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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현대문학29

자연에 대한 경외심 '나'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이우환 화백이고 '루트'와 '에스라'는 그의 친구들이다. 루트가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인이었던 걸까?" 나는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그럴 리는 없지. 다만 지금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금 더 자연의 에너지, 그 힘과 연이어 있는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해." "자연의 힘?" "우리처럼 고립된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이어진 공동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신에 대한 신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에스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괴력이 작용했다는 뜻이군." "현대인은 공통된 정보와는 연결되어 있지만, 생각도 신체도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의 힘밖에 없는 게지." "엄청난 힘을 잃고 말았네." 이우환의 에세이 「라.. 2024. 4. 18.
장석남 「사막」 사막 장석남 1 나를 가져 내 모래바람마저 가져 나를 가져 펼친 밤하늘 전갈의 숲 사막인 나를 가져 목마른 노래 내 마른 꽃다발을 가져 2 내가 사막이 되는 동안 사막만 한 눈으로 나를 봐 너의 노래로 귀가 삭아가는 동안 바람의 음정을 알려줘 내가 너를 갖는 동안 모래 능선으로 웃어줘 둘은 모래를 움켜서 먹고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노래로 눕는 거야 나는 너를 가져 사막이 될 거야 나는 너를 가져 바람 소리가 될 거야 ..................................... 장석남 1965년 인천 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뺨에 서.. 2024. 4. 11.
황모과 《언더 더 독》 황모과 《언더 더 독》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돈이 많으면 곧 모든 일을 AI들에게 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겠지? 그런 세상에서도 더러 개(독)만도 못한 생활(언더 더 독)을 할 수도 있겠지? 돈으로 DNA를 편집해서, 그러니까 유전자를 조작(편집 혹은 시술)해서 머리가 최고로 좋게 하고, 온갖 험악한 바이러스를 다 물리치게 하고, 힘들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울퉁불퉁한 인간이 되게 하고, 인물이 훤한 인간이 되게 하고 심지어 지성과 인품마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겠지? 과학자들은 지금 그런 걸 연구하고 있겠지?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 의하면 2050년경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능해진다고 했지? '죽지 않는 인간' '신인류' '신과 같은 인간'이 된다고... 그럼 그게 정말 '인간.. 2024. 4. 3.
심보선 「새」 새 / 심 보 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 2024. 3. 20.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전문)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김 현 지상의 강아지 한 마리가 없어진다 때론 명백한 사실이 시적이지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아침 일찍 산책 나오던 한 사람이 사라진다 그는 아직 누워 있다 텅 빈 그를 깨우기 위해 누구도 상냥하게 짖지 않고 침대로 폴짝 뛰어오르지 않기에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일을 (짖어봐!) 사람이 해주지 않아서 (뛰어올라봐!) 사람은 다른 동물에게 바란다 오늘 사람이 잊은 일을 (사랑해주세요.)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꿈의 골목에 강아지가 나타난다 쓰다듬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그의 베개는 젖고 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난다 천국이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그는 우는 얼굴로 기뻐하며 눈을 뜬다 알면.. 2024. 3. 10.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꿈의 골목에 강아지가 나타난다 쓰다듬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그의 베개는 젖고 있다 -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부분) 그렇게 해서 영영 헤어진 사람을 생각해본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더 보자고 하면? 보여주고 싶다. 이렇게 이어진다면서.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난다 천국이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또 울겠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함께 갔던 곳"... 하며 울겠지? 울지 말고 들어보라고 해야겠지? 그는 우는 얼굴로 기뻐하며 눈을 뜬다 알면서도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부르던 이름을 속삭인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의 우울한 사람이 웃게 된다 고양이 한.. 2024. 3. 6.
임선우(단편) 「프랑스식 냄비 요리」 임선우(소설) 「프랑스식 냄비 요리」 『현대문학』2024년 2월호 놀라운 이야기꾼을 발견했다. 한때는 단이 내 곁에서 먼저 잠들어버리면, 단의 잠 속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드러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단의 꿈에 잠입하고 싶었다. 단의 무의식 속 풍경을 훔쳐보고, 그 안에서 하룻밤을 꼬박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면 단을 더욱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눈을 뜨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이 된 단은, 호텔 베이커리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나'의 첫 연인이었고 6년을 함께했는데 그 단이 어느 날 수영장 물에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단이 눈앞에서 녹아내렸을 때는 왜?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왜 지금 이 시점에 녹아버린 건데? 수영장 한 달 이용권을.. 2024. 2. 6.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성준과 나의 소망은 킹크랩을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소원이랄 게 그것뿐이냐 하면 집도 갖고 싶고 차도 갖고 싶고, 아무튼 돈을 잔뜩 갖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겠지만 우선은 킹크랩. 내 얼굴보다 큰 등딱지를 엎어놓고 스팀에 제대로 푹푹 쪄다가 집게다리부터 우적 뜯어서 한입에 와아아앙, 입속에서 게살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 테지. 게다가 킹크랩 딱지에 비며 먹는 밥은 또 어떻고. 먹어보지 않아 맛은 모르겠으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이 그냥 봐도 한껏 고소하고 녹진하겠지. 세상에 그것보다 맛난 건 없을 거다, 아마도. 월간 『현대문학』1월호에서 단편소설「퀸크랩」(이유리)을 읽다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소설가 생각을 했다. 소설가의 생활, 소설가의 낭만, 보람, 애환.. 2024. 1. 12.
천양희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생각하다 천양희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時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트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2023. 10. 22.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현대문학』 2023년 10월호 위수정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프로필을 보면 '1977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2017년 『동아일보』 등단, 소설집 『은의 세계』, 〈김유정작가상〉 수상'으로 되어 있다. 이 단편 말고 전에도 이 작가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읽었다. 다 그럴 것 같은 장면들로 이어진다. 평론가들은 평론을 하고 나는 이 소설을 다 옮겨 쓸 수는 없어서 두 군데를 옮겨놓기로 했다. 이 부분을 보면 언제라도 생각날 것 같았다. 화자 세진이는, 애인을 죽여서 뒷마당에 묻은 살인자 세준과 쌍둥이로 태어난 누나다. 누군가 담벼락에 빨간 래커로 낙서를 해놓았다. 사형하라! 나는 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전화기를 들고 안절부.. 2023. 10. 15.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현대문학》 2023년 8월호 유령을 볼 수 있다. 유령들은 대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이번 여자 유령은 어디든 따라다니며 그만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부추긴다. 집에선 두들겨 맞고 알바나 하고 그러지 말고 아예 죽어버리면 더 좋다고 이문동 126-39번지 자신이 살던 방 그곳에 가서 죽으면 된다고 비번까지 알려준다. A여고 3학년이고 공부할 시간도 없지만 학교 수업만은 열심히 들어서 간호대에 가기로 했고 그만한 성적은 나오고 있다. 집안 사정은 좋지 않다. 어머니는 야간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데 알콜 중독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타령이고 걸리면 꼬투리를 잡아서 매타작이다. 마침내 그 방을 찾아간다. 유령이 살던 원룸은 그의 말대로 비어 있었다. .. 2023. 8. 23.
직박구리에게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 존재조차 몰랐었어. 관심이 없었던 거지.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부터 꽥꽥 쫵쫵 악착같이 떠들어대는 녀석들, '행동대장'이 꽥꽥거리며 지휘하는 대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달콤한 열매가 달린 나무를 점령하는 것들, 익은 열매를 거들낸 다음엔 익지 않은 것조차 감미만 돌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들, 방조망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라도 실컷 따먹고는 나오지를 못해 푸드덕거리다가 꺼내주면 고마워하지도 않고 달아나는 것들, 꺼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죽어버리고 날개와 깃털, 해골만 남기는 것들, 이쪽저쪽으로 휙 휙 바람을 일으키며 위협 비상을 하는 것들, 이(李) 상무는 산까치로 부르지만 뭘로 봐도 직박구리가 분명한 것들,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겠지.. 2023.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