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71 나무들과의 이별 나이가 제법 들어가면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려웠는데 나보다 먼저 영영 가려는 나무들을 보게 되었다. 사시사철 변함없어서 벗으로 바라보던 나무들이었다. 그 나무들의 그늘에서 닦은 땀방울, 그 나무들에 내리는 비, 눈, 그 나무들을 찾던 새들, 그 나무들을 오르내리는 고양이들, 그 나무들 위를 떠가는 구름들, 그 나무들을 불어가던 찬바람들, 그 나무들을 바라보던 무수한 시간들을 나는 좋아했고 행복했다. 때로는 견딜 수 있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외롭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그 나무들을 찾아왔던 것 같다.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슬픔을 느낀다.저렇게 겨울준비를 하는 활엽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정겹고 따뜻하랴.나는 그 나무가 아픈 모습, 숨이 넘어가는 모습을 여기에 옮겨놓을 수가 없다. 2026. 11. 6. 아부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바로 앞자리의 중년 여자 핸드폰이 울렸다."한평생 함께할 사람"(?) 어떻고 하는 노래여서 저 노래에 심취하고 있구나 생각했다.벨소리는 금방 끊어졌다.여자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다 들렸다. "아부지?""전화 잘못 걸었다. 하하하.""예, 아부지." 10초도 되지 않았다.나는 전화기 저쪽의 '아부지'가 부러웠다.그 아부지의 따님이 좋아졌다. 종점이 가깝고 한낮이어서 버스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지 싶은데 공교롭게도 내가 내리고 뒤따라 그 여자도 내렸다. 나는 나보다 젊은 그 여자가 앞서기를 바랐고, 그러면 어떤 여자인지 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자가 머뭇거렸다. 앞서기가 싫은가보다 싶기도 했다. 그 이유까지는 알 것도 없다.그녀는 좋은.. 2026. 11. 5. 참 간절한 대화 지난 월요일(2일) 낮, 기이한 일이 있었다. 문득 몇 해 후에는 인간과 나무가 서로 대화를 하고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을 떠올렸고 '이건 예삿일이 아닌데 내가 왜 그 기사를 읽어보지 않았을까?' 하고 얼른 평소에 사용하는 포털사이트 두 군데에 들어가 봤다.없다.어디서 봤지?종일 골몰했는데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지금 읽고 있는 소설까지 살펴봤다.없다.포털사이트의 검색창 AI에게 그런 기사가 있는지 물었더니 헛소리만 했다.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과학이든 꿈이든, 그렇긴 하겠지?과학자들은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면서 '죽지 않는 인간'(신과 같은 인간)의 실현까지도 눈앞에 다가왔다고들 하는데 그까짓 나무와의 대화와 정보교환이 뭐 그리 어렵.. 2026. 11. 4. 단풍 바라보기와 낙엽 치우기 우리 아파트 청소하는 분들은 딱하다. 아주머니들은 각층 복도와 현관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현관과 현관 바깥 마당까지 책임지고 있다. 봄에 그 마당 보도블록 사이로 솟아오르는 잔잔한 풀을 뽑고 있는 걸 보면 미안해서 집어치우고 집에 가시라고 하고 싶은데, 세상에 내 말대로 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나.그래 인사만 하고 본체만체해 버린다 그중 제일 딱한 분은 키가 아담하고 까무잡잡하고 말수가 적은 육십 대 초반 남자다. 그는 빗자루도 다양한 데다가 나뭇잎을 쓸어 모으는 송풍기도 소리가 크고 바람도 센 것과 비교적 조용하고 약한 것 두 가지를 사용하므로 쓰레받기와 쓰레기통까지 리어카에 싣고 가는 걸 보면 장비만 해도 거창하다.이분 일하는 모습의 특징은 최대한 부지런하고 절대로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는다.. 2026. 11. 3. "인터넷은 지적 빈자에게 폐해가 다 크다" 움베르토 에코는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인터넷도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정말요?"하고 싶은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인터넷이 나오고 "이 세상에서, 온 세상의 사무실에서, 종이가 사라진다! 이제 모든 문서는 인터넷으로 주고받는다."고 했을 때, 나는 '살다 보니 별일 다 보는구나' 싶었고, 마침내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말이 떠돌았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큰일났잖아!나는 낙심이 되어 내 책장을 바라보았다. 저게 다 사라진다고?그럼 저 책들을 다 어떻게 하지? 어디에 어떻게 버리지?지금부터라도 일체 사지 않아야 하겠지? 그랬던 것인데, 종이책은 점점 더 좋아지고 앞으로도 이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종이책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승승장구할 기세다. "내가 사라.. 2026. 11. 2.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계수나무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미안하고 건방진 말이긴 하지만 사람보다 더 좋다. 어쩔 수 없다.밖에 나가면 나무 구경하는 재미가 반 이상이고 이 방에서도 걸핏하면 일어서서 나무들을 내려다본다. 수백 수천 번 본 나무를 또 보고 또 보고 매번 본다. 하루하루 다르다. 우리 아파트는 건설회사 사장이 마음먹고 지은 아파트여서 수목이 다양하고 멋있다. 이렇게만 얘기해선 안 되는데 길게 쓰기가 귀찮아져서 어쩔 수 없다.나 혼자 그렇게 부르는 중앙공원(중앙놀이터 말고 중앙의 숲공원)에는 몇 가지 나무가 밀식되어 있다. 상점가 위쪽 피트니스센터로 가는 방향으로 보면 오른쪽에는 여러 종의 단풍나무와 계수나무가 여남은 그루씩 늘어서 숲을 이루고 있어서 한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도 있다. 아래에는 이끼나 맥문동이 자란다. .. 2026. 11. 1. 음악과 사랑은 길을 잃게 한다 "음악은 음악일 뿐인데 훌륭한 음악가들의 연주를 들으면 왜 두 손을 모으게 될까요?" 오늘 오전,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그렇게 말했다.음악으로도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일단 라디오로 종일, 늦은 밤까지, 새벽까지 음악을 듣는 데는 아무런 장애나 통제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사회자나 전문가가 말이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살짝 그 시간대의 다른 음악방송을 들을 수도 있다. 그렇긴 해도 종일 음악만 들려주는 방송이 있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음악 말고 그런 분야가 있나?문학은(책을 읽는 건), 음악을 듣는 것보다는 조건이 좀 까다롭다. 읽을 책이 있어야 하고 상태가 양호해야 한다.음악을 라디오로 .. 2026. 10. 31. 전욱진 / 스탄 게츠 서로의 종아리를 주무르다저녁을 나눠 먹고 설거지하는 사람의 굽은 등에한참 마음을 쏟다가 같이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하면 이 시가 시작된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걸까 내가 물으면이렇게 간단해도 되지 그 사람이 답하고 내 삶은 알몸으로 밖을 배회한다자긴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처음부터 숨긴 적 없다고 이렇게 끝나면 된다고 전욱진_2014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여름의 사실』, 산문집 『선릉과 정릉』이 있다. ☞《문학동네》 119호(2024년 여름). 나도 이렇게 살자는 생각은 수없이 했다. 불가능하다. 내 세상에서는 내 환경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고, 나는 뭐가 이리도 복잡할까, 늘 그렇게 생각하며 번민에 휩싸여 정처 없이 가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핑계에 지나지.. 2026. 10. 30. 내 기억속 아이들 가끔씩 함께했던 아이들이 나를 만나주러 온다.약속을 하면 하루에 몇 번씩 그 아이들을 생각한다.우리가 함께하던 그 교실의 귀엽고 예쁘고 씩씩하던 모습들을 떠올린다.물론 지금의 모습도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꾸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아 안타깝다.그래서 '아무개' 하면 예전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가 사라지기 전에 내 기억 속 그 모습들을 밖으로 꺼내서 한 장씩 인화해 나눠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선물이 될까 아쉬워할 때가 있다.걔네들도 이제 50대 중반에서 60대 후반에 걸쳐 있다. 그들이 내 기억 속 저희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이미지를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간직해 준 걸 엄청 고마워하겠지?이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에이아이(AI: ChatGP.. 2026. 10. 29. 김사인 / 뵈르스마르트 스체게드 다음 생은 노르웨이에서 살겠네.바다를 낀 베르겐의 한산한 길인색한 볕을 쬐며 나, 당년 마흔일고여덟 배불뚝이 오한센이고 싶네. 일찍 벗어진 머리에 큰 키를 하고청어와 치즈 덩어리를 한 손에 들고좀 춥군, 어시장 냉동탑 그림자 길어질 때늘어나 덜걱거리는 헌 구두를 끌며 걸으리.브뤼겐 지나 시장 옆 좌판에서딸기와 버찌도 좀 사겠네.싱겁게 몇 낱씩 눈이 날리는 저녁 성당 지나 시장골목 입구도 좋고오래된 다리 부근도 좋고밤 두 시숙소를 못 찾은 부랑자가 윗도리를 귀 끝까지 올리는 시간다리 옆 둔덕을 타고 비틀비틀 강가로 내려가는 그 사내이겠네.미끄러질듯 절대 넘어지지 않지. 적막 속의 새로 두 시물결만 강둑에 꿀럭거려취해 흔들거리며 오줌을 누는나, 요한센(아니면 귈라 유하츠도 괜찮은 이름)오줌을 누며 잠시 막막.. 2026. 10. 28. 내가 처음 만난 다정한 여성 식사를 시작하려다가 올해로 꼭 60년 전 수정약국 아주머니를 떠올렸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떨어져서 하릴없이 지내던 봄, 만발한 아카시아꽃이 지난밤부터 추적추적 비를 맞던 날 새벽, 비닐우산을 쓰고 찾아간 황간역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상경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늦은 봄 어느 날 약국댁을 찾아간 시간은 마침 저녁식사시간이 가까운 때였다.아주머니는 곧 식사시간이니까 잠시 쉬라고 했다.아주머니는 수수한 차림이었고 몸집이 좀 있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다.서울 사람들은 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엉거주춤 있었을 것이다.식사시간이 되자 너른 방에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그쯤 되면 시골에서 온 나도 스스름없을 만도 했지만 더 주눅이 들었다. 내 밥그릇과 수저가 따로 있.. 2026. 10. 27. 두물머리에 성희네가 설치한 정원 성희가 카카오톡에 사진 두 장을 올렸다. 조경(造景) 작품 같긴 해도 설명이 하나도 없어 파악이 되지 않았다. 성희가 사진을 올 린 건 지난봄 내가 카톡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성희는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사람이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정성스럽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말수가 적고, 한마디로 나하고는 정반대인 여성이다. 그래서 나는 성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1983년에 만났지 싶다. 그러니까 지금 56세쯤?조경설계사무소 온[Onn]을 운영한다. 아니 성희는 서울 송파구 충민로에 있는 그 회사 직원이다. 운영은 소장인 남편이 하겠지? "이 사진 제목처럼 간단한 설명 좀 부탁해."대화란에 그렇게 써놓았더니 카톡이 아니라 문자메시지로 긴 답신이 왔다. 나는 성희의 이런 태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잠시 '.. 2026. 10. 26. 이전 1 2 3 4 ··· 3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