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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우리가 떠난 후에도 제자리에 남아

by 답설재 2024. 5. 17.

 

 

 

거실 창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저 나지막한 산은 규모는 그저 그래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기상은 믿음직합니다.

새잎이 돋아난 연둣빛이 수줍은 듯 곱던 날들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녹음에 싸여 저기 어디쯤 들어가 있으면 누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을까 싶고, 몇몇 산짐승이나 새들, 온갖 벌레들이 한동안 마음 놓고 지낼 듯해서 더 푸르러라, 아주 뒤덮어버려라,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걸핏하면 괴롭히지 않습니까?

매연도 그렇지만 저렇게 좋은 산을 야금야금 파먹어버립니다. 이래저래 가만두질 않습니다. 하루하루의 변화가 그들에게는 결코 이로울 게 없는데도 자연은 웬만하면 그 상처를 스스로 덮어버리고 우리가 잘라버리지 않는 한 언제나 저 자리를 지키면서 저 싱그러움, 푸르름으로 눈길을 끌어주고, 내가 그걸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그저 쑥스럽고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를 자신들이 마신다지 않습니까? 

 

 

우리가 떠난 후에도 식물은 제자리에 남아 우리가 남긴 그 모든 혼란을 수용하지 않는가.

식물이 아주 미묘하고 화학적으로 복잡한 생존 방식을 진화시켜야 했던 것은 바로 한 곳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다른 어디로도 가지 않은 채로 먹고 자라고 번식하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므로, 반드시 아주 가까운 주변 환경에 대해 대단히 잘 알아야만 한다.

 

 

《우아한 우주》(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라는 책에 그렇게 적혀 있는 걸 봤습니다('식물이 더 잘해 PLANTS BEHAVE BETTER').

 

나무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살면서 어떤 생존 방식을 진화시켜 왔을까요?

나무들은 주변 환경에 대해 대단히 잘 알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먹고 자라고 번식하고 스스로를 방어한다?

글쎄요, 주변의 다른 나무들이나 풀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걸까요? 사람들처럼 힘센 나무가 힘없는 나무를 지배하면서? 힘없는 나무를 못살게 하고 모욕을 주고 괄시하고 홀대하고 죽여버리고 하면서? 서로서로 속이고 배반하고 하면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는 개미들이나 벌레들은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라도 좀 주는 걸까요?

 

이런 봄밤에 나무들은 어디 좀 다녀오고 싶진 않을까요?

외롭고 쓸쓸하고 해서 울고 싶을 때는 없을까요?

속시원히 털어놓고 말하고 싶은 건 없을까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일까요?

 

 

할머니가 고집을 피울 때 엄마가 '나무를 흔들러 간다'는 말을 했기 때문일까? 이제 할머니를 보니 다른 나무들에서 멀리 떨어져 작은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처량한 늙은 떡갈나무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무들도 어떤 의미에서 몸은 딱딱한 껍질 속에 갇히고 발은 땅에 푹 박힌 채 멀리 가고 싶어도 차마 가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희한한 생각 속에 잠기게 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누가 마음 가는 대로 훌쩍 떠나 버릴 수 있겠는가?

- 가브리엘 루아 《전지전능한 할머니가 죽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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