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83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김동훈 옮김, 마티 2009 제2부 제1절 숭고에 의해 유발되는 감정에 관하여자연 속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숭고한 사물이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감정은 경악(astonishment)이다. 경악은 우리 영혼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를 말하는데, 거기에는 약간의 공포가 수반된다. 이 경우 우리의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어떤 대상도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그 대상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숭고의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숭고는 이성적 추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앞질러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숭고의 효과 중에서 .. 2025. 4. 7. 김복희 「밤비에 자란 사람」 도깨비는 노래 좋아하고 빛나는 것 좋아하고 수수팥떡을 좋아해 도깨비는 힘이 장사고 긴 밤이든 짧은 밤이든 노는 것이 좋아 씨름 잘하는 둥근 어깨를 가졌을 것만 같아요 말라깽이 도깨비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타령 시작하자마자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는 도깨비 지나갑니다 지나갑니다심심하면 나랑 씨름합시다가방 추슬러 올리며 도깨비 휘청 말라 고속버스터미널 유리문 어깨로 밀며 야윈 나뭇잎과 마른 잔디 사이로 지나갑니다 가방만 보이는 것 같다 방심하지 마세요 도깨비 대신 말해주고 싶네요 지나갑니다 계절 지나갑니다 이대로 떠나기에 마음 요란해계절 바뀔 때더 아픈 사람들,아프면 많이 바쁠 텐데요 도깨비도 바빠요 막걸리 좋아하고 먹성도 좋아전국 방방곡곡 안 가는 곳 없이 돌아다닙니다 지나갑니다아픈 .. 2025. 3. 24. 임선기 「파랑돌」 파랑돌은 파란 돌이 아닌데파란 돌이라는 말도 듣지만파랑돌은 파란 돌이 아니라고 부인할 필요는 없다사실 파랑돌은 무용舞踊이지만더 사실은 메아리이기 때문이고더 사실은 파랑돌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임선기 1968년 인천 출생. 1994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호주머니 속의 시』『꽃과 꽃이 흔들린다』 『항구에 내리는 겨울 소식』 『거의 블루』 『피아노로 가는 눈밭』 등.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나는 그 '파랑돌'이라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 보고 이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나는 그 '파랑돌'이라는 것을 혹 내 아내가 아닐까 생각해보고 시를 다시 읽어보았다.그러다가 나는 그 '파랑돌'을 예전에 내가.. 2025. 3. 19. 주요한 「복사꽃이 피면」 복사꽃이 피면가슴 아프다속생각 너무나한없음으로 그러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복사꽃은 또 피겠지. 2025. 3. 2.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김원길 「착한 스토커」 저녁 내내 안동 사는 김원길 시인의 시집 《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지내는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년에 자주 가는 식당 종업원으로부터 시 한 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던가 해서 "내가 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한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더러 노망이 나서 분명한 신변잡기를 행만 나누어 시라고 발표해서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늘그막에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경우로 김 시인도 그런 경우인가 기대를 갖고 있다. 시집 《덤》에는 인류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2025. 2. 13. 김춘수 「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울타리는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철마다 피곤소리없이 저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외롭게 햇살은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歲月은 흘러만 가고꿈결같이 사람들은살다 죽었다. 오늘의 詩人叢書《金春洙詩選 處容》민음사 1974. 하루가 잘도 간다.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나도 지금 그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조금 전 일어난 것 같은데 밤이 깊었다.어제와 오늘, 내일이 한데 딱 들어붙어 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나는 곧 아침의 양치질을 하면서 이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주제넘게 '웬 제목이 不在일까' 하다가 不在보다 확실한 제목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생각해보면 내가 지나다닌 바로 그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 2025. 2. 8. 김복희 「새 입장」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2025. 1. 13. 정지용 「비로봉毘盧峰2」 담장이물 들고,다람쥐 꼬리숱이 짙다.산맥 우의가을ㅅ길―이마바르히해도 향그롭어지팽이자진 마짐흰들이우놋다.백화白樺 홀홀허울 벗고,꽃 옆에 자고이는 구름,바람에아시우다. 2022년 8월에『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보았다. 유종호 에세이 「어떻게 키웠는데―자작나무와 엄마 부대」에 소개되었는데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설해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시의 단어 하나하나, 각 행 혹은 전체적인 내용을 묻는 시험을 본다면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웬만한 사정이면 시를 찾아 읽는다고 읽어왔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하나.그렇지만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다.읽을 때마다 가슴속으로 들어와 일렁이는 가을빛이 좋았다. 시조차 신문기사 해석하듯이 해석하려는 시험문제 출제자가 보면 나는 한심한 사람일 것이다.. 2024. 12. 23. 안미옥 「미래 세계」 미래 세계 안미옥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2024. 12. 2. 윤동주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윤동주(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조경주 그림/만화, 신형건 엮음, 푸른책들 2016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 2024. 9. 24.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 2024. 9. 21. 이전 1 2 3 4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