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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85

자연에 대한 경외심 '나'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이우환 화백이고 '루트'와 '에스라'는 그의 친구들이다. 루트가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인이었던 걸까?" 나는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그럴 리는 없지. 다만 지금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금 더 자연의 에너지, 그 힘과 연이어 있는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해." "자연의 힘?" "우리처럼 고립된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이어진 공동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신에 대한 신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에스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괴력이 작용했다는 뜻이군." "현대인은 공통된 정보와는 연결되어 있지만, 생각도 신체도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의 힘밖에 없는 게지." "엄청난 힘을 잃고 말았네." 이우환의 에세이 「라.. 2024. 4. 18.
행복에 대한 접근법 : 유발 하라리의 생각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제4부 과학혁명(제19장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에서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쾌감이든 의미든)이라는 가정은 논리적인 가정일 뿐이며 이는 우리 세대의 지배적 종교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주관적 느낌의 가치에 대해서라면, 찰스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도 성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대신에 노동하고 걱정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삶을 보내는데, 이들의 DNA가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그렇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2024. 4. 16.
마지막 남아야 할 한 단어 다 사라지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지식은 단 한 문장, 한 문장이 안 된다면 그럼 한 단어, 단어도 길어서는 안 된다면 단 두어 글자로 된 단어,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랑? 믿음? 힘? 돈? 기억 혹은 추억? 고독? 향수? 상상력 혹은 추리력?...... 나로선 도무지 재미가 없지만 유명한 어느 과학자는 그게 '원자 가설'이라고 했단다. # 1 1960년대 초, 아주 비범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대격변이 일어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 모두 파손되고 오직 한 문장만이 남아 다음 세대의 피조물에 전해지게 된다면, 가장 적은 글자 수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원자 가설(혹은 원자에 관한 사.. 2024. 4. 10.
이런 중독 1. 모르고 같은 책을 두 번 산 적이 있다. 2. 시작하기도 전에 읽기를 포기한 책이 있다. 3. 표지 디자인이 좋다는 이유로 책을 산 적이 있다. 4. 책을 펼쳐 잉크와 종이 냄새를 들이마시면 안정이 된다. 5. 단지 할인한다는 이유로 책을 산 적이 있다. 6. 갑자기 잘 모르는 주제에 깊이 흥미를 느끼고 책을 여섯 권 이상 산 적이 있다. 7. 가족의 눈을 피해 책을 들여오기 위해 근사하고 엉큼한 계획을 짠 적이 있다. 8. 집에 손님이 와서 하는 첫마디가 대개 당신의 책에 대한 언급이다. 9. 침대 옆에 적어도 대여섯 권의 책을 놓아둔다. 10. 책방 직원이 찾지 못하는 책을 당신이 찾아낸 적이 있다. 이 물음들의 제목은 이렇다. ○×테스트 당신은 책 중독자인가? 톰 라비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 2024. 4. 6.
황모과 《언더 더 독》 황모과 《언더 더 독》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돈이 많으면 곧 모든 일을 AI들에게 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겠지? 그런 세상에서도 더러 개(독)만도 못한 생활(언더 더 독)을 할 수도 있겠지? 돈으로 DNA를 편집해서, 그러니까 유전자를 조작(편집 혹은 시술)해서 머리가 최고로 좋게 하고, 온갖 험악한 바이러스를 다 물리치게 하고, 힘들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울퉁불퉁한 인간이 되게 하고, 인물이 훤한 인간이 되게 하고 심지어 지성과 인품마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겠지? 과학자들은 지금 그런 걸 연구하고 있겠지?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 의하면 2050년경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능해진다고 했지? '죽지 않는 인간' '신인류' '신과 같은 인간'이 된다고... 그럼 그게 정말 '인간.. 2024. 4. 3.
길가메시 프로젝트 : 불멸의 신인류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서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에 그 왕의 이야기를 읽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건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에 대한 인간의 무모한 욕심을 나타낸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그 기억이 흐릿했으나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에서 길가메시 이야기를 다시 읽은 것이 최근이어서 기억에 생생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고 조리있게 설명하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어서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유발 하라리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길가메시 이야기.. 2024. 3. 31.
애인(벤야민에 따르면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 2024. 3. 26.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길 2015 본문 앞에 긴 해설이 있다(~64).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해설은 됐고'로 넘겨버리고 69쪽에서 시작되는 『일방통행로』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事實)에 훨씬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2024. 3. 24.
세이 쇼나곤 / 새벽에 헤어지는 법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거나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누가 흉을 보겠는가? 밤을 같이 보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남자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한다.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는 재촉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아서도 바로 사시누키를 입으면 안 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듯이 있다가 귓속말로 밤에 있던 일을 속삭이며 슬그머니 속곳 끈을 묶고 일어서야 한다. 격자문을 밀어 올리고 쪽문까지 여자와 함께 가면서 낮 동안에 못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런 식으로 해서.. 2024. 3. 19.
향기로운 구익부인 제(齊) 나라 구익부인(鉤翼夫人) 조(趙)씨는 아리땁고 가녀린 미인으로 청정함을 좋아했는데 6년 동안 앓아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고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때 망기술사(望氣術師)가 "동북에 귀인의 기운이 있다"고 해서 조정에서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냈다. 무제(武帝)가 그녀의 손을 펴보았더니 옥으로 만든 대구(帶鉤) 하나가 들어 있었고 오그라졌던 그 손이 저절로 펴졌다. 무제가 그녀를 총애하여 소제(昭帝)를 낳았지만 나중에는 권력 문제로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는데 입관한 시체가 차가워지지 않고 한 달 동안 향기가 났다. 마침내 소제가 즉위하여 다시 그녀를 매장하려 했지만 관 속에는 명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신선 이야기 《열선전 列仙傳》에서 봤습니다(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 2024. 3. 17.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SOCIAL PHYSICS 빅데이터와 사회물리학 박세연 옮김, 와이즈베리 2015 제때 읽었어야 할 책을 '느긋하게' 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세상의 변화는 급격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2015년에 읽었다면 '무슨 소리지?' '정말 그럴까?' 했을 부분을 전문지식이라고는 서푼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지!' '그렇지!' 하며 읽었다.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 "전통적인 물리학의 목표가 에너지 흐름이 어떻게 운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는 학문이듯이, 사회물리학은 아이디어 흐름 idea flow이 어떻게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란다(11). '전통적인 물리학'? 물리학이겠지? 저자는 이렇게 정의.. 2024. 3. 15.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23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건 머리말 첫 문단이다. 다음은 본문 첫머리 두 문단이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이 작은 책은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물론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 2024.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