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64

멀쩡한 곳에서 엎어지기 이 얘기를 올려놓으면 나를 업신여길 인간이 드디어 이 꼴이 되었다며 코웃음을 칠 것 같아 없던 일로 하려다가 까짓 거  그런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일 것이어서 그냥 공개해 버리기로 했다. 온 시민이 잘만 다니는 멀쩡한 길에서 사정없이 엎어져 피를 좀 흘린 이야기다.  #지난해 7월 중순 어느 아침나절, 나는 2~3초간 이 동네에선 간선도로라고 할 만한 도로변 인도에 엎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잠시였다.동네 중심가를 향해 걸어 내려가는데 어느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내가 시멘트 보도블록에 얼굴과 배를 대고 엎어진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처구니없어하며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데 가까이 앞서가던 녀석(나보다는 10년쯤 젊어 보이는 '70대 젊은이'로 아직 10년쯤은 안심하고 살아도.. 2025. 3. 5.
김춘수 「不在」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울타리는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철마다 피곤소리없이 저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외롭게 햇살은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없이 歲月은 흘러만 가고꿈결같이 사람들은살다 죽었다.   오늘의 詩人叢書《金春洙詩選 處容》민음사 1974.      하루가 잘도 간다.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나도 지금 그렇게 가고 있을 것이다.조금 전 일어난 것 같은데 밤이 깊었다.어제와 오늘, 내일이 한데 딱 들어붙어 분리할 수가 없게 되었다.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나는 곧 아침의 양치질을 하면서 이 시간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주제넘게 '웬 제목이 不在일까' 하다가 不在보다 확실한 제목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생각해보면 내가 지나다닌 바로 그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 2025. 2. 8.
재숙이네 채소밭 "쌤, 잘 계시나요?" 어제 오후에 재숙이가 전화를 했다. 정초 인사였다.재숙이는 짐작으로 60세? 61세? 딸 둘을 결혼시켜 손주들을 보았다. 막내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초등학교 6학년 다닐 땐 못 먹어서 그랬겠지? 호리호리하고 도무지 말수도 없고 빤히 내 표정만 살폈다. "재숙이구나!"연휴라서 남편과 함께 채소밭에 나왔단다."이 추운 날 채소밭에는 왜?""쌤, 여긴 겨울에도 농사지어요.""허, 그래?"재숙이네는 남해의 섬에 산다. 날씨와 겨울채소 가꾸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나는 재숙이의 설명을 들었다. "손주들은 재숙이 닮았겠지?""쌤, 저 닮으면 안 되죠! 공부도 제일 못했는데..."('그건 그랬지.')"넌 일 나가시는 엄마 대신 동생들 보느라고 공부를 할 시간이 도통 없었잖아." 그.. 2025. 1. 31.
조용필 "꿈" 한창 일할 때는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에 두고(그 일이 뭔가를 나는 밝힐 수 없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한번 해봐야지!' 했었다. 그때는 심지어 '1주일만 주면서 하고 싶은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면 책이라도 한 권 쓰겠다'고 장담을 했었다.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정말 그렇다고도 했지만 빙그레 웃기도 했다.왜 웃었을까?'책은 무슨...' 하고 비웃었을 수도 있고, 자신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이니 어쩔 수 없어 미소를 지었을 수도 있다. 나이가 일흔 가까워지면서 나는 정서적으로 메말라 가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나는 메말라 가는구나! 아, 이미 거의 다 말랐구나!뿌리가 있는 나무는 그 가지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뿌리가 드러나버리면 나뭇가지는 이내 푸석푸석해지고 만다. 내가 그.. 2024. 12. 25.
나는 언제 이렇게 쪼글쪼글해졌나? 아침에 세수하고 얼굴을 닦다가 입 주변과 아래턱이 눈에 들어와 새삼스럽게 놀라웠다.나는 언제 이렇게 쪼글쪼글해졌나? 내 속에는 아직 어린아이가 들어 있어 때로 고개를 내민다. 그럴 땐 언제라도 이 사람들과 헤어져 그 아이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싶은 느낌이기도 하다.그렇지만 이렇게 쪼글쪼글해져서 돌아간들 사람들이 알아보기나 하겠나?언제 내가 팔십 살을 먹었나?계산 착오가 아닐까? 열 살 스무 살은 그렇다 치고 서른마흔쉰을 지나 예순일흔에 나는 어디에서 뭘 했나? 그때의 나는 어떤 나였나? 증거가 있나? 어디에 그 증거가 있나?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조치부터 해야 할까?누가 나더러 나이만 먹었지 무엇 하나 의젓한 게 없지 않냐고 하면 지금까지의 한심한 행위, 바보 같은 행위를 '일시에.. 2024. 12. 18.
택시 타기 "백발 손님 안 태운다." 정말이었구나! 빈말이 아니었구나......지팡이 짚고 비닐봉지 든 노인이 손을 들어도 서너 대가 그냥 지나갔다.겨우 잡은 택시, 기사도 백발노인이다.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난 그러지 않아요."돈 받고 태워 주는 거지만 고마워하라는 건가?고마운 일이긴 하다. 차려입어봤자 노인 표가 다 나겠지?겨울에는 캡을 쓴다. 그것조차 밉게 보이는 요소가 되겠지?어떻게 하면 택시를 탈 수 있을지, 궁리가 필요하다.그런데도 이제 궁리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다. .................................................................. 2019년 9월 21일에 이렇게 써놓았다.지금은 빈 택시가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군데군데 모여 있다.핸드폰에 무슨 앱을.. 2024. 12. 17.
그저 손만 맞잡고 있다 내 옆에는 노부부가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맞잡고 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방금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닭고기를 잘라 주고, 자기 것에서 완두콩과 마늘 조각도 골라내 할아버지한테 주었다. 할아버지는 음식을 천천히 씹는다. 할머니가 한 번씩 할아버지 입을 닦아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두 시간마다 약봉지를 건네는데, 할아버지는 먹을 때마다 약 넘기는 걸 힘들어하신다. 그러면 할머니가 할아버지 고개를 뒤로 젖혀 물과 함께 알약이 넘어가도록 해주신다. 두 사람은 영화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서로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손만 맞잡고 있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을 저렇게 잡고 있겠지. 그땐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겠지.  《행복만을 보았다》(그레구아.. 2024. 12. 16.
버리기 - 다 버리기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과 수의壽衣는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 2024. 12. 6.
전문가들의 시대 혹시 만물박사가 사라진 것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시대가 특정한 업무, 가령 역청의 보관이나 배에 화물을 선적하는 컨베이어의 건설 같은 업무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장인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슬픔이 좀 덜어질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인체의 간 효소의 활동만 연구하는 의대 교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나 또는 세상의 학자들 가운데 수백 명은 오로지 프랑크족 역사 중에서도 메로빙거 왕조 후기만 연구하면서 그 결과를 튀빙겐 대학 인문학부에서 발간하는 학술 정기간행물 《중세 고고학》에 발표한다는 사실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알랭 드 보통이 쓴《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읽었다(23~24).그런 전문가들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고? 무슨 위로?고색창연한 연구실에 들어앉아서.. 2024. 12. 1.
아무래도 겨울 밤새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직 가을이지 여겼는데 겨울은 온 것 같다.긴 계절로 들어선 것이다.그럼 가버린 가을에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입동(立冬) 지나고 소설(小雪)도 지났으니 "가을" "가을" 할 것 없었다.별일 없으면 내년 봄을 맞이할 수 있겠지.조심조심 지내면 가능할 것이다. 오늘부터 겨울이다. 그래, 겨울이라고 하자. 받아들이자. 지금까지 겨울을 좋아했으니까 또 그렇게 여기자. 2024. 11. 26.
시월과 십일월 시월엔 눈여겨보지 않은 새 가을이 되어버렸고 십일월에는 하루하루가 다르다.한 해 한 해 이 '골짜기'로 끌려들어 올수록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적막하다.모든 것은 별 수가 없다. 2024. 11. 18.
"전에 알던 여자애들은..."(카뮈) 동기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 누군가가 사연과 함께 사진을 보낸다. 면면을 살펴보며 누가 누군지 확인하고 어슴푸레한 경우에는 사진을 확대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알아보지 못한 경우에는 확대해 봤자 별 수 없다. 고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학교 다닐 때 잘 나가던 애들도 함께 폭삭 늙었다는 것이다. 혈기왕성해서 팔팔 뛰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헙수룩한데, 억지로 미소를 짓거나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쓴 표정이 역력하여 더욱 가련해 보인다. 검은 머리는 분명 염색을 한 거지. 별 수 있나!여자들도 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지금도 매력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고약한 일이다.아, 이럴 수가......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나! 이럴 수가?'사진보기'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건 결국 내 모습이다.그 사진에 .. 2024.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