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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by 답설재 2009. 6. 14.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정말이지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오고 갈 수는 없을까. 그렇게 가서는 “화장실 가서는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잊혀지는 것. “죽음을 알리지 말라”느니, “빗돌을 세우지 말라”느니, 그런 것도 아직은 하수의 설익은 수작. 모름지기 인생의 고수라면 베잠뱅이 방귀 새듯 그렇게 슬그머니 샐 일인 것이다. 조금 더 개운하자면, 저 침이 튀는 왁자지껄 뒤에서 “치기배처럼/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기. 미안하지만 “술값은 쟤들이” 내게 하고(킬킬, 이게 제일로 상쾌하겠군!). 우리를 빙긋이 웃게 하는 이 환함. 이것이 달인다운 솜씨라는 것이다. 여기에 소량의 비애와 외로움을 수반해야 간이 맞을지 어떨지, 아직 ‘술값’이나 물고 있는 내 푼수로 그 이상은 모를 일. ---김사인(시인)

 

 

『현대문학』 2009년 6월호, 232~233쪽, 「누군가의 시 한 편」(윤재철 시인의 시집 『능소화』(2007, 솔)에서 뽑은 시).

 

 

좀 과장한다면 어느 문장, 어느 단어도 그렇게 시적(詩的)이지는 않다-―시인에게는 시적(詩的)이지 않을 단어가 있을 수 없겠지만-―. ‘문장이나 단어보다 스토리텔링이 앞서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해석한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날 정도로 하루저녁 술자리의 스토리를 소개하고 있을 뿐.

내내 직설적이어서 결론처럼 드러낸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 외로워지는 연습 / 술집을 빠져나와 /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에 이르면, 그러한 소개가 일기(日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가! 일기 같은 그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 외로워지는 연습”. 정말이지 송별의식(送別儀式)은 떠나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보내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그 어색함과 번거로움과 수고로움 같은 것은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인가,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그 실없어 보이는 하수(下手)가 지내놓고 보면 고수(高手)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이승에서의 숱한 이별의식을 보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장난이고, 인간은 최고의 광대라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에서 은퇴하는 로린 마젤(79)이 자신의 심경을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의 노랫말을 인용해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는다는 생각은 마치 농담과 같다. 그렇게 나쁘진 않다.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조선일보, 2009년 6월 13일, A2면).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즐겁게’ 감상한 ‘고수(高手)’의 글 밑에 ‘즐겁지도 않은’ 내용의 메모를 붙이는 ‘하수(下手) 중 하수’의 주제넘음이 부끄럽고 쑥스럽긴 하다. ‘고수’의 해석대로 이렇게 하는 것도 다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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