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83 최문자 「VERTIGO비행감각」 VERTIGO비행감각 최문자 (1943~ ) 계기판보다 단 한 번의 느낌을 믿었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조종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런 착시현상이 내게도 있었다.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수평비행으로 알았다가 뒤집히는 비행기처럼 등대 불빛을 하늘의 별빛으로, 하강하는 것을 상승하는 것으로 알았다가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그가 나를 고속으로 회전시켰을 때 모든 세상의 계기판을 버리고 딱 한 번 느낌을 믿었던 사랑, 바다에 빠져 죽은 일이었다. 궤를 벗어나 한없이 추락하다 산산이 부서지는 일이었다. 까무룩하게 거꾸로 거꾸로 날아갈 때 바다와 별빛과 올라붙는 느낌은 죽음 직전에 갖는 딱 한 번의 황홀이었다. 『현대문학』, 2007. 3월호 미안합니다. 헤아릴 수 없.. 2009. 7. 28. 이영광 「사랑의 미안」 사랑의 미안 이영광 (1967~ )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과열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손 적실 의향이 있지만 그것은 모독이리라, 모독이 아니라 해도, 이 어지러움으론 어느 울음도 진화鎭火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 2009. 7. 17.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정말이지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오고 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가서는 “화장실 가서는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잊혀지는 것. “죽음을 알리지 말라”느니, “빗돌을 세우지 말라”.. 2009. 6. 14. 강우식 「종이학」 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과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 2009. 6. 10. 처서處暑 처서處暑 정 양 냇물이 한결 차갑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뒤돌아보는 일 없이 어제도 이렇게 흘러갔었다 흘러가서 아주아주 소식 없는 것들아 흘러가는 게 영영 사라지는 몸부림인 걸 흘러오는 냇물은 미처 모르나 보다 ..................................................................... 정 양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68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빈집의 꿈』『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눈 내리는 마을』『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나그네는 지금도』등이 있으며, 을 수상한 바 있다. 『현대문학』2008년 11월호 죽어서 무덤을 남기는 경우 말고는 다 되풀이되는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2009. 6. 2.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Ⅱ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윤제림 (1959~ ) 저승사자 따라가던 사람이 저승사자가 되어 옵니다. 회심곡(回心曲)에선 활대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달려온다고 그려지는 사람. 그러나 저승사자도 백인백색. 나같이 둔한 사람은 벼랑길 천리를 제 발로 기어옵니다. 산허리 하나를 도는 데도 한나절, 만고강산 부지하세월입니다. 날 듯이 걸으라는 황천보행법도 못다 익히고 허구렁길 밝히는 주문도 자꾸 잊어서 밤낮 헛발입니다. 죽은 사람 데리고 돌아갈 일이 걱정입니다. 저승사자가 병아리 귀신보다 허둥거리면 무슨 망신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못나도 귀신은 귀신이어서 아득한 천지간을 수도 없이 자빠지고 구르다 보니 길 끝입니다. 문을 여니 구청 앞 버스 정류장. 여기서부터는 자신 있습니다. 아직은 이쪽이 더 익숙합니다. 살.. 2009. 5. 8. 최문자 「부토투스 알티콜라」 부토투스 알티콜라° 최 문 자 당신은, 누우면 뼈가 아픈 침대 짙푸른 발을 가진 청가시 찔레와 너무 뾰족한 꼭짓점들 못 참고 일어난 등짝엔 크고 작은 검붉은 점 점 점. 점들이 아아, 입을 벌리고 한 번 더 누우면 끝없이 가시벌레를 낳는 오래된 신음이 들려야 사랑을 사정하는 당신은 일용할 통증 멸종되지 않는 푸른 독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아픈 침대 커버를 벗긴다. 아아, 이거였구나. 전갈 한 마리 길게 누워 있다. 유일한 고요의 형식으로 당신과 내 뼈가 부토투스 알티콜라를 추다가 쓰러진 전갈자리. 굳은 치즈처럼 조용하다. 전갈의 사랑은 그 위에 또 눕는 것. 같이. ˚ 부토투스 알티콜라-전갈이 수직으로 달린 꼬리로 추는 구애 춤 ............................................ 2009. 5. 2. 박흥식 「절정」 절 정 눈부신 슬픔의 구름이 사라지고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는 뜯겨나가는 제 몸과 사자 무리를 한눈으로 보고 있었다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우고거기엔재봉질하던 어머니와일찍 집을 나가 오래 잊혀졌던 누이가 먼지도 없이 내렸다그것은 들판과 구름을 불태우면서. 박흥식 시인의 시집 『아흐레 민박집』(1999, 창비)에서 뽑은 시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가 하나 있다. “뜯겨나가는 제 몸”과 자신의 살을 물어뜯는 “사자 무리”를 제 눈으로 보고 있다. 검은 소의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는 장면을 시인은 (또는 소는) 느린 화면을 보듯 보고 있다. 이 극사실적 서술이 정서 환기를 위한 일체의 수식들을 배제한 채 담박하게 제시되어 있다. 검은 소의 죽음에 이어, 그 죽음 위로, 또는 죽음의 눈꺼풀 안으.. 2009. 4. 1. 김소월 역 「봄」 봄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봄은 왔다 하건만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서럽다 이를 두고 봄이냐치워라 꽃잎에도 눈물뿐 흩으며새 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쉬어라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 보느냐 벌겋게 솟구치는 봉숫불이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리오그리워라 내 집은하늘 밖에 있나니 애달프다 긁어 쥐어뜯어서다시금 짧아졌다고다만 이 희끗희끗한 머리칼뿐이제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김소월, 「봄」(『조선문단』, 1926년 3월호)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渾浴不勝簪 혼욕부승잠 ‘두시언해본’은 생략(현대문학 2월호, 199쪽에 있음.) 25세의 청년 시인이 80년 .. 2009. 3. 31. 목마와 숙녀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 2008. 1. 21. 알고보면 우리와 친밀한 저승사자 학교에 근무하니까 대체로 교장이 나이가 가장 많아서 겸연쩍게 노인 취급을 당하는 수도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새파란(?) 젊은이들에 비해 '노인은 노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가을이어서 그런가요? 10월이고 날씨조차 '가을맞고' 그러니까 '올해도 거의 다 갔구나' 싶어서 서글퍼집니다. 지난 3월(그러니까 저쪽 학교에 근무할 때), 이 블로그의 그 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의 주인공인 함수곤 교수께서 짤막한 글을 하나 달라고 해서 '알고 보면 우리와 친밀한 사이인 저승사자'란 글을 써주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저도 이제 "젊은이"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다 늙어서 건강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 세태는 정말 싫습니다. 그런 이들은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 걸까요? 오늘.. 2007. 10. 17. 이전 1 ··· 29 30 31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