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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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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장보기 '즐거운 장보기'라는 글을 쓴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 글을 쓰려고 하니까 부끄럽다."손가락만 까딱하면 우리 집으로!"그런 세상이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처지도 아니면서 손가락만 까딱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겨우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인 직장인들이나 할 짓이지 가뜩이나 활동량이 부족한 늙은이가 할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바쁠 것도 없는 주제에 젊은이들 흉내를 내는 건 아무래도 아니어서 시도해 보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 누가 "그래도 한번 해보기나 해 봐!" 하면? 그때도 문제는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넓은 인터넷 세상의 어디에 가서 물이며 쌀, 갖가지 채소, 생선, 고기, 달걀, 두부, 식초, 요구르트, 고구마, 라면, 비누, 칫솔, 커피…… 같은 걸 다 .. 2026. 10. 4.
K 선배의 치매 나는 K 선배를 좋아한다. 이 말 가지고는 안 된다. 존경하고 그리워한다. 사랑한다.그는 내가 파견교사 시절에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미국으로 연수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나는 K 선배가 담당한 교과서의 결재본이 만들어지면 선배 대신 사인을 해서 인쇄에 부쳤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나에게 일임했다는 것을 교육부 내부에도 보고하고 출판사에도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내 아내는 탐탁지 않게 여긴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모님이 병석에 있을 때 더 잘 간호해드리지 못한 걸 생각하는 것이다.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내 아내의 평가에 대해서는 나 또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그 평가가 옳거나 그르거나 판단을 하지만, K 선배에 대한 내 아내의 평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2026. 10. 3.
슬픔의 높이 마음 둘 곳이 없었다.(ChatGPT, 박○두 님, 김○원 님, ○○조경, 산림청, ○○군청 산림과)이미 그리움만 남았다. 2026. 10. 2.
고위직의 농담은 정말 더 재미있나 젊고 키가 크고 잘 생기고 직위가 높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뭇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대인 쏠랄(국제연맹 사무차장)이 자신을 찾아온 아름다운 유부녀 아리안 도블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힘을 숭배하는 여성을 깔보는 이야기지만 아리안은 결국 쏠랄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알베르 코엔의 소설 "주군의 여인"). 이런 여성이 더러 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를 만나고 와서는 그 짐승 같은 작자가 너무도 선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고 떠벌리는 멍청이들도 모두 개코원숭이요. 오 강자 앞에서 여자들처럼 황홀해하는 꼴이라니. 나폴레옹*, 나를 위해 50만 명이 죽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던 나뽈레옹이 작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흥분하는 자들은 또 어떻소. 모두들 강한 자에게 꼼짝 못 하지. 강.. 2026. 10. 1.
방주현 / 공개수업 옆 반 선생님교감 선생님교장 선생님까지우리 교실에 왔어 하필이면공부 시간에 왔네 쉬는 시간에 왔으면내가 잘하는딱지치기다리 찢기발차기다 보여 줄 수 있는데 공부 시간엔바른 자세 하나밖에보여 줄 게 없는데다음엔쉬는 시간에 오세요 방주현_ 2016년 『동시마중』에 동시를 발표하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 『내가 왔다』 등이 있다. 제1회 동시마중 작품상을 수상했다. 『문학동네』 127 (2026 여름)에서 옮김. 2009년엔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루 종일 저런 놀이를 시켰다. 딱지치기, 다리 찢기, 제기차기...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종목을 정했는데 5, 60가지는 되었지 싶다.평소와 달리 의기양양한 아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학교가 종일 뜨거웠었다.물론 그 아이들에게 상도 다 주었다.나.. 2026. 9. 30.
나를 적중시킨 나의 과거 우리는 뒤에 남겨놓은 장소들로부터 벗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은 공간이 아니며, 우리 앞에는 과거가 놓여 있다. 과거를 떠난다 해도 그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는다. 매일 조금씩 더 우리는 우리가 피하는 것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중단된 피조물이므로. 우리가 항상 피해왔던 것을 죽음의 순간에도 껴안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담을 되뇌는 채무 상태에 있듯이 자신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에 삶의 고삐를 풀어버리는 움직임에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다. 책들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멈출 수 있다. *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우리는 승강기 안에서 눈을 감아야 하고, 우체통 앞에서 눈을 감아야 하고, 길에서 눈을 감아야 하고.. 2026. 9. 29.
추석 연휴 # 새벽, 어디쯤일까.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순식간에 점점 커지더니 고함이 들리고 젊은 여자가 몇 차례 비명을 질러버린다. 그 비명은 대화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절규였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간 사람들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졌다.나는 그 상황을 꿰어맞추느라 한참만에 다시 잠들었다. # 아침에 어떤 여성이 65세에 어머니로서의 졸업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TV에서 봤다.그건 멋진 제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10년, 20년이 초과했는데도 아직 졸업하지 못한 여성은 어떻게 하나? 누가 졸업시켜 주나? 이미 너무 늙어서 선언이나 할 줄 알겠나? # 젊은 여자 강사는 추석 전날 편도 일곱 시간이 걸렸는데 돌아와서는 몸이 휘청거려 계단에서 발목을 다쳤다고 한다.목은 왜 쉬었을까?이런 경우, 남편은 순순히 모든.. 2026. 9. 28.
이제니 / 나를 건너가는 나를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나는 혼자만 죽어 유령으로서 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존재라고. 무채색을 뒤집어쓴 채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무한히 쓸쓸하고 무한히 아름다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진열대 위 먼지를 뒤집어쓴 은빛 숟가락의 표면 위로 너의 얼굴이 내려앉는다. 너는 잠시 먼지에 가까워진다. 진열장 너머 순백의 웨딩드레스 위로 너의 몸이 겹쳐진다. 너는 이제 망설이는 신부와 가까워진다. 비 온 뒤 생긴 작은 물웅덩이 위로 지난 계절의 나뭇잎이 떨어진다. 너는 먼지 얼굴의 순백의 웨딩드레스의 어제의 신부의 손가락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는 녹색의 잎에 가까워진다. 비루하고 고귀하고 지루하고 거룩하고 남루하고 갸륵한한낱 먼지의 춤의 웨딩드레스의 녹색의 잎의가까워지는 동시에 멀어져가는전생의 희미한 기억과도 같은... 2026. 9. 27.
피고 지는 잎 부(富)는 단숨에 쌓을 수 없다.권력을 쟁취하는 것도, 평판을 쌓는 것도, 청춘의 절정에 이르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다. 청춘이었는가 싶다가 어느새 건강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다.부나 권력, 평판은 어떤지 모르겠다. 2026. 9. 26.
자식들의 독립을 준비하는 고양이네 이 집 가족은 다섯이다. 내가 잘해준 것도 없는데 기본태도가 그래서 저렇게 공손하게 앉아 있는 것이 어미이고, 나머지는 다 자식이다. 아비는 바둑이인데, 연애할 때는 열렬했지만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단 한 번도 함께 다니는 꼴을 못 봤다. 수컷은 한심하다. 그런 경우가 많다. 지난봄 어미가 저 자식들을 데려와서 처음으로 내게 보여주며 먹이를 부탁할 즈음엔 혹 내가 제 자식들을 소홀하게 여길까 봐 엄청 조심스러워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할 때가 된 것이다. 어미는 하루에 몇 번을 다녀가도 아이들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게 긍정적이다. 독립할 때가 되면 의젓하게 행동하고 마음으로부터 어른스러워져서 제 부모를 걱정하고 배려하고 더 이상 .. 2026. 9. 25.
기억력과 치매 나는 오랫동안 아내에게 건강식품을 사주고 있다. 사주고 있다? (이 표현이 비합리적이라면) 그건 꼭 먹어야 한다고 거의 강요하고 있다.건강식품이라고 하지만 배가 좀 부르거나 청량음료처럼 속이 시원해지고 정신이 맑아지거나 그렇지는 않다. 후룩후룩 마시거나 꾹꾹 씹을 수 있거나 그렇지도 않다. 그저 꼴깍 넘기면 그만인 알약 수준다. 나는 건강식품을 싫어한다. 가성비 때문이다.그런데도 아내에게는 강력하게 권유하는 이유는 뭔가? 부실한 부분의 영양을 보충하기가 까다로운데 마침 그 부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래서 안 먹는 것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는 그 효과 때문이다. 가령 10만 원어치를 먹으면 적어도 5천 원 혹은 1만 원 정도의 효과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내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긴 하지만, 아내는 그.. 2026. 9. 24.
치매, 예방과 조기검진이 중요하다 치매 검사를 받아봤다. 동네의 정신과 병원에 예약했다가 아직 그럴 필요는 없겠지 싶어서 보건소를 찾아갔다. 긴장되었고 접수처에서 몇 가지 기초적인 것을 질문할 때부터 조심스러워졌다.검사하는 이는 좀 보이시한 젊은 여성이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시험을 본다고 했더니 중간에 "잘하시는데요?" 하고 격려해 주었다. 나올 때 웬만하면 내년에도 한번 오라며 팸플릿을 내주었다. "치매, 예방과 조기검진이 중요합니다"모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자료를 보게 되었다. 치매 의심증상 10가지ⓥ 직업이나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정도로 최근 일에 대한 기억력 상실이 있다. ⓥ 익숙한 일을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 언어사용이 어려워진다. ⓥ 시간과 장소를 혼동한다. ⓥ 판단력이 감소하거나 그릇된 판단.. 2026.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