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보험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 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다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이 빨아 입고 가자, 관과 수의壽衣는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 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
"허송세월"(김훈)에 나온다(51~52).
개운한 느낌이다.
버려봐서 알 수 있다. 책도 옷도 그렇게 버렸다. 아직 남았다. 읽지 않고 지낼 수는 없고, 발가벗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제목을 바꿔야 하나? '버리기-거의 다 버리기'?).
들인 돈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그래서 책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보게 되었고 눈치를 봐서 한두 권 구입하기도 한다.
옷은, 속옷과 작업복 외에는 사지 않는다. 사야 한다고 권하면 사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댄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는 조건을 덧붙인다. 일전에는 어쩔 수 없어서 비싼 점퍼 하나를 샀다. 38만 원이라니! 즉석에서 그랬다. "이건 백화점 출장용이야." 아내를 따라 백화점에 가야 할 때 요즘은 하인을 거느리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어서 작업복 차림으로는 아무래도 거북하기 때문이었다.
버리기 시작하니까 버리는 건 좋은 일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 기분을 느끼려고 혼자 있을 땐 이 작은 집 이곳저곳 버릴 것 없나 살펴본다.
'책도 버렸는데 뭘 못 버리겠나!' '뭐가 그리 소중하겠나!'...... 용감하게 된 것이다.
그럼 내게 뭐가 남아야 하나?
책? 아니다!
옷? 아니다!
가구? 우습다!
돈? 그것도 아니다. 돈, 돈, 하는 세상이어서 신중하게 생각해 봐도 아니다!
그럼 뭐가 남아야 하나?
가고 나서 한동안 남아 있을 나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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