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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개망초 향기 "요즘도 많이 바쁘죠?" 그렇게 물으면 되겠지, 생각하며 며칠을 지냈다. 누구에게든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더니 이젠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전화가 왔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면 수다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두며 대체로 묻는 것에만 대답했다. 너무 서둘러 끊었나? 섭섭해할까 싶어서 개망초 사진을 보내주었다. 답이 없다. ... 바쁘긴 바쁜가 보다. 밤 9시 24분, 잊고 있었는데 답이 왔다. 다섯 시간 만이었다. 저쪽 : 꿀 냄새만 나는 게 아닌걸요~ 개 망할 풀 왜 이리 이뻐요!? 나 : 밭 임자가 의사인데 많이 바쁘겠지요, 지난해 심은 대추나무가 다 죽어 그 혼이 개망초꽃으로 피어나서 그래요 ^^ 저쪽 : 선생님, 눈물 나려고 해요 ㅠㅠ 나 : 아! 이런!!! .. 2023. 7. 4.
나이듦 :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려던 의지가 부질없어 보인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은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聖位)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3. 6. 27.
집도 잊고 가는 길도 잃어버린 상중(湘中)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노인 상중(湘中)은 상수(湘水)가 넘쳐서 군산(君山)이 물에 잠긴 것도 몰랐고, 황로(黃老 : 노자를 시조로 하는 학문)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가 집으로 가는 파릉(巴陵) 길마저 잃어버렸다고 한다. 일본인들을 책을 많이들 읽는데 우리는 일 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책 읽는 걸 싫어하고 아예 책 읽는 사람마저 싫어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 책을 읽지 않아도 좋지만, 어쩔 수 없지만 책 읽는 사람을 미워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책이 없으면 나는 오래전에 미쳤을 것 같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 특별하지는 않다. 어려운 것만 싫어한다. 몇 살 되지도 않은 작자가 도통한 사람처럼 가르치려 든 책도 혐오한다. 가령 몇 살 되지도 않은 작자가 특별한 경험도.. 2023. 6. 18.
내 친구 연우 연우(連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사라진 지 20년은 되었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들 했습니다. 연우는 대학 다닐 때 시를 썼습니다. 학보사 주최 문예행사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나는 소설을 냈는데 소설을 낸 학생은 나뿐이었습니다. 연우나 나나 이 년째 거듭 수상을 했습니다. 나는 대안극장 바로 뒷골목 오른쪽 셋째 집이었던가, 괄괄하고 털털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거처를 정해놓고 하루 한두 끼 밥을 먹고 잠을 잤는데 어느 날 누군가 연우와 함께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방 학생들과 달리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으면 할머니는 다짜고짜 문을 열어 붙이고 들어와서 이불을 마루로 내던지며 "밥이나 먹고 또 자든지 하라!"며 고함을 지르곤 했는데 나는 .. 2023. 6. 16.
늙은이의 진부한 노래 세상에서 이미 잊힌 늙은이가 자기가 할 일 없으니 남도 그럴 거라고 착각하고 한창 바쁜 사람에게 옛날풍의 진부한 노래를 읊어 보내는 것도 썰렁한 일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에 데이시 중궁의 여방으로 발탁된 재녀 세이쇼나곤의 《베갯머리 서책(枕草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도 더러 그렇게 말은 했지만(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늘 바쁘다고, 이쪽에서 그들에게 연락해서는 안 된다고) 정말 그런 줄은(옛날풍의 진부한 노래를 읊듯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것 아닌가 싶다. 나는 아직 저승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 이승 사람도 아니다. 명심해야 한다. 그런 줄 알면 될 것이다. 2023. 6. 10.
이곳에 오면 이를 데 없이 적막하다. 그 적막을 참고, 지난날들을 그리워한다. 그 시간이 좋다. 이제 다 괜찮아지고 있다. 2023. 4. 23.
눈 깜짝할 사이 나는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 있다. 이런 순간들이 반복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럴 때마다 내 정신은 아득한 곳에 머물다가 돌아온 듯하다. 방금 어제저녁의 양치질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돌연 오늘 저녁의 양치질을 하고 있다. 나는 공간과 시간을, 그 변화와 흐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건 결국 서글픔이겠지만 흥미롭기도 하고 이런 경험에 대한 감사함도 있다. 2023. 4. 11.
지옥 예습 "너 그러다 지옥 간다" '나는 아무래도 지옥이나 가겠지?' 할 때의 지옥은 어떤 곳인지 어디에 공식적·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밝혀놓은 곳은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살아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악한 귀신이 되어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고통이 정말 막심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감옥에 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뿐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상)에서 지옥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았다. 딴에는 사람들이 치를 떨도록 하려고 온갖 짐승들의 모습을 총동원해서 지옥에 간 인간을 괴롭히는 장면을 설정했는데 나는 이 장면을 다 읽고 나서도 '아! 이건 정말 무서운데?' 하고 치를 떨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누가 진짜 극도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지옥을 그.. 2022. 12. 9.
어려운 곳에서 저 어려운 곳에서 해마다 가능한 한 많은 열매를 달고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2022. 12. 7.
그리운 지하주차장 "지하주차장은 자주 이용하지만 항상 썰렁하고 적막한 느낌이 드는 공간입니다. 음악이 있는 곳은 안정감이 있고, 편안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 주차장에도 음악 방송을 송출하여 하루를 여는 아침에는 희망과 즐거움을,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에는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를 녹여주는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음악방송 소리가 크거나, 드물게 세대에 송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선로의 문제로 생활지원센터로 연락하여 주시면 점검 및 소리를 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파트 출입구 게시판에서 이 공고문을 보았습니다. 아침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며 누군가 크게 털어놓은 음악을 들으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싶었는데('에이, 미친놈...') 이래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삼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허구한 날 늦.. 2022. 12. 6.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새해 준비 11월 하순에 접어듭니다. 단풍은 남아 있습니다. 눈 남은 건 잔설(殘雪)이라고 하던데 단풍 남은 건 뭘까요? 가로수에 꼬마 점멸 전구들(은하수 전구?)을 매달고 있습니다. 별처럼 반짝이겠지요. 나는 올해도 이렇다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세월을 따라왔습니다. 점검하고 반성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내년이라고 뭐가 달라질 리도 없습니다. 자주 초조해지기만 합니다. 별일 없으면 다행인 줄 알며 지내려고 합니다. 2022.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