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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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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자히르」에는 돈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소설집《알레프》). 잠을 이루지 못해 뭔가에 홀린 듯이 거의 행복한 마음으로 나는 돈보다 더 물질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어떤 동전이든지(가령 20 센터보짜리 동전) 가능한 미래의 창고이기 때문이다. 나는 "돈은 추상적이다. 돈은 미래의 시간이다."라고 되풀이했다. 그것은 외곽 지역에서의 어느 오후일 수도 있고, 브람스의 음악일 수도 있으며, 지도일 수도 있고, 체스일 수도 있으며, 커피일 수도 있고, 황금을 경멸하도록 가르치는 에피테투스(Epictetus 55?~135?,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의 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파로스 섬의 프로테우스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프로테우스이다. 그것은 .. 2023. 9. 24.
와! 한국 완전히 망했네요 (2023.9.22) 우리나라가 망했다고? 완전히? 왜? 기사 제목 아래 한 여성이 보인다. 두 손을 머리에 얹고 놀란 표정으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조앤 윌리엄스/캘리포니아대 법대 명예교수' 화면 아래쪽에 이름, 직위와 함께 자극적인 그 탄식이 소개되어 있다.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우리나라가 완전히 망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과장 아닌가? EBS 다큐멘터리 '인구대기획 초저출생' 예고편에 나왔다는 그 사진은, 우리나라의 너무나 저조한 출산율에 관한 설명을 듣고 놀란 반응을 보인 것으로 그 내용을 전한 모든 기사에 똑같이 다 실렸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얼마나 낮기에? 2022년 합계출산율 0.78은 세계 최저 수치일 뿐만 아니라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도 꼴찌다. OECD 평균 출산율(1.59명.. 2023. 9. 22.
불안·초조감으로 시작되는 아침 "뉴스는 절대로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이 한 말이다(《뉴스의 시대》). 오래전에 읽었지만 나는 요즘도 아침부터 뉴스에 시달린다. 아내는 세상 돌아가는 건 대충이라도 알아야 한다면서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각부터 아침 식사가 끝날 때까지 뉴스를 청취하는데 나에게는 그걸 말릴 명분이 없다. 뉴스를 전하는 방송국 사람들은 대체로 언성을 높인다. 자동차 역주행 사고나 화재 같은 시시한 아니, 시시한 건 아니지? 일상적인? 아니지? 일상적이라니... 어쨌든 그런 뉴스를 전할 때는 더욱 흥분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정치 소식은 하루도 빠짐이 없다. 그것도 거의 전투 상황 같다. 아무리 훌륭하고 중요한 일들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송국 직원들이 고래.. 2023. 9. 21.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숲 2016 2100년쯤 전, 키케로가 노년에 관한 불평을 반박했다. 불평은 다음과 같다. ⊙ 노년에는 큰일을 할 수 없다. ⊙ 노년에는 몸이 쇠약해진다. ⊙ 노년은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간다. ⊙ 노년이 되면 죽을 날이 멀지 않다. 이렇게 반박한다. ⊙ 노년에도 정치 활동과 정신 활동은 물론 농사일을 할 수 있다. ⊙ 체력 저하는 절도 있는 생활로 늦출 수 있으며, 정신 활동을 늘림으로써 체력에서 잃은 것을 보상받을 수 있다.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 감퇴는 오히려 노년의 큰 축복이다. 그래야만 정신이 제대로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이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편 노년에도 정신 .. 2023. 9. 19.
이 세상의 귀뚜라미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덥긴 하지만 처서가 지난 주말이었다. 귀뚜라미는 가을이 왔다는 걸 귀신같이 안다. 2004년 9월, 십몇 년 간 세상에서 제일 번화한 광화문에서 근무하던 내가 용인 성복초등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그 9월은 가을이었다. 가을다웠다. 나뭇잎들은 화려했다. 그렇지만 그곳 가을은 조용하고 쓸쓸했다. 귀양이라도 온 것 같았다. 아침에 교장실에 들어가니까 귀뚜라미가 울었다. 내가 멀리서 통근한다는 걸 엿들은 그 귀뚜라미가 설마 정시에 출근하겠나 싶었던지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신기하고 고마웠다. "귀뚜라미가 우네요?" 광화문 교육부 사무실에서 전쟁하듯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인데 그럴 수가 없어서 눈에 띄는 아무에게나 알려주었다.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기사가 들어오더니.. 2023. 9. 17.
희망가 이 풍진(風塵)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야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단순한 선율의 이 노래가 떠오를 때가 있다. '희망가'인데도 처량하고 구슬프다. 흥청망청 엄벙덤벙 살았다는데도 굳이 원망스럽지도 않다. 어쨌든 이게 왜 '희망가'인지 모르겠다. 희망을 가지자는 의미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실망가'일 수는 없었겠지?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야......' 단순한 선율의 .. 2023. 9. 16.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신선 '독자(犢子)' 업(鄴) 땅 사람 독자(犢子)는 젊을 때 흑산(黑山)에서 송실(松實)과 복령(茯苓)을 먹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어떤 때는 장년으로, 어떤 때는 노년으로, 또 어떤 때는 미남으로, 어떤 때는 추남으로 보여 사람들이 그가 선인임을 알았다. 독자는 늘 양도(陽都)의 주점에 들렀는데, 양도의 딸은 좌우 눈썹이 자라 맞붙고 귀가 가늘고 길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천상의 인물"이라고 했다. 독자가 마침 누런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주막에 들렀을 때 양도의 딸이 보고 좋아하여 머무르게 하고 받들어 모셨다. 어느 날, 그들은 복숭아와 오얏을 가지러 나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는데, 그 과일은 껍질까지 달고 맛있었다. 다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밟았지만, 그들이 문을 나서 송아지 귀를 끌고 걸어갔는데.. 2023. 9. 14.
사랑의 전시실·고통의 전시실 '박물관' 하면 '고려시대' '조선시대'... 같은 단어가 떠오르거나 성가신 단어 '13세기' '14세기'... 가 떠오른다. "14세기면 언제야? 몇 년 전이야?"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전시실을 무질서하다고 표현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을 제시하고 있다(《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보다 유익한 목록 시스템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의 관심사에 따라서 장르와 시대를 초월하여 미술 작품들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미술관을 걸어다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 잊어버리는,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는 중요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될 것이다. (......) 미술의 목적을 존중하는 맥락에서 바라보면 .. 2023. 9. 13.
다정함·부끄러움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습니다. 나 때문에 나 혼자 다녀오는 대부분의 날들보다는 운전이나 뭐나 신경이 더 쓰이지만 덜 심심합니다. 진단을 위한 사전검사를 받고 뜰에 나가 앉아서 쉬었습니다. 아침 일찍 검사 받고 오후에 진료를 받아야 하므로 쉬는 것이 아니라 네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정원에 참새 몇 마리가 다녀가더니 이번에는 비둘기 한 쌍이 와서 쉬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다정하던지... "저것들도 저러네?"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는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젊었을 때는 속으로 '에이, 비둘기 같은 사람!'이랄까봐 부끄러웠을 것인데 지금은 '에이, 비둘기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니겠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에이, 비둘기만도 못한..."일 것 같습니다. 나는 이러나저러.. 2023. 9. 12.
글읽기의 맛 시간이란 개성의 유일성唯一性의 외면적인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개성은 개성 그 자체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개성의 유일성은 그것이 독립된 존재로서 '다른 어떤 것이 출입해야 할 창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자족적自足的인 내면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성립한다. 개성은 자기 활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의 유일성唯一性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간에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마치 음악의 한 곡 안에서 어떤 순간에 어떤 음이 오는가 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나의 개성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개성의 내면적인 의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형식에 의해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 속에서 진정한 시간.. 2023. 9. 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2 환상적, 초현실적인 세상을 그린 단편소설집이다. 그런 세상을 사실처럼 그려놓아서 읽는 동안 그 세상에 빠져들게 했다. 출처를 밝히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등장시키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끌어들이니까 이야기 내용이 마치 역사적인 일들처럼 인식되었다. 인상 깊고 재미있다. 「죽지 않는 사람」「죽은 사람」「신학자들」「전사(戰士)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 등 17편 중 「독일 레퀴엠」「신의 글」 두 편을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것은 무작위로 선정된 (무작위처럼 보이는) 열네 개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다. 내가 그 글을 큰 소리로 말하기만 해도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2023. 9. 9.
그리운 메타세쿼이아, 그리운 계수나무 위쪽은 메타세쿼이아, 아래쪽은 계수나무입니다.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을 나 혼자서 '오솔길'이라고 부릅니다. 오래전 D시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그 학교 앞으로는 그 시가지에서 가장 넓은 대로가 지나가고 그 대로변 학교 담장 안쪽으로는 수십 그루 나무와 맥문동 등 갖가지 풀들로 이루어진 한적한 곳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그 나무 아래 길을 '사색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반 놈들이 다툴 때마다 "둘이서 손 잡고 사색의 길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고 돌아와! 두 번 돌아야 할지 세 번 돌아야 할지는 너희가 돌면서 정해!" 했습니다. 그 산책로를 다녀온 그놈들은 그것으로 다 해결되었다는 듯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나중에 .. 2023.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