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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

by 답설재 2025. 1. 17.

책을 읽을 땐 온갖 생각, 온갖 짓을 다 한다. 남은 책장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누가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책을 들고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한숨을 쉴 때도 있고, 한 줄 한 줄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아껴가며 읽기도 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숨 가쁘게 읽기도 한다.

 

김경욱이라는 작가가 쓴 "현대문학" 1월호의 단편소설 「도련님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는 숨가쁘게 읽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나, 한탄도 하고 이미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생각 좀 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반성도 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가정교사인 화자가 제자로부터 배우는 장면 중 하나이다. 

 

 

"무슈는 꿈이 뭐예요?"

하루는 강선재 군이 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비올라 양 아버님이 물었을 때보다 몇 배 더 당황스러웠습니다.

강선재 군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진짜 답을 원하는 눈빛.

이번에는 작가라는 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너는 뭔데, 꿈이?"

저는 강선재 군의 시선을 피해 『성문종합영어』를 뒤적이며 반문할 따름이었습니다.

"웃겨죽겠는데 아무도 웃지 못할 때 있잖아요. 그럴 때 나서서 큰소리로 웃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강선재 군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꿈이 직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웃겨죽겠는데 아무도 웃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도 있다.

'웃겨죽겠는데 아무도 웃지 못할 때' 웃어버리는 것만큼 어렵진 않겠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 웃지 않기도 어렵긴 하다.

'웃겨죽겠는데 아무도 웃지 못할 때'나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의 웃기는 사람은 거의 상급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웃지 못하고, 그러니까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웃겨죽겠는데 아무도 웃지 못할 때'도 겪어봤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모두들 웃을 때'는 더 많이 겪어봤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에게도 웃지 않을 용기는 없었고, 그렇지만 나는 본래 잘 웃지도 않는 인간이어서 그럴 때는 매번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입꼬리라도 올리는 미소를 짓곤 했다.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상급자들은 어디로 갔나?

우습지도 않은데 비위를 맞추려고 아주 우스워 죽겠는 것처럼 분위기에 맞춰서 서로서로 둘러보며 웃어대던 그 조무래기 인생들은 또 다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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