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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바흐를 좋아하시나요?

by 답설재 2025. 1. 19.

남한산성 수어장대 (출처 : 국가유산청)

 

 

 

어언 60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가을날 교정에서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읽어봤는지 물은 그 여학생을, 그로부터 50년쯤 후 남한산성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에서 만났다.

그 교정에서 그 여학생은 예뻤다. 짝을 찾는 일을 제쳐놓고 실속 없는 일에나 정신이 팔린 내게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노트 복사물을 만들어 은밀하게 건네주기도 했다.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은 호젓하진 않았다.

그 옛날 우리 반 동기생들이 남한산성 아랫마을 한 식당에 많이 모였는데 그녀와 나 중 어느 쪽의 의도였을까,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던 그 길에서 어느 순간 그녀와 내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었다.

 

다른 얘기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남편을 만난 얘기만 또렷하다.

그 남편도 우리 반이었으므로 나하고도 자주 대화하던 사이였고, 키가 크고 잘 생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었다.

"초임 발령을 받은 바로 그해 봄 야유회날, 그가 '천등산 박달재'를 부르는 걸 보고 빠져버렸고 곧 결혼했어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죠."

 

행복한가, 그런 건 묻지 않았다. 실례일 것 같았고 무용한 질문일 것 같았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뻔한 일 아닌가. 내가 생각하기엔 그런 것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를 다시 만난 적도 없고, 전화를 하거나 누구에게 안부를 물은 적도 없었다.

 

그녀가 그 말을 전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그 말이 잊히지도 않았다.

우리에겐, 사람들에겐, 다만 노래 한 곡 부르는 걸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많으며 음악 듣는 걸 보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고 많다는 것은 기이하고도 흔한 일이다.

 

소설 《주군의 여인 1》(알베르 꼬엔)에서 국제연맹 사무차장, 뭇 여성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쏠랄이, 그가 한눈에 반한 여인, 유부녀 아리안 도블 앞에서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걸 읽으며 또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젠 쇠창살을 흔들어대는군. 저 모습에 반한 암컷들은 강하고 단호하고 기개 있는 수컷이라고, 기대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겠지. 수컷이 쇠창살을 거칠게 흔들수록 암컷은 그가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정신적으로 고결하다고, 기사도적이고 충성스럽고 명예롭다고 생각하잖소. 여성적 직관이라는 거지. 역시나 암컷이 황홀해하며 엉덩이를 흔들면서 다가가는군. 여자들은 늘 그렇지. 가장 정숙한 여자들까지도 어떻게든 엉덩이를 보여주려 하잖소. 그래서 딱 붙는 치마를 입는 거고. 이제, 수줍은 듯 두 눈을 순결하게 내리깔고 수컷 원숭이에게 묻는 군. 바흐를 좋아하시나요? 당연히 그는 바흐를 싫어하오. 기굣덩어리 변주가 뛰어날 뿐,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로봇 같은 음악가니까. 하지만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신이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품격 있는 개코원숭이 계층에 속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가련한 수컷은 짜증스럽기 그지없는 바흐를, 톱질 소리 같은 그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소. 이런 얘기가 놀랍소? 나도 마찬가지요. 암컷은 눈을 내리깔며 온화하고 신심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오. 바흐는 우리를 하느님께 다가가게 해 줘요. 그렇죠? 당신과 내가 취향이 같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늘 취향이 같다는 데서 출발하지. 그래, 바흐, 모차르트, 신, 여자들은 늘 이런 걸로 시작하잖소. 정숙한 대화를 하게 해 주고 도덕적인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주제들이니까. 보름 뒤면 침대에서 뒹굴고 있을 거면서.

 

 

그러나 쏠랄의 저 비아냥거림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렇지 않다면, 그럼 그 '사실'이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천등산 박달재'에 반하지 않으면 그럼 무엇에 반하고, 어떤 별 수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