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과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눈이 기막히게 내린다.
내린 눈보다 내가 더 조용히 깊고 하얗게 젖는다.
『현대문학』 2009년 6월호.
한낮에도 서늘하던 그 길에서 그 여행의 핑계가 되셨을 뿐인, 기꺼이 핑계가 되어 주셨던 부처님께 송구스러워해야 하는 이 누추하고 얄팍한 마음이,
시인의 「종이학」 앞에서, ‘아,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에도 눈이 내릴 수 있구나!’ 하고, 이번에는 다시 어느 겨울날 저녁 무렵 자욱하게 눈 내리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으니
구차하고 송구스런 마음의 한없는 얄팍함까지 다 들키고 만다 한들 어쩔 수가 없다.
그 길 어디쯤에서 ‘기막히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끊어져버린 그 인연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종이학 같은 것으로 아주 아주 잠깐씩만 그리워하다가
월정사로도 상원사로도 들어갈 일 없이 그냥 돌아오기로 한들
한없이 넓으신 부처님께서는 그것조차 이미 다 아실 것이므로 구태여 그 핑계까지 들추어 부끄럽게 하시진 않을 것이다.
그 길에 무수히 흩어져 내리는 한 잎 한 잎 눈송이엔들 넓으신 마음자락이 스치지 않았을까.
하물며 인간의 것이라면 가볍고 얄팍한 핑계쯤이야 그 한 잎 한 잎 눈송이처럼 어여삐 여기지 않으실까.
칠흑 같은 밤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환하게 눈 내려’ 천하의 모든 산들을 모조리 종이학쯤으로 바꾸어버리시는 크신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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