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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80

주요한 「복사꽃이 피면」 복사꽃이 피면가슴 아프다속생각 너무나한없음으로    그러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복사꽃은 또 피겠지. 2025. 3. 2.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김원길 「착한 스토커」 저녁 내내 안동 사는 김원길 시인의 시집 《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지내는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년에 자주 가는 식당 종업원으로부터 시 한 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던가 해서 "내가 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한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더러 노망이 나서 분명한 신변잡기를 행만 나누어 시라고 발표해서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늘그막에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경우로 김 시인도 그런 경우인가 기대를 갖고 있다. 시집 《덤》에는 인류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2025. 2. 13.
김춘수 「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울타리는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철마다 피곤소리없이 저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외롭게 햇살은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歲月은 흘러만 가고꿈결같이 사람들은살다 죽었다.   오늘의 詩人叢書《金春洙詩選 處容》민음사 1974.      하루가 잘도 간다.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나도 지금 그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조금 전 일어난 것 같은데 밤이 깊었다.어제와 오늘, 내일이 한데 딱 들어붙어 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나는 곧 아침의 양치질을 하면서 이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주제넘게 '웬 제목이 不在일까' 하다가 不在보다 확실한 제목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생각해보면 내가 지나다닌 바로 그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 2025. 2. 8.
김복희 「새 입장」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2025. 1. 13.
정지용 「비로봉毘盧峰2」 담장이물 들고,​다람쥐 꼬리숱이 짙다.​산맥 우의가을ㅅ길―​이마바르히해도 향그롭어​지팽이자진 마짐​흰들이우놋다.​백화白樺 홀홀허울 벗고,​꽃 옆에 자고이는 구름,​바람에아시우다.​​​    2022년 8월에『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보았다. 유종호 에세이 「어떻게 키웠는데―자작나무와 엄마 부대」에 소개되었는데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설해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시의 단어 하나하나, 각 행 혹은 전체적인 내용을 묻는 시험을 본다면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웬만한 사정이면 시를 찾아 읽는다고 읽어왔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하나.그렇지만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다.읽을 때마다 가슴속으로 들어와 일렁이는 가을빛이 좋았다. 시조차 신문기사 해석하듯이 해석하려는 시험문제 출제자가 보면 나는 한심한 사람일 것이다.. 2024. 12. 23.
안미옥 「미래 세계」 미래 세계  안미옥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2024. 12. 2.
윤동주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윤동주(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조경주 그림/만화, 신형건 엮음, 푸른책들 2016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 2024. 9. 24.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 2024. 9. 21.
이신율리 「안개의 노래」 안개의 노래​  이신율리   풀이 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안개가 태어난다멜로디와 발굽을 감춘 세계가 돋아난다​이곳은 풀밭이 뛰어다니거나발굽을 잃어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엎드린 저녁은 기도를 모르지풀밭을 덮는 폭설을 모르지​양의 기분은 묻지 않는다멀리 있는 평안을 바라봐야 하니까​양의 목소리를 닮기 위해뒤꿈치를 들고 여러 번 마른풀을 읽고 지나간다​양 너머에서 안개의 노래가 깊어진다​여럿이서 혼자가 되는 안개의 시간양 한 마리 겨우 들어갈 만큼 좁거나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곳에서출렁거리는 양 떼처럼 노래를 부른다​조금 있으면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어제 날아온 새가 다시 날아올 것이다뛰어다니던 풀밭은 풀밭으로잃어버린 발굽은 무너지지 않는 발굽으로​고요한 양은 없어흰 양이 태어나겠지​잡히지 않는 성자의 .. 2024. 9. 9.
안미린 「희소 미래 1」 「희소 미래 2」 희소 미래      1  유사 지구입니다 희소 생물입니다 심우주에서 온크리처입니다 수없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누구였을까 우리의 집에 행성이 충돌하는 일은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희고 부드럽게맑은 우주를 흘러 다닐 뿐입니다 웃고 있을까 어젯밤 무인 우주선에눈과 입을 그려준 사람   희소 미래      2  너희는 희소 생물에게 이름을 불러준다 먼 외계에게작고 투명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복슬 눈사람 인형에게눈의 기억을 들려준다 흰 청력의눈사람 언어를 영영 알 수 없지만 너희는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에미래를 주저하고 첫 발자국을 거둔다 흰 눈이 지켜지는 동안 이곳은 흰 심장과 하얀 폐를 숨긴 환한 행성이었다   ..................................... 2024. 8. 18.
나의 '詩 읽은 이야기' "현대문학" 8월호 차례를 봤더니 이런 시가 실렸다.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고명재  오징어입 버터구이김승일  알리는 말씀박연준  오종종한 슬픔유수연  시간이 없다 말한 너와 겨우 만났지만 날 싫어하는 것 같고 헤어진 후에 가슴 가득 노을이 차는 것 같을 때이    훤  포토그래프임승유  소꿉최지은  겨울에서 겨울까지  가슴을 적실 것 같은 시, 재미있을 것 같은 시, 즐거움을 줄 것 같은 시, 그래! 이런 생각도 있지 싶을 시, 지금까지 말해지지 않았던 인간의 어떤 면모를 노출했을 것 같은 시, 지난 세월을 스스로 말할 줄 모르는 나를 변명해 줄 것 같은 시... 그런 시들이겠지, 그런 기대를 가졌다.예감대로일 시가 있을 수도 있고, 단 한 편도 그렇지 않아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그건 시 자체 때문.. 2024.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