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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282

가을에 돌아왔네 나는 돌아왔다. 내가 꾸민 나 말고 남이 꾸며준 나 말고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늦게나마 다행한 일이 아닌가. 다시 꾸밀 수가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다시 꾸며줄 이도 없는, 마침내 여기 서성이고 있는 나 말고는 다른 내가 없다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2022. 10. 23.
노인들은 왜 조롱을 받을까? '노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을 읽으며 신화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되었을지 궁금했습니다(흔히 신화에서 근원을 찾지 않습니까?). 제우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의 시대를 지배했던 티탄족과의 초기 전투에서 승리해 권위를 얻었다. 크로노스는 자기의 모든 자식들을 삼켜버렸으나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는 제우스를 돌과 바꿔서 그를 구했고,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메티스를 삼켜서 한 몸에 힘과 지혜를 지니게 되었다. 제우스의 실용적 능력은 유명했으며 전혀 틀림이 없었고, 그의 판결은 비평의 여지가 없었다.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정의의 황금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 2022. 10. 10.
인생은, 두서없이 삭제되어 가는 기억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②)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도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할, 노인이 보기에 비참한 내용이지만 베게트에게서도 "종말의 비참한 쇠락을 통한 삶에 대한 비판"(보부아르)을 발견한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썼다.(298~299) 〈승부의 끝 Fin de partie〉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쓰레기통에서 쓰레기통으로 전전하며 지나간 행복과 사랑을 언급하다가 모든 사랑과 모든 행복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영화 La Dernière〉와 〈아! 아름다운 날들이여! Ah! les beaux jours!〉에서 잔인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기억의 풍화 작용, 우리 뒤에 남은 우리의 모든 삶의 풍화 작용이다. 추억은 두서없이 삭제되고 파손된 채로 생소.. 2022. 10. 4.
구월과 시월의 사이·차이 낮에 돌아와 점심을 먹으며 아내가 거실 달력을 넘겨놓은 걸 봤다. 내가 9월 30일에 떠나서 오늘 돌아왔으니까 그 생각을 못했던 거지. 달력 넘기고 메모해 놓는 건 으레 내가 해온 일이었는데... 아, 이제 보니 내 방 탁상달력은 아직 구월이네? 지난 금요일엔 구월이었지. 그새 달라지다니... 구월 달력을 그대로 둘 순 없겠지? 구월엔 아쉽지만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있었는데... 그대로 두어도 좋다면 나는 늦여름에 사는 것이고 구월 속에 살아가는 것인데... 일기예보를 들어보면 곧잘 늦더위로 기온이 29℃까지 오르는 곳도 있다고 했는데... 그런 현상을 기대하긴 다 틀린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었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겠지? 비까지 내리네. 추적추적... 기온이 .. 2022. 10. 2.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리기 교사들의 승진 길은 교감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더러 시험을 봐서 장학사나 교육연구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건 승진이 아니고 직을 바꾸는 '전직'입니다. 장학사를 밤낮없이 '죽어라!' 하고 나서 교감이 되어 학교로 돌아가게 되면 이번에도 승진이 아니고 전직입니다. 1980~1990년대에도 승진하기가 꽤나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경력 점수를 다 채운 교사들 중에는 주임(지금의 부장) 점수를 채우려고 혹은 근무성적을 잘 받으려고 교감 교장에게 쩔쩔매면서 살기도 했는데,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답설재 선생님~ 저는 그런 점수는 다 채웠는데 연구 점수가 모자랍니다. 교육연구라면 답설재 선생님이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어떻게 좀 선처를 구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잘 .. 2022. 10. 1.
영혼 ③ 고양이네 가족 내가 포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동안 고양이 일가족 세 명(?)이 놀다가 갔습니다. 저 가족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있고 저 가족에게는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건 무엇입니까? 우애? 모정? 사랑? 영혼? 글쎄요... 2022. 9. 20.
잘도 오는 가을 뭘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다. 단 한 번도 제때 오지 않고 난데없이 나타나곤 했다. 기온이 아직은 30도를 오르내리는데 시골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물들여버렸다. 결국 올해도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식이면 누가 어디에 대고 어떻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의를 할 수 있겠는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따르기가 싫다. 2022. 9. 18.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연인이었다고 해서 좀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엄청난 작가였다. 노인 문제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단지 지배 계급들 내부에서만 제기되며(게다가 남자들), 19세기까지 '늙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노인들이 많지도 않았다.(121) 노년은 비참한 것이다. 노년에 대해 위안을 받기보다는 낙심을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수두룩했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라고나 할까?(152~15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50세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에 달해야만 '프레노시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노시스란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신중한 지혜로, 체험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어서 .. 2022. 9. 15.
영혼 ② 저 소 눈빛 좀 봐 내가 축사 앞에 서면 쳐다보기도 하고 설설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듯한 표정입니다. - 왜 들여다봐? - 심심한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생각해? - 거기 축사 안에서만 평생을 지내다가 가니까. (도살장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어렵다. 저들도 안다.) - 너희 인간들은 달라? 갇혀 살지 않아? - 글쎄, 우리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잖아. 달나라에도 가잖아. - 그게 대단해? 속담에도 있잖아. 오십 보 백 보... - 오십 보 백 보...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네. 나는 저 어미소와 아기 소(송아지)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저리도 다정할까요? 저 앉음새의 사랑 속에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겠지요? 나는 축사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2022. 9. 11.
백석 「흰밤」 백석 / 흰밤 녯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2) 그야말로 가을밤, 추석입니다. 온갖 것 괜찮고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듯 오늘도 낮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자 16년째 쌓이던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그렇게 되었는지 오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나는 내가 없는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습니다.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 2022. 9. 9.
영혼 ① 빵집 앞 강아지 빵집 앞에서 저 강아지가 네 박자로 짖고 있었습니다.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 나는 빵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저 모습을 보았는데 강아지는 빵집을 향해 똑바로 서서 네 박자씩 줄기차게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유모차 안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 이 강아지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짖고 있을까? - 자신이 주인보다 윗길이라고 여기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걸까?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당장 나오지 않고!" - 아니면? 애원조로? '제발 빨리 좀 나오세요. 부탁이에요~ 초조해 죽겠어요. ㅜㅜ'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짖는 모습이나 그 목청으로 보면 아무래도 "들어간 .. 2022. 9. 8.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붓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 2022. 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