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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42

내가 듣는 것들 소식 없다고 서운했겠지.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의 일이야. 저기 있을 땐 음악을 들어. 여기 있을 땐 책을 '듣고'. 그것뿐이야. 다른 일은 없어.저기 있을 땐 또 생각하지. 여기선 음악을 '듣고' 거기 가면 책을 듣는다고. 다른 일은 없어. 세상의 일도 내 일도 나의 것이 아니야. 음악은 왜 들어? 책은 왜 들어? 그렇게 물으면, 둘 다 같은 거야. 음악은 지금의 나와 지난날들, 더러 앞으로의 내가 이리저리 떠오르는 것이고, 책은 구체적이어서 '그래,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 정도야.결국은 같은 거야. 둘 다 듣고 나면 그만이야. 그것들은 다 '순간'이야. 앞으로도 소식 없을 거야. 나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 2024. 5. 10.
민들레꽃 바라보기 "뭘 그렇게 들여다봐? 지나가다 말고.""너희 좀 보느라고.""한심해? 초라해?""굳이 후손을 퍼뜨려보겠다고, 일찌감치 꽃 피우고, 어디로든 좋은 곳으로 날아가서 내년에 꽃으로 피어나라고, 그렇게 꽃씨를 달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려 서 있는 가련한 꼴이라니...""어쭈구리, 너희 인간들은 다른 줄 알아?""우리가 왜?""고달프긴 마찬가지지. 오죽하면 결혼을 마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고달픈 것만도 아니지. 온갖 이유가 다 있을걸?""그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혼자 살아가는 편이 낫다는 경우지. 애써 결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지.""내가 그 말이야, 이 사람아!""자식 두는 의미가 뭔지 의구심이 들긴 해.""잘해주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는 자식도 있지? 그렇지? 갖다.. 2024. 5. 9.
왜 그렇게 앉아 있나요? 비는 오는데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좀 민망합니다. 나는 아예 그 벤치나 의자에 앉지 않으려고 몸이 무거우면 선 채로 좀 쉬었다 걷지만, 그렇게 하는 건 나도 그렇게 앉게 되면 지금 그 모습과 한 치의 다름이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망하겠지요. 아니, 그 벤치에 앉게 되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것입니다. 왜 혼자 그렇게 앉아 있습니까? 역시 노년의 문제겠지요? "노년에 관하여"(키케로)라는 책 혹 읽어보셨습니까? 키케로는 흔히 '노년에는 큰일을 할 수 없다' '노년에는 몸이 쇠약해진다'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노년이 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고 불평들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노년에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체력 저하.. 2024. 4. 22.
말씀 낮추시지요 허리를 구부리고 뭘 좀 하고 있는데 누군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럴 때 "예~" 하고 대충 넘어가는 게 불가능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달려가 울타리 사이로 내다봤더니 웬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이웃'이라고 했다. 반가워하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불쑥 "전 올해 육십입니다. 자주 뵐 텐데 말씀 낮추시지요."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수가 있나. 응겁결에 대답했다. "아닙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저도 너무나 좋습니다." 종일 생각했다. '아, 이거... 어쩌다가 육십 먹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됐지? 말을 놓으라니, 그런다고 덥석 말을 놓진 않겠지만 빈말이라도 그렇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난 이젠 정말 늙었나 보다. 이거 참...' 도대체 난 뭘.. 2024. 4. 7.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결론 《노년》 《노년》 그 방대한 책에서 노년의 슬픔을 조목조목 파헤치고 나열한 보부아르는 짤막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보부아르는 결론에서도 결국 노년의 슬픔을 요약해서 제시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노년을 슬프게 혹은 반항적으로 맞아들인다. 노년은 죽음 자체보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삶에 대립시켜야 하는 것은 죽음보다 차라리 노년이다. 노년은 죽음의 풍자적 모방이다. 죽음은 삶을 운명으로 변화시킨다. 어느 면에서 죽음은 삶에 절대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삶을 구원한다. 현재의 과거에 대한 우위는─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그렇지만─현재가 과거에 있었던 것의 쇠퇴나 혹은 과거의 부인인 경우 특히 슬픈 것이다. 옛 사건들, 예전에 획득한 지식들은 생명의 불이 꺼진 삶 속에서 자기 자리를 지.. 2024. 2. 28.
일본 영화 《플랜75》와 소설 《당신의 노후》 2022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하야카와 감독 인터뷰 기사를 봤다(「"경제 좀먹는 노인" 총살..."이젠 현실 같다"는 섬뜩한 이 영화」 중앙일보 2022.10.12). 기사의 전반부는 이렇다. "고령층이 일본 경제를 좀먹고,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부담감을 지우고 있다. 노인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 젊은 남성이 이 같은 주장을 남긴 뒤 노인들을 총기로 살해한다. 유사한 노인 혐오 범죄가 잇따르자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에게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제정한다. 이른바 '플랜75' 정책으로, 국민이 죽음을 신청하면 정부가 존엄사 절차를 시행해 준다. 이 제도를 택하는 노인에게는 '위로금' 명목으로 10만 엔(약 98만 원)도 지.. 2024. 2. 21.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 정향재 옮김, 현대문학 2009 잠자는 미녀의 집은 파도가 밀려와 부딪히는 절벽 위 숲 속에 있었다.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으신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아가씨를 깨우려 하지 말아주세요. 아무리 깨우려고 하셔도 결코 깨지 않을 테니까요. 아가씨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관리하는 여자가 제시하는 규칙이다. '안심할 수 있는 손님'만 출입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여자를 여자로서 다룰 수 없는 노인들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67세의 에구치는 다섯 차례에 걸쳐 그 집을 찾아간다.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고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서 그동안 그가 만난 여성들, 여성의 아름다움, 자신의 막내딸의 일들을 회상한다... 2024. 2. 20.
냉면 시키면 불맛 나는 불고기도 주는 집 아내와 함께 식품가게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자그마한 그 냉면집이 눈에 띄어서 김 교수 얘기를 꺼냈다. "저 가게 김 교수가 혼자 드나들던 집이야." "나도 가봤어. 그저 그래." "김 교수는 맛있다던데? 몇 번이나 얘기했어. 냉면 시키면 불맛 나는 불고기도 준다면서." "친구들하고 가봤는데, 별로던데..." "냉면이나 불고기나 평생 안 먹어도 섭섭해하지 않을 사람이니 어느 가게엘 가면 맛있다고 할까?" "......"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겠지?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탈이다. 아이들과 시험문제 풀이를 할 때처럼 매사에 정곡을 찔러야 직성이 풀린다. 죽을 때는 이 성질머리를 고쳐서 갖고 갈 수 있을까? 별수 없이 그냥 갖고 가겠지? "그 버릇 개 주나?"라는 속담도 있으니까. 인간은 고쳐서 쓸.. 2024. 2. 3.
노년은 슬프다(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방대한 저서《노년》에서 노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제1부 외부에서 본 노년 제1장 노화와 생물학 제2장 민족학적 자료들 제3장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제4장 현대 사회에서의 노년 제2부 세계 속의 존재 제5장 노년의 발견과 수락 : 육체의 산 경험 제6장 시간, 활동, 역사 제7장 노년의 일상생활 제8장 노년의 실례들 결론 아래는 제7장 '노년과 일상생활' 중에서 발췌해 본 문장들이다. 노년은 비참하고 슬프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노년은 슬프고 비참하다. 어쩔 수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론에서 그 비참함, 슬픔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책의 부제도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이다. 나는 그 결론, 부제를 보면서도, 노년은 .. 2024. 1. 22.
어처구니없음 그리고 후회 지난 23일,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텅 빈'(소엽)이란 에세이를 보았다. 곱게 비질을 해 둔 절 마당으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그 고운 마당을 다시 걸어 나오며 마음을 비우는 데는 빗자루도 필요 없다는 걸 생각했다는, 짧고도 아름다운 글이었다. 문득 일본의 어느 사찰에서 곱게 빗질을 한 흔적이 있는 마당을 보았던 일이 생각나더라는 댓글을 썼는데 그 끝에 조선의 문인 이양연의 시 '야설(野雪)'을 언급했더니 카페지기 설목(雪木)이 보고, 이미 알고 있는 시인 걸 확인하려고 그랬겠지만, 그 시를 보고 싶다고 했다. '쥐불놀이'라는 사람은, 카페 주인 설목이 견제할 때까지 저렇게 세 번에 걸쳐 나에게 '도전'을 해왔는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더욱 그래서 답을 할 .. 2023. 12. 26.
삶의 상수(常數), 소홀치 않은 장수세(長壽稅) 고난, 수모, 좌절, 소외는 삶의 상수이다. 이 상수의 강력한 관성이 노년의 삶을 추동하는 것이다. 장수가 반드시 호강은 아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장수세는 소홀치 않다. 지난해 "현대문학" 9월호(115면)에서 원로 평론가 유종호(1935~) 선생이「오랜 삶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렇게 썼다. 고난, 수모, 좌절, 소외, 이것들이 강력한 관성이 되어 오히려 그의 노년을 지탱해 주는 삶의 상수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지만 고난, 수모, 좌절, 소외를 당하면서도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하물며 나 같은 처지에 뭘 따지겠나. 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자. 일일이 따져서 뭘 하겠는가. 길면 긴 대로 생각.. 2023. 12. 6.
깊은 밤 기다림 새벽에 일어나는 아내는 잠이 들고, 아직 누가 귀가하지 않은 듯한 느낌일 때가 있다.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난 지 오래되어 가족은 벌써부터 단 둘인데도 그렇다. 조금 서글퍼지다가 기억들은 그 서글픔이 밴 따뜻함으로 바뀐다. 살아가는 일은, 나는 이제 거의 다 괜찮다. 2023.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