마한 산딸기 묘목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내가 없는 날, 누군가 보고, 와! 산딸기가 많이도 달렸네, 하겠지. 2024. 6. 10.
오늘의 운세, 고마운 덕담 디지털에 약한 나는, 데스크톱으로 보는 세상과 핸드폰을 써서 보는 세상이 서로 다르다. '이걸 핸드폰에서는 어떻게 찾지?' 싶은 것이 있고, '데스크톱에는 이런 게 안 뜨던데...' 싶어도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물어볼 데도 없다. 되는대로 지내면 된다. 아침에 데스크톱을 열면, 두 가지 사이트 중 한 곳에서는 '오늘의 운세'를 읽는다. 내 생년월일은 엉터리여서(음력을 양력인양, 더구나 한 해 늦게 태어난 것으로 신고해서) 그게 누구의 운세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남의 것을 내 것인 양 해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그 '오늘의 운세'를 내 것으로 삼기로 했다. 누가 "당신은 당신의 것이나 봐!" 하면 나는 서럽거나 억울할 것이다(인터넷 사이트 개설 때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을 적어 넣지 않으면 아.. 2024.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