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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추억21

한강호텔, 옛 생각 병원에 갈 때는 올림픽도로를 타고, 병원에서 올 때는 강변북로를 탄다. 비교적 길이 막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돌아올 때의 강변북로는 고속도로와 거의 같다. 강변북로를 오갈 때는 꼭 한강호텔과 워커힐을 찾아본다. 워커힐은 유명했던 호텔이고 한강호텔은 예전에 고 강우철 교수, 김용만 편수관 등 여러 사람과 사회과 교과서 편찬을 위한 회의 장소로 가장 많이 드나들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병원에서 돌아올 때는 한강호텔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놓쳤나? 워커힐은 보였는데...' 기이한 느낌이 있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봤더니 아, 이런! 그 호텔이 사라지고 그곳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뉴스가 보였다. 평당 1억은 되는 아파트일까?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 호텔은 좀 한산한 편이어서 작업하기에는 최.. 2024. 1. 21.
부산 국제시장에 앰프 사러가기 김위복(金位福) 교장선생님은 진짜 무서운 분이었다. 우리는 정말이지 끽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완전' 절절매며 지냈다. 지서 순경들도 우리처럼 쩔쩔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교장선생님은 교사 경력이 단 6개월이었고 교감도 거치지 않고 바로 교장이 되었다고 했다. 초임교사 시절에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인민군이 '삐라'(전단)를 만들려고 등사기 좀 빌려달라고 아무리 간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일이 알려져 당장 교장 발령이 났고 이후로 계속 교장이었다는 것이다. 운동회가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선배 교사들이 우르르 학교 앞 도로로 뛰어나가 줄행랑을 칠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달리느라고 숨을 헉헉거리며 왜 이러는지 물었고, 운동회가 엉망.. 2024. 1. 13.
거기도 눈이 왔습니까? 일전에 L 시인이 올해는 첫눈이 자꾸 내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또 눈이 내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올라온 것이 눈구름의 배경처럼 다 보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눈은 줄곧 내렸고, 한때 펑펑 퍼부어 오늘 오기로 한 친구에게 점심약속을 미루자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 조금만 조금만 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눈은 그쳤는데 오늘 밤에 또 내린다고 했습니다. 어딘가 폭설이 내릴 거라는 예보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의 일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내 친구는 점심을 먹으며 그게 일과가 되었다고 이야기해 놓고 조금 있다가 또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누구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꾸하면서도 애써서 노년의 의미를 찾은 시몬 드 보부아르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회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그.. 2023. 12. 24.
1999년 12월 11일 저녁 그 애와 내가 달라진 점 늦은 밤 늘 듣던 인사 "다녀왔어요." 오늘 아침 제 엄마에게 주고 나갔다는 아파트 열쇠 오후 5시 30분경 공항 가는 길의 전화, "아빠, 지금 어디 있어요?" 하고 울먹이던 목소리 기다려도 내 집으로 귀가하지 않게 된 것. 그런데도 나는 그 애가 여행을 다녀올 것 같은 느낌으로 지내게 된 것 2023. 11. 16.
서귀포 이종옥 선생님 오랫동안 교육부에서 근무하다가 용인 성복초등학교에 가서 이종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여 선생님들은 모두 이종옥 선생님 후배여서 그분을 "왕언니"라고 불렀습니다. "왕언니"라는 호칭은 거기서 처음 들었기 때문에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미워했습니다. 교육부에서 내려온 교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렇게 미워한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되어 온 것이 미운 것이 아니라 교육부 직원이었기 때문에 미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장이 온다고 해서 당장 사직을 하려다가 교육부에서 근무한 인간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교원들이 그렇게들 미워하는가 직접 만나보기나 하고 명퇴를 하겠다"고 그 학교 교직원들에게 공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분들 .. 2021. 9. 16.
은행나무 아래 그 소녀의 일기장 육십여 년 비밀을 지켰네. 철저히 그 비밀을 지켰네. # 추석이 지나고 은행나무잎에 물이 들고 운동회가 다가왔습니다. 운동회 연습 때문에 오후 수업은 없어졌습니다. 그래 봤자 사시사철 아프고 사시사철 일에 지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올 수도 없는 운동회였습니다. 점심을 굶은 채 운동회 연습에 시달린 오후, 혼자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의 그 운동장에 전교생의 반은 쏟아져 있는데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 거기 그 소녀의 까만 가방이 보였습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거나 기껏해야 장사를 하는데 그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고 그걸 증명하듯 꽃무늬가 수 놓인 가방을 갖고 다니는 소녀. 요즘의 쇼핑백처럼 학용품을 넣고 꺼내기가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 소녀. 4교시 후에 선생님이 되돌려준 일기.. 2021. 3. 8.
외손자와 놀던 곳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저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합니다. 그때마다 이 개울을 확인합니다. 녀석이 어디쯤에서 바지를 걷고 물속을 들여다보았지? 할머니는 어디서 녀석을 바라보았지? 그때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 대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한 해 월반을 해서 지금은 대학 2학년입니다. 코로나만 아니면 훨씬 더 좋겠는데, 매일처럼 홍대 앞에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잘 지내기를, 내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신나는 나날이기를 저곳에서 생각하고, 다시 올라갑니다. 2020. 9. 21.
아파트 마당의 소음 초저녁에나 늦은 밤에나 아파트 마당에서 도란거리는 소리는 한적한 어느 호텔, 아니면 펜션에서 들었던 그 소음처럼 들려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던 그 대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러면 나는 제시간에 먼저 잠자리에 들 때처럼 혹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슬며시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렇지만 그건 지난여름이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떠오르고 또 떠오르는, 그러나 점점 스러져가는 느낌입니다. 이 저녁에는 바람소리가 낙엽이 휩쓸려가는 소리로 들리고 사람들이 도란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든 속절없이 떠나야 할 여름의 서글픈 저녁입니다. 2018. 9. 6.
이 시간 나를 멀리 떠나는 생각들 뒤로 더러 앞으로 빛살처럼 가버리는 것들 2017. 5. 18.
장미 장 미 꽃을 가꾸는 건 좋은 일이고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 봄 기억하고 싶은 순간, 기억하고 싶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 그런 날들은 시간을 따라 가차 없이 밀려가고 있었습니다. # 여름 그러던 어느 날, 장미 두어 송이가 보였고, 그건 기억하고 싶어 하게 된 그 시간에도 거기에 .. 2016. 6. 3.
"어디 갔다 이제 오니?" 그 식당에는 정자 같은 좌석들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바라보는 한낮의 유월 하늘이 너무나 맑고 시원해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떠오르고 무척 미안했습니다. 얼마나 덥겠습니까? 가뭄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요즘은 전화도 오지 않습니다. 추석이 오거나 가을걷이를 해놓아야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미안한 일입니다. 전화를 받기만 했습니다. 일하는데 전화를 하면 방해가 될 것이라는 건 핑계입니다. '아! 소 먹일 시간이 아닌가?' 며칠 전에는 시내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전철역에서 난데없이 그런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늦지 않을까?', '뭐라고 꾸중을 듣지 않을까?'…… 그러다가 이곳은 서울이고, 지금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는, 21세기의 어느 날, 2015년 6월이라는.. 2015. 6. 30.
장 자끄 상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그림 『얼굴 빨개지는 아이』 김호영 옮김, 열린책들 별천지 2009 초등학교 졸업 때였습니다. 중학교에 가려면 호적초본인가 뭔가를 떼어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면사무소는 6년간 오르내린 학교 앞 도로변에서 빤히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곳에 들어갔는데, 그걸 떼는 건 예상외로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건물 계단을 내려오며 주루룩 눈물을 흘렸고, 그러다가 자칫하면 굴러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런 아이였던 내가, 이렇게 뻔뻔해졌습니다. 웬만해선 눈도 깜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저들과 상대하고 저들을 누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런지, 겉으론 이렇게도 뻔뻔하고, 이렇게 뻔뻔한 척밖에 못하는 것인지, 아이들이나 볼 것.. 2014.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