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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91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 김석희 옮김, 휴머니스트 2023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自由의 쟁취),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그 자유의 享有)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자유로부터의 逃避)는 것이다(39). 이 책의 주제이다(괄호 안은 답설재가 붙인 설명임). 인간 생활의 예로부터의 변화 과정은 이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적·사회적으로도 그렇다. 현재의 상황도 그렇다. 개인적인 현재의 사정도 그렇다.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사람도 있고, 웬만.. 2023. 12. 16.
세이쇼나곤(淸少納言) 「승려가 되는 길」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이를 승려로 보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승려는 마치 나뭇조각인 양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여길뿐더러, 공양 음식같이 맛없는 것만 먹어야 하고, 앉아서 조는 것도 비난을 받는다. 젊을 때는 이런저런 호기심도 있을 텐데 마치 여자라면 진저리라도 난다는 듯이 잠시도 곁눈질해서는 안 된다. 잠깐 보고 마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도 없을 텐데 그것조차 못하게 한다. 수도승한테는 더욱 심하게 군다. 계속된 수행에 잠시 꾸벅꾸벅 졸기라도 하면 "독경은 안 하고 졸기만 해"라며 금방 투덜거린다. 승려가 된 사람은 한시도 마음 편할 새가 없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이것도 옛말인 것 같다. 요즘은 너무 편해 보인다. 일본 헤이안 시대 이치조(一條) 천황의 중궁 데이시의 여방 세이쇼나곤이 지은.. 2023. 12. 12.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두 번째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두 번째 THE ILLUSTRATED BOOK OF SAYINGS: Curious Expressions from Around the World 세상에서 하나뿐인 기발하고 재미있는 표현들 루시드폴 옮김, 시공사 2017 우리 속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까마귀가 날아가느라 배가 떨어진 걸까요? 배가 떨어지는 통에 까마귀가 날아가버린 걸까요? 이건 얼핏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일지라도 애써 관련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까마귀가 날아간 일과 배가 떨어진 일이 늘 연관되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아무 상관없이, 그저 별개로 일어난 사건이었는지도 모르는걸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상상이 쉽게 멈출 리는 없겠죠. .. 2023. 12. 10.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An Illustrated Compendium of Untranslatable Words from Around The World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루시드폴 옮김, 시공사 2016 몽가타(MÅNGATA)는 물결 위로 길처럼 뜬 달빛이라는 뜻의 스웨덴어 명사란다(이 단어를 보면서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우리말 '윤슬'이 생각났다). 사마르(SAMAR)는 아랍어 명사로 해가 진 뒤, 잠도 잊고 밤늦도록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히라에스(HIRAETH)는 웨일스어 명사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과거 속으로 사라진 곳에 대한 향수, 혹은 가 보지 못한 곳에 대.. 2023. 12. 9.
"사람들은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아요." "무슨! 사람들이 왜 얘기를 안 해?" "아니에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밖엔 안 해요. 그런 것들이 뭐는 얼마나 멋있냐는 둥 그런 얘기뿐이죠. 누구든 하는 얘기들은 다 똑같아요. 남들과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카페에서도 모여 앉았다 하면 그저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기 일쑤죠. 똑같은 우스갯소리들만 하고 하고 또 해요. 음악회라고 가 보면 현란한 조명들이 온 사방을 어지럽게 누비더군요. 보기엔 멋있고 즐겁지만 그것뿐이죠. 공허하고 추상적일 뿐. 박물관은 또, 가 본 적이 있으세요? 거기도 전부 다 추상적인 물건들뿐이에요. 지금 있는 것들은 다 그래요. (......)" 소설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에서 소녀 클라리세 매클린이 방화수 .. 2023. 12. 8.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EATING THE SUN : Small Musings on a Vast Universe 심채경 옮김, 프시케의숲 2022 바쁘게 혹은 무심코 살아간다면 '우주'라고 해봤자 별것 아닌데─우주를 잘 몰라서 곤혹스러운 건 물리학, 지구과학 같은 과목 시험을 볼 학생 말고 또 있을까?─ 그 우주에 대한 글들을 써놓은 책이다. 어떻게? 이렇게, '신비롭게' '자세하게' '흥미롭게' '시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 나는 다시 책을 낼 기회가 찾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정리하고 결정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책 때문에─내가 책을 내기보다 우선 읽어야 할 책이 자꾸 나타나서─내가 책 내는 일을 시도할 시간이 남지 않을 것.. 2023. 12. 4.
장세련(소년소설) 《아빠의 불량 추억》 장세련(소년소설) 《아빠의 불량 추억》 시은경 그림, 단비어린이 2023 "아들, 뭐 하고 있어?" 엄마였다. 유난히 다정했다.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건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옆에 직원들 있지?" "왜?" "우웩! 하던 대로 하시지." 나는 일부러 토하는 시늉을 하며 이죽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다정한 엄마의 말투가 느끼했다. 옆에 누가 있을 때나, 나를 혼내다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 달라지는 두 얼굴의 엄마가 떠올랐다. 그럴 때 하던 말투라는 생각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집에서 노니까 좋아?" "좋지! 그럼!" "그런데 왜 퉁퉁 부은 말투야?" "몰라! 말이 어떻게 퉁퉁 부어?" 알면서도 묻는 엄마가 얄미워서 아무렇게나 말했다. 게다가 감시하는 전화라니. 사춘기를 맞은 재우는 다른 사람이 되.. 2023. 11. 26.
장세련 동화 《시크릿 키》 장세련 동화 《시크릿 키》 권혜수 그림, 연암서가 2023 5학년이 된 로미와 영교는 아직 '커플 선언'은 하지 않은 절친이다. 사이에 전학생 이진이 끼어든다. 이진이의 풍부한 지식과 깔끔한 외모, 세련된 태도가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그 이진이가 영교에게 접근하자 로미는 위기감을 느낀다. 얘들이 어떻게 될까, 로미의 갈등은 어떻게 전개될까...... 그 생각과 마음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이진에게 질투를 느끼고, 영교와의 사이를 의심하고, 이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진 사실을 알고 짓궂은 심리를 발동하고, 이진이의 필통까지 훔쳐 망가뜨리고... 그러다가 그런 행동들을 스스로 깨달아 극복해 가는 과정이 어떤 매뉴얼처럼 퍼져 나갈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깔끔한 곳이 될 것 같았다. 환영처럼 나타.. 2023. 11. 25.
만남과 헤어짐 : 수양공과 경제 위군(魏郡) 사람 수양공(脩羊公)은 화음산(華陰山) 위 석실에서 살았는데 그가 돌 침상에 누우면 돌이 푹신하게 들어갔다. 그는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고 때때로 황정(黃精)을 캐어 먹었다. 경제(景帝)가 그의 도술을 배우고 싶어서 그에게 벼슬을 주고 예우하여 왕족의 저택에 머물게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도술을 얻을 수 없자 조서를 내려 "수양공은 어느 날 떠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수양공은 사자의 전언(傳言)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 위에서 흰 양으로 변했는데 그 옆구리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수양공이 전하께 하직을 고합니다." 멋진 수양공, 그리운 신선,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신선에게 무슨 허물을 말하겠습니까. 신선 이야기 《열선전 列仙傳》(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지식을.. 2023. 11. 23.
허버트 조지 웰즈 《우주전쟁》 허버트 조지 웰즈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임종기 옮김, 책세상 2005 # 목요일 오후 "이 책 아니야." "이건 줄 알았는데..." "이 제목으로 100페이지 정도 되는 것 따로 있어." "주말에 보는 대로 봐. 다음주 초에 새로 찾아올게." # 월요일 오후 "이 책 다 읽었어. 더 빌려올 필요 없어." "벌써?" "응. 스토리는 단조로워. 다른 내용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설명이 많아." "그래? 축소판을 달라고 신청해 놓았는데..." "그럼, 그것도 볼게." # 한 장면 비행 물체가 추락한 들판의 상황은 오후에는 전혀 다르게 변해갔다. 석간 신문들이 가공할 헤드라인으로 런던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화성에서 메시지가 오다 워킹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더욱이 우주천문 .. 2023. 11. 22.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FACTFULNESS》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FACTFULNESS》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20(1판 54쇄) 이 책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세상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나누는 것보다 1·2 ·3 ·4단계로 나누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제안이 첫째 이유다. 이런 책들은 읽을 때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읽는 동안에는 그렇겠다 싶어도 읽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책을 버리는 건 쉽지 않다. 버리자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과감함의 다른 편에서는 '이래도 될까?' '후회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이 어렵지 돌아서는 순간 기억하지 않게 되고 '내가 언제?' 하게 된다. 그러니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버릴 수가 없다. 한스 로슬링은 육성으로 이 책을 썼고 일생을 바쳤다. 췌장암으로 죽는 순간에도.. 2023. 11. 12.
로버트 풀검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로버트 풀검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IT WAS ON FIRE WHEN I LAY DOWN ON IT 박종서 옮김, 김영사 1990 1989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읽은 나는 이듬해 6월 이 책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앞부분을 조금 읽고는 33년째 잊고 있었는데 최근 이 책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고, 이렇게 재미있는 걸 덮어두었다니 싶어서 버렸던 물건을 되찾아온 느낌이었다. 상자 안에 보관된 기념품 가운데 조그만 종이 주머니가 하나 있다. 도시락 주머니만 한 것이다. 주머니의 윗부분은 테이프, 철침, 클립 등으로 봉해져 있지만, 옆구리가 너덜너덜 찢어져 있어서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볼 수.. 2023. 1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