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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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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바라보기와 낙엽 치우기 우리 아파트 청소하는 분들은 딱하다. 아주머니들은 각층 복도와 현관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현관과 현관 바깥 마당까지 책임지고 있다. 봄에 그 마당 보도블록 사이로 솟아오르는 잔잔한 풀을 뽑고 있는 걸 보면 미안해서 집어치우고 집에 가시라고 하고 싶은데, 세상에 내 말대로 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나.그래 인사만 하고 본체만체해 버린다 그중 제일 딱한 분은 키가 아담하고 까무잡잡하고 말수가 적은 육십 대 초반 남자다. 그는 빗자루도 다양한 데다가 나뭇잎을 쓸어 모으는 송풍기도 소리가 크고 바람도 센 것과 비교적 조용하고 약한 것 두 가지를 사용하므로 쓰레받기와 쓰레기통까지 리어카에 싣고 가는 걸 보면 장비만 해도 거창하다.이분 일하는 모습의 특징은 최대한 부지런하고 절대로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는다.. 2026. 11. 3.
"인터넷은 지적 빈자에게 폐해가 다 크다" 움베르토 에코는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인터넷도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정말요?"하고 싶은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인터넷이 나오고 "이 세상에서, 온 세상의 사무실에서, 종이가 사라진다! 이제 모든 문서는 인터넷으로 주고받는다."고 했을 때, 나는 '살다 보니 별일 다 보는구나' 싶었고, 마침내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말이 떠돌았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큰일났잖아!나는 낙심이 되어 내 책장을 바라보았다. 저게 다 사라진다고?그럼 저 책들을 다 어떻게 하지? 어디에 어떻게 버리지?지금부터라도 일체 사지 않아야 하겠지? 그랬던 것인데, 종이책은 점점 더 좋아지고 앞으로도 이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종이책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승승장구할 기세다. "내가 사라.. 2026. 11. 2.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계수나무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미안하고 건방진 말이긴 하지만 사람보다 더 좋다. 어쩔 수 없다.밖에 나가면 나무 구경하는 재미가 반 이상이고 이 방에서도 걸핏하면 일어서서 나무들을 내려다본다. 수백 수천 번 본 나무를 또 보고 또 보고 매번 본다. 하루하루 다르다. 우리 아파트는 건설회사 사장이 마음먹고 지은 아파트여서 수목이 다양하고 멋있다. 이렇게만 얘기해선 안 되는데 길게 쓰기가 귀찮아져서 어쩔 수 없다.나 혼자 그렇게 부르는 중앙공원(중앙놀이터 말고 중앙의 숲공원)에는 몇 가지 나무가 밀식되어 있다. 상점가 위쪽 피트니스센터로 가는 방향으로 보면 오른쪽에는 여러 종의 단풍나무와 계수나무가 여남은 그루씩 늘어서 숲을 이루고 있어서 한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도 있다. 아래에는 이끼나 맥문동이 자란다. .. 2026. 11. 1.
음악과 사랑은 길을 잃게 한다 "음악은 음악일 뿐인데 훌륭한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으면 왜 두 손을 모으게 될까요?" 오늘 오전,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그렇게 말했다.음악으로도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일단 라디오로 종일, 늦은 밤까지, 새벽까지 음악을 듣는 데는 아무런 장애나 통제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사회자나 전문가가 말이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살짝 그 시간대의 다른 음악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그렇긴 해도 종일 음악만 들려주는 방송이 있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음악 말고 그런 분야가 있나?문학은(책을 읽는 건),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조건이 좀 까다롭다. 읽을 책이 있어야 하고 상태가 양호해야 한다.음악을 라디오로 .. 2026. 10. 31.
전욱진 / 스탄 게츠 서로의 종아리를 주무르다저녁을 나눠 먹고 설거지하는 사람의 굽은 등에한참 마음을 쏟다가 같이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하면 이 시가 시작된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걸까 내가 물으면이렇게 간단해도 되지 그 사람이 답하고 내 삶은 알몸으로 밖을 배회한다자긴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처음부터 숨긴 적 없다고 이렇게 끝나면 된다고 전욱진_2014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여름의 사실』, 산문집 『선릉과 정릉』이 있다. ☞《문학동네》 119호(2024년 여름). 나도 이렇게 살자는 생각은 수없이 했다. 불가능하다. 내 세상에서는 내 환경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고, 나는 뭐가 이리도 복잡할까, 늘 그렇게 생각하며 번민에 휩싸여 정처 없이 가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핑계에 지나지.. 2026. 10. 30.
내 기억속 아이들 가끔씩 함께했던 아이들이 나를 만나주러 온다.약속을 하면 하루에 몇 번씩 그 아이들을 생각한다.우리가 함께하던 그 교실의 귀엽고 예쁘고 씩씩하던 모습들을 떠올린다.물론 지금의 모습도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꾸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그래서 '아무개' 하면 예전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가 사라지기 전에 내 기억 속 그 모습들을 밖으로 꺼내서 한 장씩 인화해 나눠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선물이 될까 아쉬워할 때가 있다.걔네들도 이제 50대 중반에서 60대 후반에 걸쳐 있다. 그들이 내 기억 속 저희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이미지를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간직해 준 걸 엄청 고마워하겠지?이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에이아이(AI: ChatGP.. 2026. 10. 29.
김사인 /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다음 생은 노르웨이에서 살겠네.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고여덟 배불뚝이 오한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길어질 때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브뤼겐 지나 시장 옆 좌판에서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싱겁게 몇 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골목 입구도 좋고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밤 두 시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이겠네.미끄러질듯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 시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나, 요한센(아니면 귈라 유하츠도 괜찮은 이름)오줌을 누며 잠시 막막.. 2026. 10. 28.
내가 처음 만난 다정한 여성 식사를 시작하려다가 올해로 꼭 60년 전 수정약국 아주머니를 떠올렸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떨어져서 하릴없이 지내던 봄,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지난밤부터 추적추적 비를 맞던 날 새벽, 비닐우산을 쓰고 찾아간 황간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상경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늦은 봄 어느 날 약국댁을 찾아간 시간은 마침 저녁식사시간이 가까운 때였다.아주머니는 곧 식사시간이니까 잠시 쉬라고 했다.아주머니는 수수한 차림이었고 몸집이 좀 있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다.서울 사람들은 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 있었을 것이다.식사시간이 되자 너른 방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그쯤 되면 시골에서 온 나도 스스름없을 만도 했지만 더 주눅이 들었다. 내 밥그릇과 수저가 따로 있.. 2026. 10. 27.
두물머리에 성희네가 설치한 정원 성희가 카카오톡에 사진 두 장을 올렸다. 조경(造景) 작품 같긴 해도 설명이 하나도 없어 파악이 되지 않았다. 성희가 사진을 올 린 건 지난봄 내가 카톡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성희는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사람이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정성스럽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말수가 적고, 한마디로 나하고는 정반대인 여성이다. 그래서 나는 성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83년에 만났지 싶다. 그러니까 지금 56세쯤?조경설계사무소 온[Onn]을 운영한다. 아니 성희는 서울 송파구 충민로에 있는 그 회사 직원이다. 운영은 소장인 남편이 하겠지? "이 사진 제목처럼 간단한 설명 좀 부탁해."대화란에 그렇게 써놓았더니 카톡이 아니라 문자메시지로 긴 답신이 왔다. 나는 성희의 이런 태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잠시 '.. 2026. 10. 26.
김사인 /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라고 하니까 자연히 그 핍박을 받았겠구나 싶다.호주머니가 비었다니까 그 봐, 싶다.이곳의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고향이고 어디고 다 피었을 것이다.그 고향에는 울며 그간의 일들을 여쭐 아버지가 있나?없다. 저세상으로 간지 수십 년이다.그럼 어떻게 하나,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이 사정을 이야기하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은 (이렇게 말하면 가벼운 표현이지만) 너무 멋지다.한번 들면 놓기가 쉽질 않다.자주 시집 내는 시인도 아니어서 시인에겐 참 미안하지만 나는 김사인 시인은 이 시집 한 권으로도 됐다, .. 2026. 10. 25.
인생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교육부에서는 더러 전문성이 풍부한 선배가 보여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인물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 중 어떤 분은 흠모하는 마음이 지금도 변함없어서 그분의 노쇠현상을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교육부 근무시절에는 드높이 우러렀다가 '저런 인물이었나' 하고 실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극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그 선배는 전문지식이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고, 신념을 지켜야 할 때 단호한 태도를 보여서 더욱 감동을 주었다. 그 얘기는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기가 어렵다.어언 나도 교육부를 나와서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서 술을 마시며 나를 호출한다는 연락을.. 2026. 10. 24.
'은밀한 생'이란 어떤 것일까?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쟁이 종식되는 전야에, 패배든 승리든 간에 모든 것이 술렁이고, 이해타산의 혼돈이 무관심으로 바뀌고, 권력이 무정부 상태와 무정형의 한계점에 이르며, 폭력이 스스로 균형을 상실하는 이 순간을 묘사한다. 모든 것이 붕괴되는 이 순간은 사회적인, 아니 오히려 비사회적인 일종의 황홀경과도 같으며, 인간 사회의 원자핵과도 같다. 인간 번식의 태풍의 눈, 기이한 평화가 유지된다. 무질서의 심연 깊은 곳에는 완전한 의기소침이 지배한다.그것은 극도의 갈망이다.(...)나는 불편하지만 독립적이고 복잡하지만 은밀한 삶을 더 좋아했다. 나는 훈장들을 거부했고, 음악회에, 연극에, 오페라에, 영화에, 공식 모임에, 환영회 따위의 의례에 별 이유 없이 받는 초대들은 그로 인해 받게 될 부담과 시.. 2026.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