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10 가을이 온 날 밤의 서글픔 2026년 9월 5일. 토. 맑음. 오전 11시경에 이륙한 비행기는 자정이 지나야 착륙한다고 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거실에서 저녁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잤다. 무려 10단까지 설정할 수 있는 선풍기를 1단에 맞추어 1시간 30분 혹은 2시간에 설정해 놓으면 시원해서 금방 잠이 든다. 선풍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잊을 만하면 잔잔한 바람을 솔솔 불어준다. 내가 이런 선풍기 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슨 대화(對話)가 필요했을까. 이 선풍기는 마트에서 샀고, 집에 가지고 와서 기계치인 내 손으로 조립한 것이다. 겨우 조립식 선풍기 같은 존재도 되지 못한 채 그만두어야 한다니 서글프다.잠이 깨면 선풍기가 멎어 있다. 그 상황은 선풍기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잠이 깊이 든 줄 알았더.. 2026. 9. 5. 고양이의 세상 어미가 주둥이를 먹이그릇에 몇 번 퍽, 퍽 집어넣어 한입 가득 먹이를 물고 새끼들을 찾아 나서는 걸 몇 번 봤다. 먹이를 먹는 새끼들을 지켜주기 위해 나를 경계하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그 어미가 이번 주에는 나를 경계하지 않게 되었다. 저렇게 엎드려 딴 곳을 바라보았다. 하기야 새끼 한 마리가 도착하지 않았다. 며칠 만에 풍부한 먹이가 생겼는데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를 그 한 녀석이 안타까울 것이다. '얘는 아직 독립을 하지 않은 주제에 어딜 쏘다닌담. 쯧!'어미가 태평스럽자, 새끼들도 나의 움직임에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새끼들은 어미가 먹이통 가까이 가면 몸으로 가로막지만(어리광인가? 인간 아기들 중에는 엄마는 맛있는 걸 싫어하는 줄 아는 경우도 있다.) 저희들끼리는 혼자 먹이통을 차지하려들지.. 2026. 9. 5. 세상이 바뀌었으면 교육도 바뀌어야지 교사가 되어 처음 소풍 간 날이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아무개가 손녀라며 찐 고구마 세 개를 내밀었다. 소풍 행렬은 자동으로 멈췄고, 그 선두에서 선물 ‘수수(授受)’가 이루어졌다. 포장지가 없어서 맨손에서 맨손으로 옮겨진 그 고구마는 도시락 준비가 안 된 아이의 점심이 되었다.변하기 전의 세상을 떠올려본 일화다. 굳이 그걸 강조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교육공동체’는 ‘선생님’과 학교를 일방적으로 앞세운 공동체였다. 그날의 내가 오늘의 현장에 있다면 가관 혹은 웃음거리의 표본쯤 될 것 깉다.교사와 학교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초등학교가 그런가? 그렇지도 않다. 어떻게 흔들리고 있나? 교사의 사회적 위상부터 예전과 달라졌다. 학생들이 교사를 우습게 여기기도 하고 덩달아 학부모들.. 2026. 9. 4. 정지용 / 홍역(紅疫) 석탄(石炭) 속에서 피여 나오는태고연(太古然)히 아름다운 불을 둘러십이월(十二月) 밤이 고요히 물러 앉다 유리(琉璃)도 빛나지 않고창장(窓帳)도 깊이 나리운 대로...문에 열쇠가 끼인 대로... 눈보라는 꿀벌떼 처럼닝닝거리고 설레는데,어느 마을에서는 홍역이 척촉(躑躅)처럼 난만하다. 한 행 한 행 읽어 내려오며 마음에 담아 본다.그 저녁의 분위기가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이 집 저 집 환자가 생겨 홍역이 개꽃 피어나듯 창궐한 마을의 분위기가 시를 읽어 내려온 마음을 압도한다.시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유종호 문학평론집 《시와 말과 사회사》에서 읽었다(20). 2026. 9. 3. 백로를 앞두고 D에게 엊그제 메시지 받고 '이 사람이 올여름 더위에 지쳤구나' 했네.저녁이 다가온 남산 위 하늘을 보게. 가을이 완연하지 않은가.일기예보는 오늘 아침에도 남부 지방 지도 위의 낮 최고기온을 보여주며 아직도 폭염이라고 했네.그럼 아직 여름인가?입추 처서 지난 지 한참 되어 곧 백로(白露)가 아닌가.오늘 이제 선풍기를 들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네.자넨 이미 들었지? 나에게는 에어컨이 없다는 얘기. 이번 여름도 선풍기 한 대, 부채 두 개로 났네. 그런데도 낮에 선풍기 앞에 앉아 있으면 내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일쑤 호들갑이라고 했네. 하기야 그 부채 두 개도 하나는 거실, 하나는 내 방에 두고 내가 전용으로 사용해서 아내가 부채를 든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호들갑'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네. 땀.. 2026. 9. 2. 우리는 절대로 이집트라는 나라를 떠나지 않는다 노예들의 눈처럼……노예들의 눈이 주인의 제스처를 주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랑한다. 책을 읽는다. 음악을 연주한다. 우리는 절대로 이집트라는 나라를 떠나지 않는다. "은밀한 생"(파스칼 키냐르)이란 책에서 옮겼다(123).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노예들의 눈이 주인의 제스처를 주시하는 것처럼?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다음.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지? 일단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며(이 표현을 거부하며), 누구의 제스처 같은 것 살피며 살지는 않는다고, 그따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며 다음을 본다.사랑한다.사랑도 그렇게 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 감각대로, 내 의지대로, 내 의사대로, 모든 걸 내 맘대로라면 사랑도 .. 2026. 9. 1. 우리 맛집 가자, 응? TV에 나오는 맛집 그거 믿을 것 없다고, 믿지 좀 말라고 통사정을 해도 아내는 기어이 믿는다.나는 이제 지쳐서 아뭇소리 않는다.한때 나는 아내가 KBS, MBC, SBS에 나오는 맛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 저기 한번 가보자!"고 하면 "어디 어디?" 하면서 포스터잇에 일일이 그 맛집 정보 검색 결과를 기록해서 벽에 붙여나가다가 누가 보고 빙그레 웃으면 쑥스럽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두툼한 수첩에 붙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맛집 찾아다니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오늘은 서울, 내일은 목포, 그다음 날은 강릉…. 게다가 포스터잇은 자꾸 늘어나는데 우리가 가 본 집은 아주 적어서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이래선 안 된다 싶어서 우선 우리 지역 맛집을 중심으로 조그만 볼일이라도 만들어 부지런히.. 2026. 8. 31. 전욱진 / 인지부조화 나 혼자와 내 마음 여럿이서함께 걷는다 큰 개 여러 마리와 산책하듯끌어가는지 끌려가는지더는 나도 알 수 없는 그 상태로 한 다발 풍선을 산 사람같이색색의 빛깔은 끈에 매달려 아름다우나자꾸만 날고 싶어하고 이제 가던 길을 멈춰입안 가득 침이 고인 채속에 각가지 맛이 담긴아이스크림 수레를 본 것처럼 《문학동네》 119호(2024년 여름)에서. '나 혼자와 내 마음 여럿이서' 나는 얼른 가벼워져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개 여러 마리와 산책하듯,혹은 자꾸만 위로 솟구치고 싶다는 풍선 다발을 움켜쥐고, 그 풍선들이 "날고 싶으면 날아도 좋아!" 하는 것 같아서 샤갈Chagall의 그림(가령 '도시 위에서' '산책')이 떠오르는데,아, 이런! 이번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야겠네! 이런 시 엄청 좋다.. 2026. 8. 30. 내 스위치들 인조인간(사이보그 혹은 로봇)이 저도 사람인 척(혹은 깨 놓고) 인간과 함께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것들이 우리 아파트에 입주해서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더라도 샤워 좀 꼭꼭 하고 담배도 흡연장소에서만 피우면 좋으련만…. 인조인간이 등장하는 소설은 재미있다. 작가가 자신이 설정한 인조인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치중한 소설은 식상하다. 그걸 자연스럽게, 독자가 쉽게 유추하고 꿰어 맞추며 읽도록 한 이야기는 생각하며 읽기에 좋다.얼마 전에는 폐기 처분된 아빠 대신 새로 조립(?)되어 나온 아빠를 맞이하는 소설을 읽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인조아빠를 맞이한 자녀 두 명도 인조인간이어서 느낌이 더 묘했다. 인조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소설은 아직 읽지 못했다. 그 인간들(?).. 2026. 8. 29. 아버지에 대한 증오, 인류에 대한 사랑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겠다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아버지는 증오하고 있는 모순적 상황이다. 그도 자신의 이러한 모순을 알고, 알료사에게 고백한다. "어떻게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 생각으론 멀리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모를까.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바로 이것이 이반을 알료사로부터 분리하는 지점이다. 2018년 3월호 "현대문학"에서 본 문장이다.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사랑한다―토스토옙스키의 소설과 환대의 계보」(왕은철)라는 글이었다."어떻게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지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내 생각으론 멀리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모를까... 2026. 8. 28. 댓글 답글 비밀댓글 연전에는 블로그 운용 체제가 티스토리로 바뀌면서 16년째 쌓인 댓글 답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 바람에 오고 가며 댓글 답글 다는 일에 시들해졌는데, 그러자 한동안 시간이 넉넉했었다.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에도 그 댓글 답글이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때로는 한 편의 글을 쓰기보다 정성을 들여서 댓글을 달고 답글을 썼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또 힘을 내야 할 것 같긴 한데 마음을 먹기가 어렵고 싫었다.그런데도 변함없이 이 블로그를 찾아오는 분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다시 정성을 쏟게 되었는데 아, 이런! 최근에 또 다른 예상외의 변화가 일어났다.이번에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품앗이'가 싫어진 것이다. 누가 내게 오면 나는 웬만하면 '답방'을.. 2026. 8. 27. 옛달 추석이 한 달쯤 남았다."추석이 가까워 옵니다. 밤이 익어갑니다."초등학교 1학년 2학기였던가, 국어 교과서의 그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추석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함께하던 시절이 있었다.건너편 저 동네 집들은 그 시절 그 동네와 딴판이지만 산(山) 실루엣을 보여주는 달빛은 그대로다.내가 오늘 이렇게 적적해진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나는 저 달에게 쑥스러워해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저 달이 저렇게 예스럽고 조용한 건 내게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무얼 부탁하고 싶은 걸까? 2026. 8. 26. 이전 1 2 3 4 ··· 3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