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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8

이설야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이설야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트라파니 소금이 바람과 함께 도착했다. 시칠리아 염전의 염부들 혈관엔 붉은 피 대신 소금이 흐른다지. 근해에 나갔던 시칠리아 염부들 혈관엔 물고기들이 헤엄쳐 온 푸른 파도와 흰 포말이 켜켜이 피어오르겠지. 조개무덤에서 나온 패각 조각이 산산조각 난 채 수억 년 빛나던 해파리들의 춤을 추겠지. 혓바닥을 감은 미역귀들의 노래, 천천히 듣다 사라져 간 시간들도 함께 흐르겠지. 토마토와 양파를 기르는 농부들 혈관에는 붉은 흙에 떨어지던 땀방울, 바람에 씻기던 땀방울이 소금 되어 흐르겠지. 검은 후춧가루와 흰 후춧가루가 흐를지도 몰라. 노을처럼 번지는 슬픔의 가루들로 식탁은 튼튼한 다리들을 키우겠지. 원형극장을 짓기 위해 바위를 깎고 돌을 나르고 동굴을 파던 .. 2023. 6. 6.
장정일 「하나뿐인 사람」 하나뿐인 사람 장정일 머리는 까마귀 귀는 토끼 눈은 사슴 눈썹은 강아지 코는 고양이 입술은 앵무새 혀는 낙지 이빨은 상어 뺨은 백조 목은 기린 가슴은 여우 젖꼭지는 무당벌레 겨드랑이는 닭 어깨는 펭귄 두 팔은 원숭이 손은 비둘기 손톱은 두더쥐 허리는 뱀 배꼽은 다슬기 엉덩이는 말 허벅지는 캥거루 종아리는 치타 발목은 두루미 발은 연어 발가락은 미꾸라지 발톱은 양 항문은 거미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 2019) "말놀이를 한 시는 그만 좀 보고 싶다!" 그런 댓글을 여러 번 썼다. 역겨워서 그냥 지나올 수가 없었다. 이 시를 보고는 그런 말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간단치 않다. 2023. 5. 31.
조용우 「나의 슬픔 기쁨 절망의 시인」 나의 슬픔 기쁨 절망의 시인 조용우 당신에게 당신의 시인이 있어 그는 슬픔의 시인도 기쁨의 시인도 아니라 그의 시를 읽으면 당신의 봄밤에 눈이 내리고 눈의 끝을 눈의 끝에 남은 이름들을 기억해 반복되는 이름들을 기억해 눈이 내리는 그의 시의 바깥으로 날아가는 물수리를 기억해 당신이 빠져 있는 혼곤한 잠의 수면 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수리를 기억해 땀이 많이 나는구나 마을로 가 사람을 불러오마 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당신은 물 위를 돌고 있는 물수리들을 보아 물수리가 바위틈에 감춰 둔 송어를 기억해 결코 당신 것이 아닌 작은 송어들을 기억해 다시 정지비행 물수리의 여름 하늘 당신의 시인이 끊어낸 여름 하늘 쉽게 잘려나가는 절망을 만져봐 당신 몫의 절망 바닷물에 절여진 절망을 기억해 당신 절망은 축축해 당.. 2023. 5. 9.
유미희 「강」 언 강이 녹는다 이쪽 산에 사는 고라니가 저쪽 산에 사는 멧토끼가 겨우내 건너던 얼음 다리 봄볕이 철거작업 중이다 천천히 지름길이 사라진다. 세상에 봄이 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동시작가 작품 중에는 아이들 흉내를 낸 것들이 있습니다. 장난 같고 심지어 같잖기도 합니다. 괜히 짜증도 나고, 이러니까 성인들은 물론 아이들로부터도 외면받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그냥 놔두면 되겠지만 혹 좋은 작품이 없을까 싶어서 또 살피게 되는데 그러다가 작가 작품다운 작품을 발견하면 '봐!' 하게 됩니다. 유미희는 어떤 작가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를 주로 쓰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내가 본 동시」에 나무늘보라는 분이 실어놓은 이 작품을 봤습니다. 올봄.. 2023. 5. 2.
장정일 「저수지」 저수지 장정일 마을 앞 손바닥만 한 못에서 개헤엄을 치던 여름방학 때의 어느 날, 동네 형들과 이웃 마을 저수지로 원정을 갔다. 형들이 긴 나뭇가지로 길 옆에 난 수풀을 휙휙 치면, 조무래기들도 따라서 작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저수지로 가는 길가에 드문드문 가지밭이 있었다. 형들은 햇빛에 익어 뜨끈뜨끈해진 가지를 베어 물었다. 형들이 "맛있다"고 우물거리면 조무래기들도 "맛있다"고 조잘거렸다. 형들이 "아, 맛없어" 하며 등 너머로 반쯤 베어 문 가지를 내어 던지면, 조무래기들도 입에 든 가지를 퉤퉤 소리 내어 내뱉었다. "아, 맛없어" 우리 입술은 가지 물이 들어 모두 자주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장성처럼 우뚝한 짙푸른 둔덕이 나타났다. 형들이 인디언 같은 소리를 내며 앞장서 .. 2023. 4. 25.
한여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한여진 이른 아침 그는 시장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가 내다 팔기 위해 장롱에서 꺼내온 놋그릇이 그의 오랜 집이었다 그는 커다란 이빨을 쓰다듬으며 택시를 탔다 도깨비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도깨비 손님은. 요새는 통 나올 일이 없어서요. 하긴 그래요. 밖은 좋지 않은 것들투성이죠 택시는 한낮의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택시 기사는 신중한 동작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오래된 팝송을 틀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만난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이 기막히게 빠른 야바위꾼이었는데 세 개의 엎어진 컵을 이리저리 눈 깜짝할 새 없이 옮기다 보면 꼭 하나의 컵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럴 땐 손가락을 들어 그 어떤 것을 가리켜도 컵이 열리는 순간 번쩍하고 깊은 밤이 찾아와서 .. 2023. 4. 9.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2018(1987) 2019년 12월 26일 성탄절 이튿날 동네 서점에서 이 시집을 샀다. 1987년 3월 30일, 시인이 스물다섯 살 때 초판을 냈으니까 나는 33년 만에 마침내 이 시집을 산 것이다. 나는 시, 소설, 희곡, 수필처럼 버젓한 이름을 가진 글이 아닌 잡문이나 쓰며 지냈지만 33년 만에,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날 단 한 권이라도 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내게는 중차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식 키친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싱크대를 달고 가스렌지 설치하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부엌까지 끌어온 수도꼭지 삑삑 틀어 과일 씻어놓고 가스렌지 탁탁 켜 계란 구으니 .. 2023. 3. 28.
곽문영 「이름 없는 밴드」 이름 없는 밴드 곽문영 송년회를 앞두고 회사에 밴드 동호회가 생겼다 사원부터 국장까지 다양한 직급의 직원들이 모였다 학창시절 밴드부 활동을 했던 직원도 있었고 비틀스를 좋아해 혼자서 10년 넘게 기타를 연습해오신 차장님도 계셨다 직급도 부서도 서로 달라 그곳에서 처음 만난 직원들이 많았다 사내 동호회 설립 규정에 따라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총무까지 선출한 다음 곡을 정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직급도 중간쯤인 내가 총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밴드 이름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시작된 회의에서 누구도 선뜻 의견을 내지 않았고 우리는 일단 연습을 먼저 하기로 했다 합주는 매주 목요일 저녁이었다 송년회까지 합주를 여섯 번 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야근 때문에 늘 두세 명씩은 늦게 도착했다 낮 동.. 2023. 2. 27.
정나래 동시집 《뭐라고 했길래》 정나래 동시집 《뭐라고 했길래》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동시 정나래 동시 이새봄 그림, 아동문예 2022 코코! 오랜만이에요. 그래서 복잡한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동시 한 편 보여줄게요. 밤나무 혼자 사는 할머니 밤사이 잘 주무셨나 궁금해하던 밤나무가 뒷마당에 알밤 몇 개 던져 보았습니다 날이 밝자 지팡이 짚은 할머니가 바가지를 들고 나옵니다 안심한 밤나무는 다음 날에 던질 알밤을 또 열심히 준비합니다. 코코는 어떻게 생각해요? 난 동시 쓰는 작가들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 작가 마음은 정말 알 길이 없다 싶었어요. 알밤이야 줍는 사람 마음이잖아요? 할머니가 일찍 일어나 줍든지, 누가 얼른 가서 줍고 자랑을 하든지 시치매를 떼든지, 하다못해 다람쥐가 한두 개 가져가든지, 그런 거잖아요? 그.. 2023. 2. 23.
문성란 동시집 《나비의 기도》 시·문성란 그림·손정민 《나비의 기도》 고래책빵 2022 문성란의 동시를 읽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용한 시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세상은 지금 이 세상보다 넓고 크다. 조용히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행복하다. 둥근 말 힘겨루기하더라도 찌르지는 말자고 둥그렇게 구부린 사슴벌레의 뿔 씩씩거리며 덤벼들다가 나뒹굴고 다시 일어나 씩씩하게 다가가 겨루는 그 녀석들이 보고 싶다. 그 둥근 뿔이 보고 싶다. 정녕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일까... 사슴벌레를 보거든 아이들이라도 이 시를 떠올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라도?' 주제넘고 어처구니없지? 우리는 말고 아이들이라도? 친구가 좋으면 내 짝꿍 대구로 이사 간 뒤 "어데예―" "아니라예―" 대구 말이 들리면 내 귀는 쫑긋 장맛비 내리면 거.. 2023. 2. 20.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청색종이 2022 뛰어 옥수수를 갉아 먹다 물린 고라니가 절뚝이며 뛰어 그 뒤를 금동이가 컹컹컹 쫓으며 뛰어 나리가 금동아 이제 그만해 소리치며 뛰어 고라니가 강을 가로질러 뛰어 그 뒤를 소나기가 작고 하얀 발로 토도독 뛰어 금동이가 멈칫하더니 나리를 향해 뛰어 나리와 금동이가 집으로 뛰어 고라니가 휙, 돌아보더니 산의 품으로 뛰어 휴, 내 심장이 가만 있지 못하고 콩닥콩닥 뛰어 조영수의 동시는 소설 같다. 재미있다. 동시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 흔히 소설 속에서는 발견되는 그 진실이 진짜 세상에서는 너무 귀해서 조영수의 동시에서 그 진실을 보는 순간을 즐거워하며 읽는다. 시인에겐 시적 순간일까? 조영수의 동시 속에는 그런 순간들이 꼭꼭 들어 있다. 숨구멍 교실 환경판에 .. 2023. 2. 17.
유희경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유희경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 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파가 교란될 때 들리는 소리. 예민해진 탓이야, 중얼거리고 k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k는 책을 내려놓고 꼼꼼하게 책상 위 모든 물건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무언가 있어 여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k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무언가 들어간 게 아닐까. 책장을 털어보고 냄새도 보다가 마침내 48쪽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비어 .. 2022.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