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74 김개미 「토끼 따위」 토끼 따위 김개미 어느 날 집에 가니 토끼가 있었다 아버지가 쳐놓은 철망 안에서 풀을 먹고 있었다 두 귀를 세우고 앉은 토끼는 빨간 눈알로 풀을 쏘아보며 쉬지 않고 풀을 먹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자리를 옮기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분명 책에서 만난 토끼는 달리기도 잘하고 늘어지게 낮잠도 자는 빠르고 태평한 강한 토끼였는데 우리 집 토끼는 너무 약해 보여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을 짓고 산대도 텃밭 앞에 토끼장 따위는 절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토끼를 기르면 토끼 때문에 언제가 되든 반드시 한 번은 토끼처럼 마음을 다치게 되니까 내가 동물을 기른다면 토끼보다 작고 토끼보다 영악한 동물을 기르고 싶었다 내게 속하는 것이 당하는 것보다 내가 당하는 게 나으니까 쉽게 죽.. 2023. 10. 11. 이신율리 「국화 봉고프러포즈」 국화 봉고프러포즈 이신율리 마드리드 산히네스에서 추로스를 먹던 아침, 터키석 하늘에 태엽을 감았지 몇 바퀴를 돌렸으면 팝콘이 터졌을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까 끈적이는 생각에서 발을 빼면 어두워지는 한 강가야 오리 가던 길 되돌아오고 강물 소리 맞춰 봉고 돌아오고 트렁크를 활짝 열었어 풍선이 떠오르는 하늘이 넘쳐났지 그녀는 프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초코라테 셔터를 눌렀지 펄 립글로스 없이도 사진 잘 받겠다고 오늘 거울은 마음에 든다고 추로스를 먹던 아침 총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새를 보고 네가 웃었던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애드벌룬이 둥둥 떠올랐지 너는 커다란 프릴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제라늄 화분이 자꾸 시든다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앵두 등을 켰어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볼륨 높였지 노란 .. 2023. 10. 5. 임승유 「세 사람」 세 사람 임승유 그녀는 모호를 알았고 모호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그 모호다. 그녀는 모호가 모자 캡 들어 올리는 방법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한번은 어떻게 들어 올리는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더 해보라고 했을 때 모호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몰랐고 그냥 구운 은행을 집어 먹는 수밖에. 모호가 시를 도대체 어떻게 완성하는 겁니까 물어봐서 글쎄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데려오는 것 같아요 말했다가 우와 문장이 문장을 데려온대 그렇지 멜로디가 다음 멜로디를 데려오는 거지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이후로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모호와 내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모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무의식중에 모자 캡을 들어 올렸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 2023. 8. 16. 이희형 「플랫폼」 플랫폼 이희형 나는 우산을 들고 승강장에 서 있습니다 오늘 저녁엔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곳엔 비가 오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눈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검정 장우산을 썼습니다 그게 어른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쌓이는 눈을 지켜보다가 전광판에 양쪽 열차가 모두 지연되고 있다는 알림이 뜬 것을 보았습니다 귓가에서 빗소리가 터지고 있습니다 반대편 승강장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갑과 목도리를 끼고 모두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 먼 곳에서 다가오는 열차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내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가오는 열차가 어느새 승강장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열차에 오릅니다 정해진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열차가 사라지.. 2023. 7. 23. 박두순 「친구에게」 친구에게 박두순 친구야 너는 나에게 별이다. 하늘 마을 산자락에 망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별들 그 사이의 한 송이 별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둘레에서 돋아나는 별자리 되어 내 마음 하늘 환히 밝히는 넌 기쁠 때도 별이다. 슬플 때도 별이다. 친구야 네가 사랑스러울 땐 사랑스런 만큼 별이 돋고 네가 미울 땐 미운 만큼 별이 돋았다. 친구야 숨길수록 빛을 내는 너는 어둔 밤에 별로 떠 내가 밝아진다. ................................................................. 그 망초꽃은 어떤 모습일까. 저 중에 닮은 것이 있지 않을까. 2023. 6. 28. '기차는 8시에 떠나네' ① 그대 귀 뒤의 카네이션 ② 도시 어린이의 꿈 ③ 우체부 ④ 5월의 어느 날 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⑥ 당신이 마실 장미 향수를 주겠네 ⑦ 오토가 왕이었을 때 ⑧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⑨ 뱃노래 ⑩ 떠나버린 열차 ⑪ 내 마음속의 공주 오페라 『카르멘』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아그네스 발차의 CD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내 친숙하고 편안했습니다. 그리스가 터키와 독일의 침략을 받았을 때부터 불렸다는 설명대로 우수어린 노래들이었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했다는 건 아그네스 발차의 음색이 결코 부드럽진 않은 것 같은데도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으로, 한동안 차를 갖고 나가게 되면 꼭 그 CD를 들었습니다. 위안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노래들을 들으면.. 2023. 6. 14. 이설야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이설야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트라파니 소금이 바람과 함께 도착했다. 시칠리아 염전의 염부들 혈관엔 붉은 피 대신 소금이 흐른다지. 근해에 나갔던 시칠리아 염부들 혈관엔 물고기들이 헤엄쳐 온 푸른 파도와 흰 포말이 켜켜이 피어오르겠지. 조개무덤에서 나온 패각 조각이 산산조각 난 채 수억 년 빛나던 해파리들의 춤을 추겠지. 혓바닥을 감은 미역귀들의 노래, 천천히 듣다 사라져 간 시간들도 함께 흐르겠지. 토마토와 양파를 기르는 농부들 혈관에는 붉은 흙에 떨어지던 땀방울, 바람에 씻기던 땀방울이 소금 되어 흐르겠지. 검은 후춧가루와 흰 후춧가루가 흐를지도 몰라. 노을처럼 번지는 슬픔의 가루들로 식탁은 튼튼한 다리들을 키우겠지. 원형극장을 짓기 위해 바위를 깎고 돌을 나르고 동굴을 파던 .. 2023. 6. 6. 장정일 「하나뿐인 사람」 하나뿐인 사람 장정일 머리는 까마귀 귀는 토끼 눈은 사슴 눈썹은 강아지 코는 고양이 입술은 앵무새 혀는 낙지 이빨은 상어 뺨은 백조 목은 기린 가슴은 여우 젖꼭지는 무당벌레 겨드랑이는 닭 어깨는 펭귄 두 팔은 원숭이 손은 비둘기 손톱은 두더쥐 허리는 뱀 배꼽은 다슬기 엉덩이는 말 허벅지는 캥거루 종아리는 치타 발목은 두루미 발은 연어 발가락은 미꾸라지 발톱은 양 항문은 거미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 2019) "말놀이를 한 시는 그만 좀 보고 싶다!" 그런 댓글을 여러 번 썼다. 역겨워서 그냥 지나올 수가 없었다. 이 시를 보고는 그런 말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간단치 않다. 2023. 5. 31. 조용우 「나의 슬픔 기쁨 절망의 시인」 나의 슬픔 기쁨 절망의 시인 조용우 당신에게 당신의 시인이 있어 그는 슬픔의 시인도 기쁨의 시인도 아니라 그의 시를 읽으면 당신의 봄밤에 눈이 내리고 눈의 끝을 눈의 끝에 남은 이름들을 기억해 반복되는 이름들을 기억해 눈이 내리는 그의 시의 바깥으로 날아가는 물수리를 기억해 당신이 빠져 있는 혼곤한 잠의 수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수리를 기억해 땀이 많이 나는구나 마을로 가 사람을 불러오마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당신은 물 위를 돌고 있는 물수리들을 보아 물수리가 바위틈에 감춰 둔 송어를 기억해 결코 당신 것이 아닌 작은 송어들을 기억해 다시 정지비행 물수리의 여름 하늘 당신의 시인이 끊어낸 여름 하늘 쉽게 잘려나가는 절망을 만져봐 당신 몫의 절망 바닷물에 절여진 절망을 기억해 당신 절망은 축축해 당.. 2023. 5. 9. 유미희 「강」 언 강이 녹는다 이쪽 산에 사는 고라니가 저쪽 산에 사는 멧토끼가 겨우내 건너던 얼음 다리 봄볕이 철거작업 중이다 천천히 지름길이 사라진다. 세상에 봄이 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동시작가 작품 중에는 아이들 흉내를 낸 것들이 있습니다. 장난 같고 심지어 같잖기도 합니다. 괜히 짜증도 나고, 이러니까 성인들은 물론 아이들로부터도 외면받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그냥 놔두면 되겠지만 혹 좋은 작품이 없을까 싶어서 또 살피게 되는데 그러다가 작가 작품다운 작품을 발견하면 '봐!' 하게 됩니다. 유미희는 어떤 작가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를 주로 쓰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내가 본 동시」에 나무늘보라는 분이 실어놓은 이 작품을 봤습니다. 올봄.. 2023. 5. 2. 장정일 「저수지」 저수지 장정일 마을 앞 손바닥만 한 못에서 개헤엄을 치던 여름방학 때의 어느 날, 동네 형들과 이웃 마을 저수지로 원정을 갔다. 형들이 긴 나뭇가지로 길 옆에 난 수풀을 휙휙 치면, 조무래기들도 따라서 작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저수지로 가는 길가에 드문드문 가지밭이 있었다. 형들은 햇빛에 익어 뜨끈뜨끈해진 가지를 베어 물었다. 형들이 "맛있다"고 우물거리면 조무래기들도 "맛있다"고 조잘거렸다. 형들이 "아, 맛없어" 하며 등 너머로 반쯤 베어 문 가지를 내어 던지면, 조무래기들도 입에 든 가지를 퉤퉤 소리 내어 내뱉었다. "아, 맛없어" 우리 입술은 가지 물이 들어 모두 자주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장성처럼 우뚝한 짙푸른 둔덕이 나타났다. 형들이 인디언 같은 소리를 내며 앞장서 .. 2023. 4. 25. 한여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한여진 이른 아침 그는 시장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가 내다 팔기 위해 장롱에서 꺼내온 놋그릇이 그의 오랜 집이었다 그는 커다란 이빨을 쓰다듬으며 택시를 탔다 도깨비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도깨비 손님은. 요새는 통 나올 일이 없어서요. 하긴 그래요. 밖은 좋지 않은 것들투성이죠 택시는 한낮의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택시 기사는 신중한 동작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오래된 팝송을 틀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만난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이 기막히게 빠른 야바위꾼이었는데 세 개의 엎어진 컵을 이리저리 눈 깜짝할 새 없이 옮기다 보면 꼭 하나의 컵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럴 땐 손가락을 들어 그 어떤 것을 가리켜도 컵이 열리는 순간 번쩍하고 깊은 밤이 찾아와서 .. 2023. 4. 9. 이전 1 2 3 4 5 6 7 ···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