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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현대문학50

놀라운 박형서 소설 《바람이다》 박형서(소설) 《바람이다》《현대문학》 2025년 1월호      문제집 만드는 출판사 직원 성범수는,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난데없이 날아와 등을 건드리고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보다가 보행신호를 놓친다. 아내가 기다리는 그의 빌라까지는 5분 거리다. 마침 소를 몰고 가는 끝없는 시위대 행렬이 나타나 길을 헤매다가 결국 인왕산을 우회하는 버스를 타게 되고 뚝섬 인근에서 내려, 일단 번화가까지 간다고 탄 버스로 의왕까지 가고, 거기서 수원으로 가려고 탄 버스에서 너무나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이며 옆자리 할머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곤히 잠들어 깨우지 않았다고 해서 어둠 속 안성 국도에서 내려버렸고, 그곳 정류장 '개량 한복'의 말을 들었다가 한 시간 넘게 허비한 끝에 트럭 기사와 협상해 오송역으로.. 2025. 1. 31.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 책을 읽을 땐 온갖 생각, 온갖 짓을 다 한다. 남은 책장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누가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책을 들고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한숨을 쉴 때도 있고, 한 줄 한 줄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아껴가며 읽기도 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숨 가쁘게 읽기도 한다. 김경욱이라는 작가가 쓴 "현대문학" 1월호의 단편소설 「도련님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는 숨가쁘게 읽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나, 한탄도 하고 이미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생각 좀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반성도 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가정교사인 화자가 제자로부터 배우는 장면 중 하나이다.   "무슈는 꿈이 뭐예요?"하루는 강선재 군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비올라 양 아버님이 .. 2025. 1. 17.
김복희 「새 입장」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2025. 1. 13.
정지용 「비로봉毘盧峰2」 담장이물 들고,​다람쥐 꼬리숱이 짙다.​산맥 우의가을ㅅ길―​이마바르히해도 향그롭어​지팽이자진 마짐​흰들이우놋다.​백화白樺 홀홀허울 벗고,​꽃 옆에 자고이는 구름,​바람에아시우다.​​​    2022년 8월에『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보았다. 유종호 에세이 「어떻게 키웠는데―자작나무와 엄마 부대」에 소개되었는데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설해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시의 단어 하나하나, 각 행 혹은 전체적인 내용을 묻는 시험을 본다면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웬만한 사정이면 시를 찾아 읽는다고 읽어왔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하나.그렇지만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다.읽을 때마다 가슴속으로 들어와 일렁이는 가을빛이 좋았다. 시조차 신문기사 해석하듯이 해석하려는 시험문제 출제자가 보면 나는 한심한 사람일 것이다.. 2024. 12. 23.
누구를 위해 똑바로 서서 큰소리로 말해야 하나? 《콰이어트》(수전 케인)라는 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팀은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건전하게 섞여 있고, 리더십의 구조도 다양하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교육이란 끝이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수십 년 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혼자서 가슴 아파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반성문이었다. 나는 자신이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인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외향적이기도 하고 내향적이기도 한 것 아닐까 싶고, 얼마나 내향적인가 혹은 얼마나 외향적인가로 측정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렇다 해도 나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알쏭달쏭한, 애매한, 어정쩡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2024. 12. 15.
안미옥 「미래 세계」 미래 세계  안미옥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2024. 12. 2.
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 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Wolfgang Borchert 《Die Ausgelieferten》박병덕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1월호      저 밖에 도시가 서 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서서 감시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거리에는 보리수, 쓰레기통 그리고 아가씨들이 서 있다. 그것들의 냄새가 곧 밤의 냄새이다. 그것은 독하고 씁쓸하고 달콤하다. 가느다란 연기가 반짝거리는 지붕들 위에 수직으로 가파르게 떠 있다. 북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비가 그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니 지붕들은 아직도 빗물로 반짝이고, 빗물에 젖은 거무스름한 기와 위로 별들이 하얗게 떠 있다. 이따금씩 발정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달까지 치솟아 오른다. 어쩌면 인간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 2024. 11. 24.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배지은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0월호       맨해튼 4번 애비뉴의 서점들에서 좋은 책을 도둑질하는 데 스릴을 느끼며 책 도둑, 책 수집가, 책 애호가가 되어  그간 여섯 군데 서점을 연 찰스(가명, 본명은 미상)가 뉴 햄프셔 시브룩의 항구 위쪽 유서 깊은 하이 스트리트 구역에 자리 잡은 서점 '미스터리 주식회사'(신간 & 고서적·지도·지구의·예술품, 1912년 개업),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전설적인 서점을 발견한다.그는 독을 넣은 린트 초콜릿을 휴대하고 다닌다. 찰스는 서점 주인 에런 노이하우스를 죽이려고 한다. 매력적인 여 종업원을 그대로 채용할 생각도 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 부인까지 차지할.. 2024. 10. 22.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민음사 1992(초판 10쇄)      1984년에 초판이 나왔지만 내가 구입한 건 1992년으로 초판 10쇄본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리학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최창조 교수가 서울대 지리교육학과에서 풍수사상 강의를 하는 걸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최창조 교수가 나이가 많은 줄 알았었다. 그건 순전히 '풍수'라는 용어 때문이었는데 지난 1월, 최 교수가 세상을 떠났고 향년 74세였다고 해서 '이런! 나보다 나이가 적었잖아...' 했다. 그러다가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는 '유종호 에세이'에서 최 교수 이야기를 발견했다(《현대문학》 9월호, 유종호 에세이 「전보와 전근대─세상사의 그제 오늘」).  고인이 된 민음사의 박맹호 .. 2024. 9. 15.
'포 킴'이란 화가가 있었네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던 그 산촌에서의 국민학교 시절에는 여름·겨울 방학책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때도 교과서는 딱딱했던지 방학책을 받을 때마다 '이런 책도 있구나!' 싶었다. 여유롭고 친절했다. 방학책 한 권으로 길고 긴 여름방학, 더 긴 겨울방학을 지내는 건 좀 미안한 일이었고, 별도 과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현대문학" 9월호 표지를 보며 그 방학책들, 아스라이 사라져 간 그 여름 겨울들을 떠올렸다.  (...) 포 킴 예술은 한마디로 '아르카디아의 염원' '낙원의 동경'이라 풀이할 수 있다. 영원한 희원禧園 아르카디아는 인간이 좇는 행복의 땅이다. 그것은 미래의 희망으로 가득 찬 신화 같은 세계지만, 또한 좋았던 과거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르카디아란 손에 잡을 수 있는 희망이기도 .. 2024. 9. 11.
김동식 《악마대학교 이야기》 김동식(중편소설) 《악마대학교 이야기》『현대문학』 2024년 9월호      악마대학교 이야기  김동식  악마는 두꺼운 전공 서적 여럿을 품에 안고 다급히 이동했다. 어찌나 급한지 중간중간 짧은 순간이동까지 섞어가며 겨우 도착한 그곳, '악마대학교'의 한 강의실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서자, 학구열에 불타는(의미 그대로 진짜 불타기도 하는) 악마들이 한가득 앉아 있다. 늦게 온 이 악마 또한 그곳에 섞여 들어가 무거운 서적을 내려놓았다. 교수 악마는 그를 힐끔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하던 강의를 계속했다."자, 그러면 다음 발표자. 어떤 수법을 준비해 왔지?"긴장한 악마 하나가 벌떡 일어나 강당 앞으로 순간이동을 하다가 '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광경이지만 다들 웃지 못했다. 그만.. 2024. 9. 7.
안미린 「희소 미래 1」 「희소 미래 2」 희소 미래      1  유사 지구입니다 희소 생물입니다 심우주에서 온크리처입니다 수없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누구였을까 우리의 집에 행성이 충돌하는 일은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희고 부드럽게맑은 우주를 흘러 다닐 뿐입니다 웃고 있을까 어젯밤 무인 우주선에눈과 입을 그려준 사람   희소 미래      2  너희는 희소 생물에게 이름을 불러준다 먼 외계에게작고 투명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복슬 눈사람 인형에게눈의 기억을 들려준다 흰 청력의눈사람 언어를 영영 알 수 없지만 너희는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에미래를 주저하고 첫 발자국을 거둔다 흰 눈이 지켜지는 동안 이곳은 흰 심장과 하얀 폐를 숨긴 환한 행성이었다   ..................................... 2024.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