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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691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현대문학》 2023년 8월호 유령을 볼 수 있다. 유령들은 대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이번 여자 유령은 어디든 따라다니며 그만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부추긴다. 집에선 두들겨 맞고 알바나 하고 그러지 말고 아예 죽어버리면 더 좋다고 이문동 126-39번지 자신이 살던 방 그곳에 가서 죽으면 된다고 비번까지 알려준다. A여고 3학년이고 공부할 시간도 없지만 학교 수업만은 열심히 들어서 간호대에 가기로 했고 그만한 성적은 나오고 있다. 집안 사정은 좋지 않다. 어머니는 야간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데 알콜 중독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타령이고 걸리면 꼬투리를 잡아서 매타작이다. 마침내 그 방을 찾아간다. 유령이 살던 원룸은 그의 말대로 비어 있었다. .. 2023. 8. 23.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홍성광 옮김, 현대문학 2013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가출해서 체험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득도(得道)는 지난한 것이어서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사위성 기원정사에서 부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건 잠시였고, 아름다운 창녀 카말라를 만나 제2의 삶을 살게 되고 거상 카마스와미를 만나 부를 향유하기도 했지만,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뱃사공 바주데바를 스승으로 삼고 강의 흐름으로부터 시간의 초월을 배운다. 싯다르타가 카말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싯다르타'와 헤어진 것은 '인간 싯다르타'의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은 이 '소설'이 전기와 다름을 잘 보여주었다. 싯다르타는 그 늙은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천천히 .. 2023. 8. 11.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김지선 옮김, 뜨인돌 2022(개정판) 책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가만히 알려주지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길 그대에게 필요한 건 모두 거기에 있지 해와 달과 별 그대가 찾던 빛은 그대 자신 속에 깃들어있으니 그대가 오랫동안 책 속에 파묻혀 구하던 지혜 펼치는 곳마다 환히 빛나니 이제는 그대의 것이리 ── 헤르만 헤세 책 속에 다 들어 있다고? 구하던 지혜가 빛나고 있다고? 나의 경우는 그렇진 않았다. 나는 헤세처럼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은 그 시간에 다른 일을 좀 더 했더라면, 유능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며 후회하거나 하진 않지만 책을 읽느라고 세상을 잊었으니... 그게 어떤 성격의 시간.. 2023. 8. 5.
선대가 쌓은 재앙으로 뱀을 배설한 하간왕 옛이야기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전에는 '옛이야기' 하면 "에이~!" 해버렸는데 이것도 늙어서일까요? 괜찮아졌거든요. 하간(河間) 사람 현속(玄俗)은 파두(巴豆)를 먹으며 성시(城市)에서 약을 팔아 생활했다. 그는 환약(丸藥) 일곱 알에 1전을 받았는데 온갖 병을 낫게 했다. 하간왕이 괴밸병을 앓다가 그 약을 먹고 뱀 10여 마리를 배설하고 나서 약의 효능에 대해 물었다. "왕의 괴밸병은 6대째 쌓인 재앙으로 그것을 배설하게 된 것은 왕께서 초래한 바가 아닙니다. 왕께서 일찍이 사냥을 하시다가 새끼 달린 사슴을 놓아준 적이 있는데 사실은 기린의 어미였습니다. 왕의 그 인자하신 마음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당연히 저를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왕궁의 늙은 사인도 왕에게 아뢰었다. "저의 부친의 세대에.. 2023. 7. 20.
문봄(동시집) 《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 문봄(동시집) 《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 홍성지 그림, 상상 2023 놀랍다. 새, 별, 이슬, 꽃과 나비, 시냇물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동시부터 나온다. 초록 달 한밤중에 거실에서 엄마 폰 아빠 폰 내 폰 나란히 앉아 야식을 먹는다 멀티탭 3구 밥상에 기다란 빨대를 꽂아 따듯한 전기를 쪽쪽 빨아 먹는다 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 얘들아, 오늘도 고생했어! 폰들의 마음속에 초록 달이 뜨는 밤 네모나게 부푸는 밤 폰드로메다? 두 번째 동시 제목에 나온다. 폰드로메다 오, 폴더 폰 깨진 폰 물 먹은 폰 구닥다리 폰 배터리 터진 폰 스피커 고장 난 폰 화면이 안 보이는 폰 버튼도 안 눌러지는 폰 모두 가자 폰드로메다로. 낮이나 밤이나 일하느라 바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친구들아, 날마.. 2023. 7. 16.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박중서 옮김, 청미래 2011 책에 관해서만큼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려는 의욕으로 필자를 소개하고 줄거리를 만들고 감상을 쓰는 건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알랭 드 보통(무신론자)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종교의 유용성을 제시하면서 무신론자들도 종교의 훌륭함을 염두에 두고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 내용을 요약해 놓았다가 나중에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그럴 필요가 있다면 내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를 다룬 부분을 옮겨보는 것이 낫겠다. 우선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욥을 소개한다. 무신론자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구약성서의 내용은 바로 욥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하.. 2023. 7. 11.
두려움 소설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에서 교황 요한 22세의 사절단장 베르나르 기가 황제의 사절단 일행,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 혐의로 수도사 레미지오를 문초하는 장면은 584쪽에서 617쪽까지이다. 이 34쪽을 단숨에 읽었다. 두려웠다. 이른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아무리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해도 교황이라는 사람의 '바로 아래'에서 혹은 '옆'에서 하느님을 입에 달고 살아갔을 고위 성직자가, 이렇게 잔인하고 악독할 수도 있을까? 혹 그런 직위에 있으면 하느님이 '있으나 마나' 하다는 걸 훤하게 알아서 두려움 같은 게 사라지는 걸까? 아니, 이건 소설이지? 그럼 움베르토 에코의 마음속에 이런 잔인함, 악독함이 스며 있었던 걸까?…… 나는 성.. 2023. 7. 9.
안동립(사진) 《독도 KOREA》 안동립(사진) 《독도 KOREA》 천연색 240쪽 35,000원 동아지도 2023 내 친구 안동립이 또 일을 냈다. 독도 사진 찍은 것으로 책을 냈다. 요즘 그 친구가 운영하는 "동아지도"는 출판사 명목만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안동립의 책 내는 일이나 출판사 운영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 요즘 누가 지도나 지도책을 사나? 인터넷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게 지도인데? 직원이래야 본인 빼면 두 명이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러다가 18년간 독도를 드나들며 찍은 사진을 모아 책을 낸 것이다. 독도는 왜 그렇게 드나들었을까? 또 가고 또 가서 살펴보고, 새벽엔 어떤지 보고 밤중에는 어떤지 보고, 동물식물 광물 다 살펴보고, 이름 없는 돌섬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 사람들로부.. 2023. 6. 29.
나이듦 :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려던 의지가 부질없어 보인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은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聖位)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3. 6. 27.
서책은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고대의 전도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일각수의 참모습을 계시받았던 것입니까?」 「계시라는 말보다는 경험이라는 말이 좋겠다. 설마 그러기야 했겠느냐? 어쩌다 보니 일각수가 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일각수가 그때에 맞추어 우리 땅에 살거나 했을 테지.」 「그럼 우리가 어떻게 고대의 지혜를 믿을 수 있습니까? 멋대로 해석된 엉터리 서책을 통해 전수되어 왔을 법한 것을 어떻게 지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 2023. 6. 25.
서책끼리 주고 받는 대화 「(……)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다른 서책을 읽든지 하면서…….」 「다른 서책을 읽으시다니요? 다른 서책이 사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서책이라는 것은 긴 줄에 꿰어 있는 것 같은 물건이거든. 종종 이 서책의 이야기와 저 서책의 이야기는 이어져 있는 수도 있다. 무해한 서책은 씨앗과 같아서 불온한 서책에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불연(不然)이면 무해한 서책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 독초 대궁이에 단 열매가 열리는 격이라고 할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책을 읽어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지 않느냐?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으면 아베로에스가 뭐라고 했는지도 알 수 있고…….」 「과연 그러하겠.. 2023. 6. 21.
집도 잊고 가는 길도 잃어버린 상중(湘中)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노인 상중(湘中)은 상수(湘水)가 넘쳐서 군산(君山)이 물에 잠긴 것도 몰랐고, 황로(黃老 : 노자를 시조로 하는 학문)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가 집으로 가는 파릉(巴陵) 길마저 잃어버렸다고 한다. 일본인들을 책을 많이들 읽는데 우리는 일 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책 읽는 걸 싫어하고 아예 책 읽는 사람마저 싫어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 책을 읽지 않아도 좋지만, 어쩔 수 없지만 책 읽는 사람을 미워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책이 없으면 나는 오래전에 미쳤을 것 같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 특별하지는 않다. 어려운 것만 싫어한다. 몇 살 되지도 않은 작자가 도통한 사람처럼 가르치려 든 책도 혐오한다. 가령 몇 살 되지도 않은 작자가 특별한 경험도.. 2023.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