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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by 답설재 2024. 3. 5.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인류의 역사'라는 게 그리 흥미롭질 못했는데, 이 책에서는 일어난 일마다 특이하고 다채롭다.

과목으로 치면 세계사일 것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공부라면 기꺼이 세계사를 전공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세계사 선생 유발 하라리를 그리워하며 읽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는 어떤 곳일까? 유발 하라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학생들은 그를 좋아할까?....... 

 

교과서로 치면 단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인지혁명

2. 농업혁명

3. 인류의 통합

4. 과학혁명

 

인지혁명은 인간들이 똑똑해진 시기다.

농업혁명은 자연을 길들여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혹은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 길들여진 시기, 과학혁명은 인간들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시기다.

 

3단원(인류의 통합 : 인간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협동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로서, 그 협동은 상상으로써 존재하는 것들(신, 국가, 돈, 인권 등)을 믿을 줄 아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고, 궁극적으로는 역시 허구(지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종교, 정치 체제, 교역망, 법적 제도 같은 대규모 협동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기억 속의 역사(국사, 세계사...) 선생님들, 내가 교육부에서 만나 함께 일하거나 도움을 받았던 학자, 교수들이 나타나면 유발 하라리의 이 견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고, 부분적으로는 오류가 있다고, 오류가 많다고, 억지스럽다고... 야단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성토와 항의를 듣더라도 나는 내 마음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와 버린 유발 하라리를 몰아내거나 경시하거나 하진 않을 것 같다.

 

그는 이제 내게 인류와 인류의 역사를 보는, 내 주위의 인간들을 흥미롭게, 즐겁게 혹은 슬프게, 우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 능력 덕분에 공통의 신화 혹은 허구를 발명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화폐, 종교, 제국이었다. 이것이 대륙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을 결속했다."

"자본주의는 경제이론이라기보다 일종의 종교이다."

"제국은 지난 2천 년을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정치체제였다."

"오늘날 가축의 취급 방식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다."

"현대인은 옛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인간은 현재 스스로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 있다."......('옮긴이의 말'에서)

 

 

그렇지만 답답하다. 한탄스럽고 서글픈 일이다.

불과 몇십 년을 살아본 나의 경험만으로도 그렇지만, 유발 하라리가 보여준 20여만 년의 그 찬란한, 파란만장한 물결을 따라온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도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장구한 세월의 그 변화·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행복이 아니라면 무엇을 추구해 온 것일까?

 

과학혁명의 뒤를 이은 생명공학 혁명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길가메시'(죽음을 극복하려고 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영웅) 프로젝트를 향하고 있으며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것이 확실하단다.

인류는 몇 세기 안에 사라지고 신인류,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이보그가 뒤를 잇게 되며, 그 영생은 결코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의 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말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직접적으로는 바라보지 못할(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절망적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