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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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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처음 다정했던 여성 식사를 시작하려다가 올해로 꼭 60년 전 수정약국 아주머니를 떠올렸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떨어져서 하릴없이 지내던 봄,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지난밤부터 추적추적 비를 맞던 날 새벽, 비닐우산을 쓰고 찾아간 황간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상경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늦은 봄 어느 날 약국댁을 찾아간 시간은 마침 저녁식사시간이 가까운 때였다.아주머니는 곧 식사시간이니까 잠시 쉬라고 했다.아주머니는 수수한 차림이었고 몸집이 좀 있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다.서울 사람들은 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 있었을 것이다.식사시간이 되자 너른 방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그쯤 되면 시골에서 온 나도 스스름없을 만도 했지만 더 주눅이 들었다. 내 밥그릇과 수저가 따로 있.. 2026. 10. 27.
두물머리에 성희네가 설치한 정원 성희가 카카오톡에 사진 두 장을 올렸다. 조경(造景) 작품 같긴 해도 설명이 하나도 없어 파악이 되지 않았다. 성희가 사진을 올 린 건 지난봄 내가 카톡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성희는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사람이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정성스럽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말수가 적고, 한마디로 나하고는 정반대인 여성이다. 그래서 나는 성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83년에 만났지 싶다. 그러니까 지금 56세쯤?조경설계사무소 온[Onn]을 운영한다. 아니 성희는 서울 송파구 충민로에 있는 그 회사 직원이다. 운영은 소장인 남편이 하겠지? "이 사진 제목처럼 간단한 설명 좀 부탁해."대화란에 그렇게 써놓았더니 카톡이 아니라 문자메시지로 긴 답신이 왔다. 나는 성희의 이런 태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잠시 '.. 2026. 10. 26.
김사인 / 코스모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라고 하니까 자연히 그 핍박을 받았겠구나 싶다.호주머니가 비었다니까 그 봐, 싶다.이곳의 코스모스가 피었으니 고향이고 어디고 다 피었을 것이다.그 고향에는 울며 그간의 일들을 여쭐 아버지가 있나?없다. 저세상으로 간지 수십 년이다.그럼 어떻게 하나,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이 사정을 이야기하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은 (이렇게 말하면 가벼운 표현이지만) 너무 멋지다.한번 들면 놓기가 쉽질 않다.자주 시집 내는 시인도 아니어서 시인에겐 참 미안하지만 나는 김사인 시인은 이 시집 한 권으로도 됐다, .. 2026. 10. 25.
인생이란 무엇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교육부에서는 더러 전문성이 풍부한 선배가 보여서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인물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그런 선배 중 어떤 분은 흠모하는 마음이 지금도 변함없어서 그분의 노쇠현상을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교육부 근무시절에는 드높이 우러렀다가 '저런 인물이었나' 하고 실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극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그 선배는 전문지식이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고, 신념을 지켜야 할 때 단호한 태도를 보여서 더욱 감동을 주었다. 그 얘기는 여기에 자세히 기록하기가 어렵다.어언 나도 교육부를 나와서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지역에서 술을 마시며 나를 호출한다는 연락을.. 2026. 10. 24.
'은밀한 생'이란 어떤 것일까?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가 전쟁이 종식되는 전야에, 패배든 승리든 간에 모든 것이 술렁이고, 이해타산의 혼돈이 무관심으로 바뀌고, 권력이 무정부 상태와 무정형의 한계점에 이르며, 폭력이 스스로 균형을 상실하는 이 순간을 묘사한다. 모든 것이 붕괴되는 이 순간은 사회적인, 아니 오히려 비사회적인 일종의 황홀경과도 같으며, 인간 사회의 원자핵과도 같다. 인간 번식의 태풍의 눈, 기이한 평화가 유지된다. 무질서의 심연 깊은 곳에는 완전한 의기소침이 지배한다.그것은 극도의 갈망이다.(...)나는 불편하지만 독립적이고 복잡하지만 은밀한 삶을 더 좋아했다. 나는 훈장들을 거부했고, 음악회에, 연극에, 오페라에, 영화에, 공식 모임에, 환영회 따위의 의례에 별 이유 없이 받는 초대들은 그로 인해 받게 될 부담과 시.. 2026. 10. 23.
김복희 / 있어봐 인간이 하루, 두세 번은 쓰러지도록현기증 못 견디도록중력에 흔들리도록진화했다면 우리들의 근무는 조금 더 부드러워졌겠지푹신한 베개가 있고조금만 걸어도 쉴 수 있는 의자가 있고보도블록은 지금보다 더 물렁하고혼자 멀리 떠나는 일 드물었겠지 중력을 이기는 인간은 없잖아중력을 이기는 깃털도구름도 빗방울도심지어 바람도 목숨을 걸고사력을 다해지구 반대편으로 가겠지가까운 거리도 반드시 둘이서 셋이서갔을 거야 서로의 머리 받쳐줄 수 있도록 혼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됐으려나아니 더욱더 완전히 혼자를 알게 됐을지도? 닿을 수 있는 모든 면이 흔들리는 순간안아올려지듯 빙 도는 순간노인처럼 아기처럼작아져 딱딱한 보도에 주저앉는 순간 아주 오래전에 진화한지구처럼존재하게 돼도는 거야 있어봐길에 누워 흔들릴 때 수치스럽잖아중력에.. 2026. 10. 22.
독서와 사랑은 지식을 뒤집는 인식이다 독서는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하게 만들고, 읽는 자의 경험을 시간의 피안에 있는 낯선 공동체 안에 재구성한다. 그것은 잊혀졌던 기시감(旣視感)이 되돌아오는 듯한 느낌, 자신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지만 이미 했던 생각이라는 느낌, 제동 장치가 풀려버린 용수철처럼 팽팽한 힘을 발산해 버리는 언어의 느낌이다. 정곡을 찌르는 표현의 느낌. 충격을 주는 말의 느낌. 접속시키는 말의 느낌. 황홀한 말의 느낌. 그러나 한 마디만 해주시면 내 영혼이 치유되겠나이다(Sed tantum dic verbo et sanabitur anima mea). 한 단어가 네가 체험한 것 모두를 붙잡아 응고시킨다. 책을 취하라, 그러면 너의 삶은 곧 고립에서 벗어나고, 구속에서 벗어나고, 삶의 형상이 새롭게 변모되리라. 독서는 청.. 2026. 10. 21.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시선 속에서이다.* 간통이 가장 강렬한 관계라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일까?* 사랑의 발생은 어떤 목소리에 대한 복종일 수 있다. 어떤 목소리의 억양에 대한 복종.* 피아노 앞에서,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네미가 내쉬던 단 한 번의 한숨도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곤 했다. '삶의 비밀을 찾아 근원에 이르는 사랑과 고독의 신비로운 퍼즐' 이 책을 이 한마디의 소개에 따라 읽으면, 위에 옮겨 놓은 것과 같은 문장들을 기대하고 찾으며 읽게 될 것 같다.그러나 저런 문장들은 극히, 아주, 일부일 뿐이다.'무슨 책이 이럴까?' 나는 읽지도 못하면서 이 책을 갖고 있었다.서너 번, 겨우 한두 페이지씩만 읽고 멈출 수밖에 없었고 눈에 띄면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 .. 2026. 10. 20.
음악의 창조자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사람 나는 예술 혹은 음악에 대해 어떤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불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 물은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이어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같은 설명이다.음악만으로도 꽉 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그렇다.그렇지만 나는 음악을 듣고 생각하기는 해도 음악에 관한 철학이나 음악사, 해설 같은 것에 빠지거나 집중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일은 기본적으로는 내 능력 밖의 일이다.그러다가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 327~328)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음악의 창조자인 마르수아스*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사람이다. * 탁월한 예술이란 어떤 것인가? 언어 이전의, 최초의 예술은 어떤 것인가? 마치 각 개인의 육체 혹은 집단의 .. 2026. 10. 19.
슬로베니아라는 나라 ▲ 구글 지도 금요일 오후, L시인이 이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주었다.슬로베니아라고 했다. 슬로바키아가 아니다.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한 나라였다가 분리된 나라다.슬로베니아는 그보다 더 남쪽으로 지중해 연안이다.가을은 저렇게 그 먼 나라도 찾아갔다.답신으로 일행을 잘 따라다니라고 했다.그런데 이게 누굴까? 신화에 나오는 여인인가? 아니면 L 시인처럼 시인? 음악가? 화가? 그 나라 유관순 누나 격?꼭 알아야 할 건 아니다.뭐든 생각만 해도 된다.슬로베니아의 공항, 철도, 버스, 택시, 음식, 거리, 사람들, 옷차림, 커피숍, 숙박업소... 궁금할 것 하나도 없던 나라의 밤, 낮, 저녁과 아침을 떠올려본다.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일 가능성이 크다. '삼전닉스'도 없겠지, 있을 리 없다.사람들은 어떻게 .. 2026. 10. 18.
여기는 내게 이런 곳이다 조용하다.무밥, 콩나물죽, 찐 고구마,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에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곳이다.소 울음소리가 들려서 건너편에 다른 집도 있다는 걸 느낀다.여기에서만 살라고 하면 얼른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전화조차 오지 않는다.라디오나 듣고 TV도 본다. 그래서 책을 볼 시간은 적다. 고양이는 반가운 손님이다.오늘저녁에는 길 아래 박종두 님이 다녀갔다. 캄캄한 밤길을 어떻게 내려갔을까.내가 이곳에 오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걸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여름부터였다.헤어져야 한다면 정을 떼고 가야 하나, 더 붙이고 가야 하나?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더 붙이는 수밖에 없다.나는 여기에 둘 수 있는 건 다 두고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가을이 오니까 더 적적해지고 있다.저 꽃 피는 걸 보려고 둔 건.. 2026. 10. 17.
《동방순례》... 유보하기 지난 3월, 《現代文學》에 《동방순례(헤르만 헤세)》가 실렸다.나는 이 소설을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읽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그리웠다. 처음 뵈온 건 63년 전 봄이었다.읽고 나서 저렇게 등표지를 꾸며 책장 속에 넣어 놓았었다.겨우 일곱 달 전의 일이다.겨우 일곱 달 전인데, 내 마음은 파란곡절을 겪은 뒤 같다. 하기야 그땐 봄이었고 이미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어떻게 하나, 하다가 다시 서장에 넣었다. 유보(留保). 내가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도 유보일 것이다. 2026. 10.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