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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708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인류의 역사'라는 게 그리 흥미롭질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일어난 일마다 특이하고 다채롭다. 과목으로 치면 세계사일 것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라면 기꺼이 세계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세계사 선생 유발 하라리를 그리워하며 읽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는 어떤 곳일까? 유발 하라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학생들은 그를 좋아할까?....... 교과서로 치면 단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인지혁명 2. 농업혁명 3. 인류의 통합 4. 과학혁명 인지혁명은 인간들이 똑똑해진 시기다. 농업혁명은 자연을 길들여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혹은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 길들여진 시기, 과학혁명은 인간들이 스스로 주체.. 2024. 3. 5.
세이 쇼나곤 / 은밀한 곳의 멋 사람 눈을 피해 간 곳에서는 여름이 가장 운치 있다. 밤이 짧은 탓에 한숨도 못 자고 새벽을 맞이하노라면, 어느덧 뿌옇게 동이 터 오면서 주위가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밤새 하던 얘기를 이어 가고 있으면 파드득하고 머리 위로 까마귀가 갑자기 높이 날아올라,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슴이 마구 뛴다. 또한 겨울밤 아주 추울 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덮은 옷 속에 파묻혀, 저 멀리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함께 듣는 것도 정취가 있다. 그 즈음 닭이 울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부리를 날개 속에 처벅아 먼 곳에서 우는 것처럼 들리다가, 날이 밝아 옴에 따라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은밀했던 그 순간이 산뜻한 새벽별이 보이는 수채화가 되었다. 1000여 년 전 헤이안 시대의 궁중 여인(여.. 2024. 3. 2.
"인간은 필요 없다!" 우리를 더 잘 살게 해주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은, 지금 우리를 어떤 세상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일까? 인조지능이 인간을 '노예화'하게 될까? 그럴 가능성은 적다. 그보다는 우리가 동물을 키우듯 인간을 키우거나, 내부 환경을 쾌적하고 편리하게 조성해서 경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거의 들지 않게 만들고 그 안에 격리 보호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과 인조지능이 동일한 자원을 놓고 경쟁하지는 않기 때문에, 인조지능들은 지렁이나 선충을 대하듯 우리를 완전히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우리가 반려동물을 대하듯 온정적으로 대할 것이다. (...) 지구는 햇빛과 고독만이 존재하는 유리 사육장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맞아들였던 기계 경호원들이 가끔씩 끼어들어 모두 순조롭게 돌아가는지 살피는, 벽과 담장 없는 동물원이 .. 2024. 2. 29.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결론 《노년》 《노년》 그 방대한 책에서 노년의 슬픔을 조목조목 파헤치고 나열한 보부아르는 짤막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보부아르는 결론에서도 결국 노년의 슬픔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우위는─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렇지만─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의 쇠퇴나 혹은 과거의 부인인 경우 특히 슬픈 것이다. 옛 사건들, 예전에 획득한 지식들은 생명의 불이 꺼진 삶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 2024. 2. 28.
"목목문왕(穆穆文王)이여" 음담패설을 유난히 밝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여겨서 무모하게,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모처럼 남녀 동기회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퇴임들을 했기 때문에 참석자가 많았다. 1박 2일간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점심식사도 거의 끝나서 곧 헤어질 시간이었고, 다음에는 또 언제 이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 숙연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학교 다닐 땐 말도 없이 겨우 얼굴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해버렸다. 모두들 껄껄 웃었고 여성들도 그렇게 웃거나 두어 명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개그나 해학이 아니었다. 저속하기 짝이 없어서 이후 그 음담패설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40여 년 만에 처음 만났지만 아마 교직생활을 하는 내내 그의 행동은 저속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2024. 2. 25.
어떤 유언 가난에다 흉년마저 겹쳐 마당쇠를 내보낸 늙은 선비가 손수 땔감을 구하러 톱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글만 읽고 나무라곤 해보지 않은 이 선비, 욕심은 있어서 굵은 나뭇가지를 골라 베는데 걸터앉은 가지의 안쪽을 설겅설겅 톱질한 것이다. 떨어질밖에.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돈이 없어서 의원도 못 부른 채 저절로 낫기만 기다리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맡에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던 자서제질(子胥弟姪)에게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느니라. 혹여 나무를 베더라도 제 앉은 가질랑은 절대로 베어선 안 되느니라. 알아들었느냐?" [출처 : 지례마을] 군소리 고금에 유언치고 이보다 더 교훈적인 것도 드물 줄 안다. 세상 살며 제일 조심하고 삼갈 것이 바로 '제 앉은 가.. 2024. 2. 22.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2009 잠자는 미녀의 집은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절벽 위 숲 속에 있었다.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신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아가씨를 깨우려 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깨우려고 하셔도 결코 깨지 않을 테니까요. 아가씨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리하는 여자가 제시하는 규칙이다. '안심할 수 있는 손님'만 출입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여자를 여자로서 다룰 수 없는 노인들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67세의 에구치는 다섯 차례에 걸쳐 그 집을 찾아간다.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고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서 그동안 그가 만난 여성들, 여성의 아름다움, 자신의 막내딸의 일들을 회상한다... 2024. 2. 20.
뭘 알아야 글을 쓸 것 아닌가 글을(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다. 나는 그걸 전업으로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실감할 때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경우도 좋은 사례다. 그의 책 《사피엔스》는 그 전체가 그런 사례들이어서 밑줄을 긋는다면 아예 다 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 정도였다.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490~493).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청교도와 스파르타인의 금욕 윤리는 가장 유명한 두 사례였다. 훌륭한 사람은 사치품을 멀리했고, 음식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지가 찢어지면 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꿰.. 2024. 2. 18.
소설과 소녀(소년)에 관한 존 러스킨의 견해 소설 읽기를 얼마나 허용해야 하는가를 여기서 결정하지는 않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주장하겠습니다. 소설을 읽든 시나 역사물을 읽든 책을 그 효용성으로 골라서는 안 되며 반드시 내용으로 골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영향력이 큰 책 안에 여기저기 붙어 있거나 숨어 있는 위험과 악이 고결한 소녀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 없는 공허한 저자는 소녀를 우울하게 하고, 그의 쾌활한 어리석음은 소녀의 품격을 떨어뜨립니다. 오래된 고전으로 가득 찬 훌륭한 서가를 이용할 수 있다면 굳이 책을 고를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나오는 잡지나 소설은 따님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십시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고전이 가득한 서고에 따님을 혼자 내버려 두십시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게 될 겁니다... 2024. 2. 15.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강초롱 옮김, 을유문화사 2021 죽음은 누구에게나 가장 무거운 숙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은 척해봐야 별 수 없겠지. 시몬 드 보부아르와 그녀의 어머니는 서로를 부정해 온 사이였다. 딸이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으니(그것만도 아니긴 했지만) 그럴 수밖에. 어머니는 그랬겠지. "우리 집안에서 계약결혼이라니! 말이 돼?" 그러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아주 편안한 죽음? 그런 죽음이 있을까 싶진 않고 죽음의 순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리치료사가 침대로 다가와 이불을 걷어 올리고는 엄마의 왼쪽 다리를 붙잡.. 2024. 2. 14.
노발리스 《파란꽃》 노발리스 Heinrich von Ofterdingen 《파란꽃》 김주연 옮김, 열림원 2020 특이한 소설이다. 낭만주의를 열고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이렇게 하는 건 처음이다). 하인리히는 파란꽃 꿈을 꾼다. 그 꽃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처녀의 얼굴이 나타나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은 하인리히에게 행복에 가득 찬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하인리히는 그 처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세상은 다양하고 거칠었다. 상인, 군인도 만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은둔자도 만났다. 모든 것이 새로움, 찬탄과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 편력을 통해서 하인리히는 그때까지의 온실 속과 같은 성장 과정에서 벗어나 갖가지 체험을 쌓아 간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발전 과정이었다.. 2024. 2. 12.
임선우(단편) 「프랑스식 냄비 요리」 임선우(소설) 「프랑스식 냄비 요리」 『현대문학』2024년 2월호 놀라운 이야기꾼을 발견했다. 한때는 단이 내 곁에서 먼저 잠들어버리면, 단의 잠 속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드러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단의 꿈에 잠입하고 싶었다. 단의 무의식 속 풍경을 훔쳐보고, 그 안에서 하룻밤을 꼬박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면 단을 더욱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눈을 뜨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이 된 단은, 호텔 베이커리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나'의 첫 연인이었고 6년을 함께했는데 그 단이 어느 날 수영장 물에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단이 눈앞에서 녹아내렸을 때는 왜?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왜 지금 이 시점에 녹아버린 건데? 수영장 한 달 이용권을.. 2024.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