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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89

요즘 누가 소설을 읽나요? 성준과 나의 소망은 킹크랩을 배가 터지도록 한번 먹어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소원이랄 게 그것뿐이냐 하면 집도 갖고 싶고 차도 갖고 싶고, 아무튼 돈을 잔뜩 갖는 것이 궁극적인 소원이겠지만 우선은 킹크랩. 내 얼굴보다 큰 등딱지를 엎어놓고 스팀에 제대로 푹푹 쪄다가 집게다리부터 우적 뜯어서 한입에 와아아앙, 입속에서 게살이 사르르 녹아 없어질 테지. 게다가 킹크랩 딱지에 비며 먹는 밥은 또 어떻고. 먹어보지 않아 맛은 모르겠으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알이 그냥 봐도 한껏 고소하고 녹진하겠지. 세상에 그것보다 맛난 건 없을 거다, 아마도. 월간 『현대문학』1월호에서 단편소설「퀸크랩」(이유리)을 읽다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으로 소설가 생각을 했다. 소설가의 생활, 소설가의 낭만, 보람, 애환.. 2024. 1. 12.
한병철 《서사의 위기》 한병철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3 정보 과잉 사회는 그 속에서 '스토리텔링'을 외친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전시하듯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찰나의 장면들을 끊임없이 공유하고 공감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그 안에 의미는 없다. 사라져 버릴 정보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끝없이 공유하고 타인과 교류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이라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한다. 세상으로부터 충격받고 저항하고 간극을 느끼며 자신만의 철학을 쌓아 올릴 기회를 빼앗고 그저 '좋아요'를 외치게 만든다. 역자 서문의 한 대문이다. 본문을 다 읽고 다시 읽었다.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문장들은 짧.. 2024. 1. 6.
발견 : 삶과 아름다움 사이의 절망적 간극 극복 방법 여기 돈이 많아서 집 안을 아름답게, 화려하게 꾸며놓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젊은이가 있다. 누추한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우울해하는 그 젊은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세이에 등장한다. 젊은이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서 식탁보 위의 나이프, 먹다 만 과일 조각,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 찬장 위 술병 옆의 고양이를 둘러보며 서글퍼하고 혐오감을 느낀다. 프루스트는 이 젊은이가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싶어서 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게 하되 웅장한 궁전을 그린 베로네세, 항구 풍경을 그린 클로드, 군주의 생활을 그린 반다이크의 그림보다는 장 바티스트 샤르댕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화가 샤르댕은 과일 그릇, 주전자, 커피 주전자, 빵 덩어리, 나이프, 와인이 담긴 유리잔, 납작한.. 2024. 1. 4.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갈릴레이의 생애》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마음이 많이 흔들려서였는지 "갈릴레이의 생애"는 굳이 읽어야 할까 싶었었는데(그 과학자의 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좀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라는 극작가는 이 과학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싶어서 좀 읽다 그만두더라도 일단 읽어보자 싶었다. 그랬는데 (이런!) 그게 아니었다. 좀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고 그것이 부끄러워서 몰입하게 되었고, "서푼짜리 오페라"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보다 감명 깊었다.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발견한 별들을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에게 보여주는 장면, 더 나은 생활을 하며 연구에 열중하고 싶어 어린애인 피렌체 .. 2024. 1. 3.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베르톨트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30년 종교전쟁(1618~1648) 때, '억척어멈'이라 불리는 종군주보(從軍酒保) 마차 주인 안나 피얼링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큰아들 아일립, 작은아들 슈바이처카스를 잃고 마침내 자신도 위험에 처했으나 벙어리 딸 카트린이 목숨을 바쳐 북을 울림으로써 억척어멈 자신은 목숨을 이어가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군목과 취사병을 이용하기는 해도 그들의 유혹과 술수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대사 속에 전쟁의 참상과 그 의미가 다 들어 있다(예). 억척어멈 (...) 용병대장이나 왕이 아주 미련해 부하들을 똥통으로 몰아넣으면 부하들은 결사적인 용맹성을 지녀야 하지, 그리고 덕목도 있어야 하고. 그 자가 인색해서 병사를 너무 적게.. 2023. 12. 27.
베르톨트 브레히트(희곡) 《서푼짜리 오페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매키스는 노상강도 두목인데다가 '거지들의 친구' 대표(사장) 피첨의 딸 폴리를 유혹하고 전격적으로 결혼까지 해서 적이 되었지만, 오랜 친구인 경찰청장 브라운의 힘으로 무법자처럼 지낸다. 그러나 정부 중 한 명인 선술집 제니의 배신으로 결국 체포되어 교수대로 보내졌는데 처형 직전 여왕의 사신이 나타나 석방된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의 구출을 하필이면 피첨(매키스의 장인)이 예고하는데, 이러한 극적 전개가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이 아니라 환희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피첨이 노래한다.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매키스 씨가 교수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기독교 아래에서 인간의 어떤 죄도 사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 2023. 12. 24.
'가설 학습'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설명 지금 가정부의 아들이 갈릴레이 갈릴레오에게 질문한다. 안드레아 가설이 뭐예요? 갈릴레이 그럴 것 같다고 추정하지만, 사실을 확보하지 못한 주장이란다. 저 아래 광주리 가게 앞에서 펠리체 부인이 아기의 젖을 먹는 것이 아니고,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설이란다. 직접 가서 보고 확인하지 않는 한 별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조금밖에 못 보는 흐릿한 눈을 가진 벌레들과 같단다.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믿어 왔던 이론들은 무너질 지경에 이르겠지. 그런 이론들은 거창한데, 그걸 받치는 근거라는 기둥이 형편없이 약하거든. 법칙들은 많은데 그걸 설명해 주는 것은 거의 없단다. 이에 반해 새로운 가설들은 법칙은 별로 없지만 많은 사실을 밝혀주고 있지. 안드레아 하지만 선생님은 나한테.. 2023. 12. 22.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박중서 옮김, 청미래 2011 흥미롭다. 우리의 삶을 바꿔준다? 방법이 제시되었다. 1.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 2. 나를 위해서 읽는 방법 3. 시간 여유를 가지는 방법 4. 성공적으로 고통받는 방법 5.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6.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 7. 눈을 뜨는 방법 8.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9. 책을 내려놓는 방법 알랭 드 보통의 여느 책처럼 좀 현학적인 문체에 끌려가며 읽어야 해서 다 읽고 나니까 '뭐였지? 어떤 방법이었지?' 하고 몇 가지는 다시 찾아 확인했다.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의 글을 인용하여 제시한 대로 내 삶을 바꾼다? 그럼 이 책은 자기 계발서이고, 이런 관점을 확인해 가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2023. 12. 20.
세이쇼나곤 「연꽃 이슬」 보다이사(菩提寺)라는 절의 결연팔강(結緣八講)에 참배했을 때 어떤 사람이 '어서 돌아오시오. 매우 적적하오이다'라는 편지를 보냈기에, 어렵게 찾은 은혜로운 연꽃의 이슬을 두고 그 허무한 세상에 어찌 다시 갈까나 もとめてもかかる蓮の露をおきて 憂き世にまたは帰るものかは 라고 써서 보냈다.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가슴속 깊이 와닿아서 더 있다 갈 것을 생각하니, 중국 고사에서 집 식구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상중(湘中)과 같은 심정이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 이치조(一條) 천황의 중궁 데이시의 여방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이 지은 《베갯머리 서책(枕草子)》에서 옮겨 썼다. 결연팔강(結緣八講)이란 불도와 인연을 맺기 위해 하는 법화팔강(法華八講)으로, 법화경(法華經) 8권을 8좌(座)로 나누어 하루에 두.. 2023. 12. 19.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발췌)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김석희 옮김, 휴머니스트출판그룹 2023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인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 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죤 듀이)(21) 프로이트는 개인의 정서적 장애와 정신적 불안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데려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25)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 2023. 12. 16.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김석희 옮김, 휴머니스트 2023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自由의 쟁취),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그 자유의 享有)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자유로부터의 逃避)는 것이다(39). 이 책의 주제이다(괄호 안은 답설재가 붙인 설명임). 인간 생활의 예로부터의 변화 과정은 이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적·사회적으로도 그렇다. 현재의 상황도 그렇다. 개인적인 현재의 사정도 그렇다.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사람도 있고, 웬만.. 2023. 12. 16.
세이쇼나곤(淸少納言) 「승려가 되는 길」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이를 승려로 보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승려는 마치 나뭇조각인 양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길뿐더러, 공양 음식같이 맛없는 것만 먹어야 하고, 앉아서 조는 것도 비난을 받는다. 젊을 때는 이런저런 호기심도 있을 텐데 마치 여자라면 진저리라도 난다는 듯이 잠시도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 잠깐 보고 마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도 없을 텐데 그것조차 못하게 한다. 수도승한테는 더욱 심하게 군다. 계속된 수행에 잠시 꾸벅꾸벅 졸기라도 하면 "독경은 안 하고 졸기만 해"라며 금방 투덜거린다. 승려가 된 사람은 한시도 마음 편할 새가 없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이것도 옛말인 것 같다. 요즘은 너무 편해 보인다. 일본 헤이안 시대 이치조(一條) 천황의 중궁 데이시의 여방 세이쇼나곤이 지은.. 2023.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