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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냉면 시키면 불맛 나는 불고기도 주는 집 아내와 함께 식품가게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자그마한 그 냉면집이 눈에 띄어서 김 교수 얘기를 꺼냈다. "저 가게 김 교수가 혼자 드나들던 집이야." "나도 가봤어. 그저 그래." "김 교수는 맛있다던데? 몇 번이나 얘기했어. 냉면 시키면 불맛 나는 불고기도 준다면서." "친구들하고 가봤는데, 별로던데..." "냉면이나 불고기나 평생 안 먹어도 섭섭해하지 않을 사람이니 어느 가게엘 가면 맛있다고 할까?" "......"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겠지?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탈이다. 아이들과 시험문제 풀이를 할 때처럼 매사에 정곡을 찔러야 직성이 풀린다. 죽을 때는 이 성질머리를 고쳐서 갖고 갈 수 있을까? 별수 없이 그냥 갖고 가겠지? "그 버릇 개 주나?"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인간은 고쳐서 쓸.. 2024. 2. 3.
한강호텔, 옛 생각 병원에 갈 때는 올림픽도로를 타고, 병원에서 올 때는 강변북로를 탄다. 비교적 길이 막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돌아올 때의 강변북로는 고속도로와 거의 같다. 강변북로를 오갈 때는 꼭 한강호텔과 워커힐을 찾아본다. 워커힐은 유명했던 호텔이고 한강호텔은 예전에 고 강우철 교수, 김용만 편수관 등 여러 사람과 사회과 교과서 편찬을 위한 회의 장소로 가장 많이 드나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병원에서 돌아올 때는 한강호텔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놓쳤나? 워커힐은 보였는데...' 기이한 느낌이 있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봤더니 아, 이런! 그 호텔이 사라지고 그곳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뉴스가 보였다. 평당 1억은 되는 아파트일까?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 호텔은 좀 한산한 편이어서 작업하기에는 최.. 2024. 1. 21.
유종호 「한밤중의 소리」 한밤중의 소리 앞으로 아플 일만 남았니라 궂은 일 섭한 일 딱한 일 숨찬 일만 남았어도 견딜 만하니라 버틸 만하니라 가엾은 어멈아! 불쌍한 아범아! 현대문학 2024년 1월호에 연재되고 있는 유종호 에세이 「꿈에 대하여」에서 보았다. 저승에 간 부모와의 대화 중에는 당연히 그런 부탁도 있을 것이다. 견디고 버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2024. 1. 16.
부산 국제시장에 앰프 사러가기 김위복(金位福) 교장선생님은 진짜 무서운 분이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끽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완전' 절절매며 지냈다. 지서 순경들도 우리처럼 쩔쩔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 경력이 단 6개월이었고 교감도 거치지 않고 바로 교장이 되었다고 했다. 초임교사 시절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삐라'(전단)를 만들려고 등사기 좀 빌려달라고 아무리 간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일이 알려져 당장 교장 발령이 났고 이후로 계속 교장이었다는 것이다. 운동회가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선배 교사들이 우르르 학교 앞 도로로 뛰어나가 줄행랑을 칠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달리느라고 숨을 헉헉거리며 왜 이러는지 물었고, 운동회가 엉망.. 2024. 1. 13.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어젯밤에는 시청으로부터 '의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추위나 눈에 관한 문자는 정부부처들, 서울시청, 이곳 도청, 시청 등에서 중복해서 자주 왔지만 안개 주의 문자는 처음이었다. 저녁 9시부터 내일(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 안개가 심해 가시거리가 짧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는 오늘 아침에 한 번 더 왔다. 우리 동네는 걸핏하면 맞은편 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온 안개가 무슨 거대한 짐승 모양으로 움직이며 큰길을 가로질러 서서히 이웃동네를 잡아먹는 것처럼 옮겨가곤 한다. 그게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좀 미안하기도 했다. 안개 주의 문자 메시지를 보면서 이 시를 떠올렸다. 안개가 심하거나 말거나 이젠 밤거리에 나갈 일이 없어서일까? 오래전 D시에 있을 때는 안개가 자주 끼었고 그럴 때마다 볼.. 2024. 1. 11.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후회 지난 23일,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텅 빈'(소엽)이란 에세이를 보았다. 곱게 비질을 해 둔 절 마당으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그 고운 마당을 다시 걸어 나오며 마음을 비우는 데는 빗자루도 필요 없다는 걸 생각했다는, 짧고도 아름다운 글이었다. 문득 일본의 어느 사찰에서 곱게 빗질을 한 흔적이 있는 마당을 보았던 일이 생각나더라는 댓글을 썼는데 그 끝에 조선의 문인 이양연의 시 '야설(野雪)'을 언급했더니 카페지기 설목(雪木)이 보고, 이미 알고 있는 시인 걸 확인하려고 그랬겠지만, 그 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쥐불놀이'라는 사람은, 카페 주인 설목이 견제할 때까지 저렇게 세 번에 걸쳐 나에게 '도전'을 해왔는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더욱 그래서 답을 할 .. 2023. 12. 26.
이 세상의 귀뚜라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덥긴 하지만 처서가 지난 주말이었다. 귀뚜라미는 가을이 왔다는 걸 귀신같이 안다. 2004년 9월, 십몇 년 간 세상에서 제일 번화한 광화문에서 근무하던 내가 용인 성복초등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그 9월은 가을이었다. 가을다웠다. 나뭇잎들은 화려했다. 그렇지만 그곳 가을은 조용하고 쓸쓸했다. 귀양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침에 교장실에 들어가니까 귀뚜라미가 울었다. 내가 멀리서 통근한다는 걸 엿들은 그 귀뚜라미가 설마 정시에 출근하겠나 싶었던지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귀뚜라미가 우네요?" 광화문 교육부 사무실에서 전쟁하듯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인데 그럴 수가 없어서 눈에 띄는 아무에게나 알려주었다.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기사가 들어오더니.. 2023. 9. 17.
"안단테 안단테 Andante Andante" 저물어 석양이 붉고 내일이 휴일이어서 차는 끝없이 밀리고 몸이 굳어버린 건 이미 한참 되었어도 주차해서 굳은 몸을 펴줄 만한 장소는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의 모든 음악"(93.1) DJ가 아바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나는 그 시절에 듣던 노래들의 가사를 번역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흥얼거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무슨 노래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뭘 알겠나?') 나는 세월도 그렇게 흘려보냈습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다 망쳐놓았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힙니다. 노래를 들으며 E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낸 P를 생각합니다. Take it easy with me please Touch me gently like a summer evening breeze Take your time mak.. 2023. 8. 15.
"HAPPY DAY,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지난달에는 보건소를 찾아가 PCR 검사를 받아야 했고, 5일간 병원을 드나들었고, 검사 때문에 7일간 음식 제한을 받았다. 와중에 어느 진료실 출입구가 저렇게 디자인되어 있는 걸 보고 고마워했다. 이번 달에는 딱 두 번만 다녀왔고, 이제 한 번만 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아내에겐 미안하고 쑥스럽지만 나는 지금은 씩씩하다! 지난번에 다짐한 대로 지금 이 시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2023. 8. 9.
세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텔레비전에서 오십 대 중반의 연예인들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나를 모르지만, 나는 자주 그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일 때도 있습니다. 어제는 더 젊은 연예인들이 그들 오십 대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득 저 오십 대 중반 연예인들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을 시작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곧,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걸 느끼게 되고 내일, 그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갔구나, 뒤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은 일흔에도 자식을 가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한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든아흔에도 열정으로 살아가는 몇몇 유능한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은 성근 체에 담긴 고운 모래처럼 혹은 결국 긴 시간을.. 2023. 8. 3.
꽃이 진 자리 한때 파란 꽃이 더 많던 자리에 흰 꽃이 늘어나 주종(主種)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돌보지 않았던 저곳의 저 꽃들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저버린 곳에 지금은 다른 종류의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가을 끝 무렵 그 풀들도 시름시름 앓다가 가버리고 다시 두어 가지 풀들이 새로 자리를 잡아 겨우내 근근이 혹은 꿋꿋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 꽃들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저 꽃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긴 세월에 비하면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진 않다고 거의 다 지나갔다고 이야기해주려고 했었을지도 모릅니다. 2023. 8. 1.
몸이 불편한 날 마음이 불편한 날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지니까 몸의 실체가 실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여기가 탈이 나서 조정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기가 불거진다. 불편해할 순서를 정해놓았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두더지 게임기 같다고 자신을 비웃는다. 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단 한 사람에게만 미안하다. 표를 내지 않으면 좋겠는데 숨 쉬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어떤 달에는 미리 정해진 일정만 해도 일주일에 이틀씩 병원행(行)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를 땐 학교에 다녔고, 그다음의 아주 조금 알 만한 시기엔 직장에 다녔고, 퇴임해서는 병원에 다니고 있다. 마음이 불편하면 순간 몸도 가라앉는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은 점점 잦아지고 있다. 떨쳐버려야지, 일어나야.. 2023.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