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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2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2018(1987) 2019년 12월 26일 성탄절 이튿날 동네 서점에서 이 시집을 샀다. 1987년 3월 30일, 시인이 스물다섯 살 때 초판을 냈으니까 나는 33년 만에 마침내 이 시집을 산 것이다. 나는 시, 소설, 희곡, 수필처럼 버젓한 이름을 가진 글이 아닌 잡문이나 쓰며 지냈지만 33년 만에,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날 단 한 권이라도 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내게는 중차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식 키친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싱크대를 달고 가스렌지 설치하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부엌까지 끌어온 수도꼭지 삑삑 틀어 과일 씻어놓고 가스렌지 탁탁 켜 계란 구으니 .. 2023. 3. 28.
곽문영 「이름 없는 밴드」 이름 없는 밴드 곽문영 송년회를 앞두고 회사에 밴드 동호회가 생겼다 사원부터 국장까지 다양한 직급의 직원들이 모였다 학창시절 밴드부 활동을 했던 직원도 있었고 비틀스를 좋아해 혼자서 10년 넘게 기타를 연습해오신 차장님도 계셨다 직급도 부서도 서로 달라 그곳에서 처음 만난 직원들이 많았다 사내 동호회 설립 규정에 따라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총무까지 선출한 다음 곡을 정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직급도 중간쯤인 내가 총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밴드 이름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시작된 회의에서 누구도 선뜻 의견을 내지 않았고 우리는 일단 연습을 먼저 하기로 했다 합주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었다 송년회까지 합주를 여섯 번 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야근 때문에 늘 두세 명씩은 늦게 도착했다 낮 동.. 2023. 2. 27.
정나래 동시집 《뭐라고 했길래》 정나래 동시집 《뭐라고 했길래》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동시 정나래 동시 이새봄 그림, 아동문예 2022 코코!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복잡한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동시 한 편 보여줄게요. 밤나무 혼자 사는 할머니 밤사이 잘 주무셨나 궁금해하던 밤나무가 뒷마당에 알밤 몇 개 던져 보았습니다 날이 밝자 지팡이 짚은 할머니가 바가지를 들고 나옵니다 안심한 밤나무는 다음 날에 던질 알밤을 또 열심히 준비합니다. 코코는 어떻게 생각해요? 난 동시 쓰는 작가들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 작가 마음은 정말 알 길이 없다 싶었어요. 알밤이야 줍는 사람 마음이잖아요? 할머니가 일찍 일어나 줍든지, 누가 얼른 가서 줍고 자랑을 하든지 시치매를 떼든지, 하다못해 다람쥐가 한두 개 가져가든지, 그런 거잖아요? 그.. 2023. 2. 23.
문성란 동시집 《나비의 기도》 시·문성란 그림·손정민 《나비의 기도》 고래책빵 2022 문성란의 동시를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용한 시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세상은 지금 이 세상보다 넓고 크다. 조용히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행복하다. 둥근 말 힘겨루기하더라도 찌르지는 말자고 둥그렇게 구부린 사슴벌레의 뿔 씩씩거리며 덤벼들다가 나뒹굴고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다가가 겨루는 그 녀석들이 보고 싶다. 그 둥근 뿔이 보고 싶다. 정녕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일까... 사슴벌레를 보거든 아이들이라도 이 시를 떠올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라도?' 주제넘고 어처구니없지? 우리는 말고 아이들이라도? 친구가 좋으면 내 짝꿍 대구로 이사 간 뒤 "어데예―" "아니라예―" 대구 말이 들리면 내 귀는 쫑긋 장맛비 내리면 거.. 2023. 2. 20.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청색종이 2022 뛰어 옥수수를 갉아 먹다 물린 고라니가 절뚝이며 뛰어 그 뒤를 금동이가 컹컹컹 쫓으며 뛰어 나리가 금동아 이제 그만해 소리치며 뛰어 고라니가 강을 가로질러 뛰어 그 뒤를 소나기가 작고 하얀 발로 토도독 뛰어 금동이가 멈칫하더니 나리를 향해 뛰어 나리와 금동이가 집으로 뛰어 고라니가 휙, 돌아보더니 산의 품으로 뛰어 휴, 내 심장이 가만 있지 못하고 콩닥콩닥 뛰어 조영수의 동시는 소설 같다. 재미있다. 동시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 흔히 소설 속에서는 발견되는 그 진실이 진짜 세상에서는 너무 귀해서 조영수의 동시에서 그 진실을 보는 순간을 즐거워하며 읽는다. 시인에겐 시적 순간일까? 조영수의 동시 속에는 그런 순간들이 꼭꼭 들어 있다. 숨구멍 교실 환경판에 .. 2023. 2. 17.
유희경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유희경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 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파가 교란될 때 들리는 소리. 예민해진 탓이야, 중얼거리고 k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k는 책을 내려놓고 꼼꼼하게 책상 위 모든 물건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무언가 있어 여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k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무언가 들어간 게 아닐까. 책장을 털어보고 냄새도 보다가 마침내 48쪽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비어 .. 2022. 12. 17.
김언희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시겠습니까? 김언희 ......쪄 죽일 듯이 더운 날이었어, 언니, 피팔나무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어, 담장 위에서 힐끔힐끔 따라 걷던 원숭이가 일순 내 눈길을 낚아챘어, 언니, 적갈색 눈알로 나를 훑었어, 훑으면서 벗겼어, 나를, 바나나를 벗기듯이, 나는, 정수리부터 벗겨졌어, 언니, 활씬 벗겨졌어, 뼛속까지 벗겨졌어, 놈은, 수음을 하기 시작했어, 내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보란 듯이 나를, 따먹기 시작했어, 언니, 숨이 헉, 막히는 대낮에, 광장 한복판에, 나, 홀로 알몸이었어,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알몸이었어, 언니, 담벼락 그늘에 죽치고 앉았던 사내들이 누렇게 이빨들을 드러내며 웃었어, 눈 속의 원숭이 똥구멍, 졸밋거리는 똥구멍들을 감추지 않았어, 나는, ................. 2022. 12. 8.
이신율리 「달팽이의 비문증」 달팽이의 비문증 이신율리 나비가 바다를 끄는 암초 숲을 지나고 있어 동공에 쌓은 오래된 질문, 왼돌이 달팽이의 등은 바람을 만들지도 몰라 이마를 짚어주는 더듬이 달팽이가 밟으면 가장 얇은 소리가 난다는 길을 비켜가지 길이 생겨나고 있어 물방울 계단을 허물지 않고서도 구름처럼 입 꾹 다물고 맨살을 내어줄 수 있는 이유 주근깨 돋는 한낮은 안개꽃 천지야 동공 속 이야기를 지고 두더지는 파밭을 언제 다 지나가나 눈 뜨고 자는 밤엔 이 밤부터 내일까지 비가 올지도 몰라 크고 둥근 뼈를 그려보거나 처음 들었던 빗방울 소리를 떠올리면 뿔이 쑤욱 자라서 느리게 넘기는 페이지는 왜 그렇게 질문이 많은지 살만한 이유에 물기 돌면 풋살구 같은 신 벗고 바다를 향해 꿈쩍꿈쩍 나아가지 물결처럼 팽이를 감고 질문인 것처럼 문을.. 2022. 12. 2.
민구 「걷기 예찬」 걷기 예찬 민구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제중 조절, 심장 기능 강화, 사색, 스트레스 해소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걷기란 갖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는 만 오천 보 정도 이동해서 한강공원에 나를 유기했다 누군가 목격하기 전에 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 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졌다 머리는 퐁당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붙어 있었고 나는 잔소리에 시달려서 한숨도 못 잤다 걷기란 나를 한 발짝씩 떠밀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 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더 가까워지리란 믿음이 있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걷기를 예찬했다 그런 날에는 밤 산책을 나가서 더 멀리 더 오래 혼자 걸었다.. 2022. 11. 27.
박남원 시인의 산문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시인의 집》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박 시인은 지난해 여름 시인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제 시를 다소 과하게 칭찬해주시면서 제 시집을 소개해 주셨는데 보답글 하나 없이 지내는 것도 무례라는 생각으로 몇 자 적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제 시 “내 안에 머물던 새”를 블로그에 올려주셨지요. 그런데 제 시 밑에 덧글로 적어 주셨던 지금까지 ‘상 받은 것도 없다는 시인’이라는 문구가 그때 이후 언제나 제 머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평소에 상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며 살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초등학교 2학년까지 우등상이나 개근상 몇 개 받은 것 빼고 이후로는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집 속에 “나에게 행복.. 2022. 11. 13.
문정희 「얼어붙은 발」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 2022. 11. 9.
류병숙 「물의 주머니」 물의 주머니 류병숙 개울물은 주머니를 가졌다. 물주름으로 만든 물결 주머니 안에는 달랑, 음표만 넣어 오늘도 여행간다. 가면서 얄랑얄랑 새어나오는 노래 물고기들에게 들꽃들에게 나누어주며 간다 얄랑얄랑 간다. -------------------------------------- *제72회 洛江詩祭 시선집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물결 주머니'를 가진 시인, 그 시인의 마음이 보고 싶었습니다. 시인에게나 그 누구에게나 시름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이 시를 읽는 동안은 괜찮아집니다. 읽은 글 굳이 다시 읽지 않는데 '물의 주머니'는 여전히 즐거워서 '얘기가 어떻게 이어졌지?' 다시 찾아 읽게 됩니다. 들꽃도 저버린 늦가을, 그래도 그 개울물 보러 가고 싶어집니다. 시인에게 이런 .. 2022.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