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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버리기 - 책 버리기

by 답설재 2024. 12. 5.

 

 

 

 

책을 버리며 산다. 전에는 한꺼번에 수백 권씩이었는데 그간 많이 줄어들어 지금은 조금씩 조금씩 버린다. 누가 볼까 봐 주변을 살피지만 버리고 나면 개운하다. 책 몇 권을 버렸는데 매번 무슨 큰일을 치른 느낌이 든다.

 

책을 모으며 살던 때가 있었다. 늘어난 책을 보며 흐뭇해했다. 사람들이 보고 놀라면 자랑스러웠지만 혼자서도 그랬다. 삶의 보람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것이다. 버리는 건 처음이 어렵지 나중엔 어려울 것도 없었다.

 

자서전 버리기는 예외다. 자서전은 책 중에서도 시원찮은 것들인데도 버리고 나면 개운하지 않다. 본인이 "지금도 갖고 있겠지요?" 할까 봐 켕긴다. 아직은 묻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긴 하다. 죽기 전까지 그렇게 물어오는 사례가 없어야 하는데 모르겠다.

 

 

극히 한정된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가장 민망한 것은 전기나 회고록 같은 자전적인 책에서 발견되는 거의 명명백백한 허위 진술이나 사실 왜곡이다.

(...)

공을 내세우고 과를 덮으려는 인지상정에 휩쓸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문제는 도가 넘치고 왜곡의 속셈이 너무 타산적이라는 점에 있다. 독자를 멍청이로 취급하지 않는 한 도저히 발설할 수 없는 새빨간 거짓 진술이나 은폐와 왜곡을 자행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정치 지향이 인물들이 내는 책에서는 그런 성향이 심하다. 사실과 반대되거나 현저히 굴절된 진술만이 거짓이 아니다. 비중 있는 엄연한 사실의 의도적 생략도 거짓이고 사교적 목적이나 관대함을 자랑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주변 인물의 미화나 일화의 굴절된 전달도 거짓이다.

 

 

유종호의 에세이 '정직에 대하여'에서 봤다(《현대문학》 2024년 10월호)

이 글 읽을 땐 마음이 가벼웠다. 자서전을 과소평가 혹은 평가절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옮겨 놓고 내 지인들 자서전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나? 버린 책을 다시 찾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자서전을 준 이 중 누군가 내 블로그 찾아와서 이 글 보고 덤벼들지 않을까 싶긴 한데 짐작으로는 그들이 내 블로그를 읽을 리는 만무하다.

버리고 살아야 하는데, 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는 것조차 쉽질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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