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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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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저렇게 앉아서 한참 동안 온몸을 핥는다.자근자근 깨물기도 한다.실내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내게 긁어달라고 하겠지.그런 요청을 받기 전에 수시로 긁어주겠지.목욕도 시켜주겠지. 오늘 아내를 따라 들어간 어느 가게에서 반려동물 전용 샴푸가 17,000원인 걸 봤다.나는 그런 건 일체 해주지 않는다. 못 본 체한다. 저쪽도 기대하지도 않는다.내가 보기에 저 고양이의 보건위생의료 행위는 저렇게 핥고 깨무는 게 유일하다.미안하다. 2026. 9. 21.
이문재 / 늦었지만, 팩트 체크 손을 잡을 때보다 손잡이를 잡을 때가 더 많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고 물 끓이는 시간보다 물을 식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게 느껴진다 비교와 대조로 이루어진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많다 여행 가는 날보다 여행을 준비하는 날이 더 길지 않은가 여행을 하는 이유가 예약한 것을 확인하러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으며 사람이 아니고 스마트폰이 여행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사실, 사랑할 때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가 더 많다 좋아할 때보다 미워할 때 에너지가 더 많이 쓰인다 포장지보다 더 큰 상품은 세상에 없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갈 때 둘러보라, 차창 밖을 보는 사람보다 손에 든 창을 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물건을 살 때보다 물건을 버릴 때 물건이 더 많아진다 인류가 구십.. 2026. 9. 20.
인사하러 온 고양이 어제(금요일) 오후, 당장 찾아왔다.닷새만에 만났다.얼른 먹이를 내주었는데 어디서 식사를 했는지 살펴보기만 하고 다시 엎드렸다.한참 지나 내다봤더니 가고 없었다.저녁에 다시 와서 먹이를 조금 먹었지만 흉내를 내는 정도였다.새끼들은 어제는 오지 않았고, 오늘 오전에 어미를 따라 세 마리만 다녀갔다. 고양이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이름도 묻지 않고, 외로운가도 묻지 않는다.처음에는 답답하고 한심했지만 이제 편안하다.약속 같은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그것도 편하다.우리가 둘 다 사람이라면 이미 온갖 얘기를 다했을 것이다.나는 허언(虛言)도 했을 것이다.고양이는 나를 별로 믿음직하진 못하다고, 주의해야 한다고, 인간들은 흔히 그렇다고 평가할 것이다.허풍쟁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말로써 .. 2026. 9. 19.
사랑에 적합한 악기 연극의 세 천재는 아테네의 아이스킬로스, 런던의 셰익스피어, 교토의 제아미이다.제아미 모토키요는, 15세기 초엽 사랑에 적합한 악기를 고안해 냈다.가죽이 아니라 비단으로 씌운 북이다.그것은 침묵의 악기다.그 북은 교토 황궁의 뜰에 있는 월계수 고목의 가지에 매달려 있다.세월이 흘러 나무는 거대해졌다. 월계수는 호숫가에 심어져 있었다.공주가 단언하기를, 만일 누군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북을 살짝만 두드려도 천으로부터 소리가 생겨나, 퍼져서 규방에까지 크게 울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 공주는 침상을 떠날 것이다. 공주는 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공주는 사랑하는 님에게 몸을 맡기러 호숫가로 달려갈 것이다.정원사가 손으로 천을 두드려보니 허사여서, 가장 깊은 침묵만을 끌어냈을 뿐이다.그는 호수 표면.. 2026. 9. 18.
내 마음 이것을 어떻게 규명할 수 있나.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나.이것만큼 빨리 흐려지는 건 없다.이것만큼 빨리 상하는 건 없다.이것만큼 잘 변질되는 건 없다.잠시라도 그냥 두면 곧 이것만큼 더러운 건 없다.이것만큼 가벼운 것도 없다.이것 때문에 끊임없이 신경을 쓴다.잠시라도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일이 되어가고 있다.그 일에 고심하고 번민에 싸인다.날마다 나를 돕고 싶어 하는 건 저것들뿐이다. 잎이 피고 꽃이 피었다 진다. 하늘과 별, 구름과 안개, 눈비가 구경하듯 다녀간다.가끔 음악이 거들어준다. 더러 시인이 선물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므로 그림 같다.그리움으로만 떠오르는 제자들도 있긴 하다. 그것들을 떠올리면 좀 맑아지려고 한다.내 마음은 이렇게도 한심한 것인가.이러다가 말.. 2026. 9. 17.
심너울(장르소설) 《밤의 글자들》 김현성이란 평범한 젊은이가 어느 날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이방원으로 다시 태어나 좀 편안하게 살 수 없을까 싶어 글자(한글)를 만들었으나 정도전의 의도에 따라 금령(禁令)이 내려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운명(역사)대로 정도전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는 얘기다.나는 장르(무협) 소설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중편(81쪽)을 순식간에 읽었다. 그러면서 '이런 소설이라면 좋아하고 말고, 그런 생각 할 것도 없지.' 했다.심너울, 대단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끝난다.김현성은 스물한 살짜리 남자였고, 사는 것이 재미없었다. 그는 사학과 대학생이었는데, 원래 역사에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수능을 치고 점수에 맞춰서 어영부영 전공을 하게 되었다. 역사 공부는 흥미롭지는 않았으나 그렇.. 2026. 9. 16.
조인정 / 할머니가 뿌린 상추씨는 몇 장의 상추가 되나요? 할머니가 상추씨를 뿌렸는데매일매일 상추잎이 나오는 거야 할머니가 "어머어머, 신기하기도 하지." 하고 말할 때마다상추잎은 계속 나왔어 할머니가 뿌린 상추씨는 몇 장의 상추가 되나요? 궁금한 개미가 달팽이가 지렁이가 모여서한 장 두 장 세어 보다가 바람이 분다고 비가 온다고상추잎이 몇 장인지 잊어버리고 다시 세어 보다가 또 잊어버리고해가 질 때까지 그냥 놀다가 갔지 어차피 새로운 상추잎은 또 나올 거니까 할머니가 뿌린 상추씨는 몇 장의 상추가 되나요? 아무도 상추씨가 몇 장의 상추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어차피 새로운 상추잎은 또 나올 거니까 조인정_ 2022년 '블랙' 제2호에 동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제8회 동시마중 작품상, 제14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문학동네.. 2026. 9. 15.
내것들 연필 네 자루, 이렇게라면 백 년도 더 쓸 수 있겠지? 내가 없어진 날 누가 무슨 생각을 할까?천일염 몇 포대, 일주일에 몇 알씩 줄어들지만 구입하지도 않아도 쌓여가는 희한한(가령 히말라야 핑크 솔트 같은) 소금이 내 소비량을 능가한다.호미 여섯 자루, 혼자 쓰니까 몇 년은 더 쓸 수 있을 텐데 가을 들어 두 자루를 새로 샀다. 내가 왜 이럴까?그리고 책, 책, 책장들...이것들을 어떻게 하나... 이런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다. 2026. 9. 14.
인간과 고양이 인간에게는 고양이보다 못한 면도 있겠지만, 고양이보다 나은 면도 있을 것이다. 많을 것이다.인간이 고양이보다 나은 면?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그걸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인간, 인류, 범위를 그렇게 거창하게 설정하지 말고 나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저것들 보다 나은 게 뭘까?'많긴 하겠는데 '이거지!' 할 만한 게 얼른 떠오르질 않네?나폴레옹 같은 영웅들, 지금 세상을 주름잡는 어느 나라 대통령 같으면 고양이보다 뛰어난 점을 하루종일이라도 열거할 수 있겠지?마침내 나는 바보가 되었나? 2026. 9. 13.
김개미 / 콩의 곧 나는 콩깍지 속에 있어 빛을 본 적 없고어둠을 만난 적 없어 곧 밖으로 나갈 거라는데'곧'이란 언제를 말하는 걸까 아침을 먹고 나서 용감해졌다가저녁을 먹고 나서 무서워진오늘은 아닌가 봐 궁금한 게 많지만친구들은 내가 아는 것만 말하고모르는 건 말하지 않아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거기서 나는 무엇일까 알 수 있는 건 바람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바람이 하는 일은 알아 어떤 날은 겁이 나고어떤 날은 지겨워 그제는 뛰쳐나가고 싶었고어제는 끝까지 남고 싶었어 몇 번 더 비가 내리면모든 걸 알게 될 거란 소문이야 비는 뭘까소리가 멋지다는 것 말고무엇을 가졌을까 나는 콩조용하고 따뜻해동그랗게 눈을 뜨고상상하고 상상하고 있어 김개미_ 2005년 『시와 반시』에 시를, 2010년 『창비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울.. 2026. 9. 12.
잡초들에 대한 간섭 AI가 '선괭이밥'이라고 했다.하트 모양을 닮은 세 장의 잎이 특징이란다. 대개 그렇긴 하지만 여러해살이풀이라는 건 관리상 끔찍하다. 하기야 이 풀이 나지 않으면 다른 풀이 날 것이니 끔찍하고말고 할 것도 없다. 뽑아내긴 쉽기도 하고 까다롭기도 하다. 뿌리가 억세지 않은 대신 가느다란 실뿌리가 수없이 많고 잘도 끊어진다. 저것들은 착근(着根)하는 것도 쉽다. 뿌리가 드러나면 금방 기운을 잃고 마르기 시작하지만 흙만 닿으면 살아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선괭이밥 생명유지 연구본부'에서 인간의 무지막지한 손길을 피해서 살아남는 방안을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일 것이다.내가 간섭을 잘할 수가 없어서 두어 평 이 빈터에는 온갖 풀들이 번갈아 솟아오른다. 간섭은 제초제를 뿌리거나 잣나무 낙엽으로 아주 두껍게 덮.. 2026. 9. 11.
책 읽는 여자 벤치 앞을 지나며 책 읽는 여자를 봤다.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그게 괜찮은, 권장할 만한 일이었다면 이번에는 무슨 책인지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저 여자는 허접한 노인 때문에 기분을 잡쳐서 저 멋진 벤치에서의 독서를 그만두었을 것이다.아파트 바로 앞에 우리 동네 도서관이 있다. 책을 빌려 오다가 날씨도 좋은 데다가 벤치가 깨끗해서 앉게 되었겠지.집에 와서 내다봤더니 아직도 저렇게 앉아 있네! 2026.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