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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현대문학54

'삶을 위한 시간', 나는 어떻게 하지? "우리는 이제 삶을 위한 시간을 가질 거예요. 자유로운 시간을. 계획도 없고 습관도 없이 우리의 삶을 꿈꿀 수 있을 거예요. (......) 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를 들으며 나를 들여다보게 되었다.내겐 그런 시간이 있었나?나도 몰래 지나가버렸나?지금이라면 너무 늦었지?그럼 어떻게 하지?  조르주 무스타키 Georges Moustaki 「삶을 위한 시간 Le temps de vivre」☞ "아니끄의 샹송듣기"  https://youtu.be/sYQlzYO5w3U   ​노래는 다시 서서히 다가왔는데도 충격을 받았다. '내 삶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지금 나의 시간은 분명 자유롭다.계획이나 습관에 따르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모든 게 가능하고 모든 게 허.. 2025. 3. 14.
나는 왜 이 책에 빠져 살아왔을까 이 월간지를 처음 본 건 고등학교 시절 '대본서점'에서였다.대입시험에 떨어져서 방황하던 시절, 대천 해변에서 '현대문학' 조연현 주간을 만났다. 어떻게 해서 만났는지는 기억에 없다. 해수욕장은 거의 해운대와 거기뿐인 시절이어서 그 여름 유명인사를 많이 봤다. 60년 전이었다. 조연현 선생과 찍은 사진이 몇 년 간 눈에 띄다가 사라졌다. 교육대학 다닌 2년간에는 헌책방에서 발견한 이 월간지를 들고 신기해했다.교직생활 내내 기회가 되면 보았고, 2000년부터 지금까지 25년간에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럼 뭐가 남았나?그걸 물으면 내게 유감이 있는 인간이 분명하다.남은 건 '단 한 푼'도 없다.그럼 뭘 하려고 읽었나?재미를 찾았다.'그냥 세상'은 뭐랄까, 쓸쓸하고 썰렁해서 자주 '허구의 세상'으.. 2025. 3. 13.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谷崎潤一郞 《 春琴抄 》 『현대문학』 2025년 3월호   슌킨(春琴)은 오사카 도쇼마치의 부유한 약재상의 작은딸이었다. 그녀는 메이지 19년(1886), 5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무덤 옆에는 사실상 부부로 지낸 제자 사스케의 무덤이 있다. 제자는 메이지 40년 (1907), 83세로 사망했다. 슌킨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고상함과 우아함을 견줄 자가 없었다. 네 살 때부터 춤을 배웠는데 자세와 동작을 스스로 터득할 만큼 영리했다.그녀는 안질을 앓아 아홉 살 때 시력을 잃었다. 이후 춤을 그만두고 슌쇼(春松) 겐교(検校 : 남성 맹인 연주자에게 주어진 최고의 관직명)의 가르침에 따라 쟁과 샤미센 연습에만 힘썼다. 슌킨보다 네 살 위인 사스케는 슌킨이 시력을 잃은.. 2025. 3. 10.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놀라운 박형서 소설 《바람이다》 박형서(소설) 《바람이다》《현대문학》 2025년 1월호      문제집 만드는 출판사 직원 성범수는,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난데없이 날아와 등을 건드리고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보다가 보행신호를 놓친다. 아내가 기다리는 그의 빌라까지는 5분 거리다. 마침 소를 몰고 가는 끝없는 시위대 행렬이 나타나 길을 헤매다가 결국 인왕산을 우회하는 버스를 타게 되고 뚝섬 인근에서 내려, 일단 번화가까지 간다고 탄 버스로 의왕까지 가고, 거기서 수원으로 가려고 탄 버스에서 너무나 피곤해 잠시 눈을 붙이며 옆자리 할머니에게 깨워달라고 부탁했지만 할머니는 너무 곤히 잠들어 깨우지 않았다고 해서 어둠 속 안성 국도에서 내려버렸고, 그곳 정류장 '개량 한복'의 말을 들었다가 한 시간 넘게 허비한 끝에 트럭 기사와 협상해 오송역으로.. 2025. 1. 31.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 책을 읽을 땐 온갖 생각, 온갖 짓을 다 한다. 남은 책장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누가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책을 들고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한숨을 쉴 때도 있고, 한 줄 한 줄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아껴가며 읽기도 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숨 가쁘게 읽기도 한다. 김경욱이라는 작가가 쓴 "현대문학" 1월호의 단편소설 「도련님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는 숨가쁘게 읽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나, 한탄도 하고 이미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생각 좀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반성도 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가정교사인 화자가 제자로부터 배우는 장면 중 하나이다.   "무슈는 꿈이 뭐예요?"하루는 강선재 군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비올라 양 아버님이 .. 2025. 1. 17.
김복희 「새 입장」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2025. 1. 13.
정지용 「비로봉毘盧峰2」 담장이물 들고,​다람쥐 꼬리숱이 짙다.​산맥 우의가을ㅅ길―​이마바르히해도 향그롭어​지팽이자진 마짐​흰들이우놋다.​백화白樺 홀홀허울 벗고,​꽃 옆에 자고이는 구름,​바람에아시우다.​​​    2022년 8월에『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보았다. 유종호 에세이 「어떻게 키웠는데―자작나무와 엄마 부대」에 소개되었는데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설해 놓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시의 단어 하나하나, 각 행 혹은 전체적인 내용을 묻는 시험을 본다면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웬만한 사정이면 시를 찾아 읽는다고 읽어왔지만 그런 걸 어떻게 하나.그렇지만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읽었다.읽을 때마다 가슴속으로 들어와 일렁이는 가을빛이 좋았다. 시조차 신문기사 해석하듯이 해석하려는 시험문제 출제자가 보면 나는 한심한 사람일 것이다.. 2024. 12. 23.
누구를 위해 똑바로 서서 큰소리로 말해야 하나? 《콰이어트》(수전 케인)라는 책에서 "가장 효율적인 팀은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건전하게 섞여 있고, 리더십의 구조도 다양하다."는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교육이란 끝이 없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수십 년 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혼자서 가슴 아파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반성문이었다. 나는 자신이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인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외향적이기도 하고 내향적이기도 한 것 아닐까 싶고, 얼마나 내향적인가 혹은 얼마나 외향적인가로 측정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렇다 해도 나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알쏭달쏭한, 애매한, 어정쩡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2024. 12. 15.
안미옥 「미래 세계」 미래 세계  안미옥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2024. 12. 2.
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 볼프강 보르헤르트 《내맡겨진 사람들》Wolfgang Borchert 《Die Ausgelieferten》박병덕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1월호      저 밖에 도시가 서 있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서서 감시하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거리에는 보리수, 쓰레기통 그리고 아가씨들이 서 있다. 그것들의 냄새가 곧 밤의 냄새이다. 그것은 독하고 씁쓸하고 달콤하다. 가느다란 연기가 반짝거리는 지붕들 위에 수직으로 가파르게 떠 있다. 북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비가 그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니 지붕들은 아직도 빗물로 반짝이고, 빗물에 젖은 거무스름한 기와 위로 별들이 하얗게 떠 있다. 이따금씩 발정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달까지 치솟아 오른다. 어쩌면 인간의 울음소리일지도 모른다. .. 2024. 11. 24.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배지은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0월호       맨해튼 4번 애비뉴의 서점들에서 좋은 책을 도둑질하는 데 스릴을 느끼며 책 도둑, 책 수집가, 책 애호가가 되어  그간 여섯 군데 서점을 연 찰스(가명, 본명은 미상)가 뉴 햄프셔 시브룩의 항구 위쪽 유서 깊은 하이 스트리트 구역에 자리 잡은 서점 '미스터리 주식회사'(신간 & 고서적·지도·지구의·예술품, 1912년 개업),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전설적인 서점을 발견한다.그는 독을 넣은 린트 초콜릿을 휴대하고 다닌다. 찰스는 서점 주인 에런 노이하우스를 죽이려고 한다. 매력적인 여 종업원을 그대로 채용할 생각도 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 부인까지 차지할.. 2024.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