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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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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라는 나라 ▲ 구글 지도 금요일 오후, L시인이 이 사진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주었다.슬로베니아라고 했다. 슬로바키아가 아니다.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한 나라였다가 분리된 나라다.슬로베니아는 그보다 더 남쪽으로 지중해 연안이다.가을은 저렇게 그 먼 나라도 찾아갔다.답신으로 일행을 잘 따라다니라고 했다.그런데 이게 누굴까? 신화에 나오는 여인인가? 아니면 L 시인처럼 시인? 음악가? 화가? 그 나라 유관순 누나 격?꼭 알아야 할 건 아니다.뭐든 생각만 해도 된다.슬로베니아의 공항, 철도, 버스, 택시, 음식, 거리, 사람들, 옷차림, 커피숍, 숙박업소... 궁금할 것 하나도 없던 나라의 밤, 낮, 저녁과 아침을 떠올려본다.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일 가능성이 크다. '삼전닉스'도 없겠지, 있을 리 없다.사람들은 어떻게 .. 2026. 10. 18.
여기는 내게 이런 곳이다 조용하다.무밥, 콩나물죽, 찐 고구마,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에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곳이다.소 울음소리가 들려서 건너편에 다른 집도 있다는 걸 느낀다.여기에서만 살라고 하면 얼른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전화조차 오지 않는다.라디오나 듣고 TV도 본다. 그래서 책을 볼 시간은 적다. 고양이는 반가운 손님이다.오늘저녁에는 길 아래 박종두 님이 다녀갔다. 캄캄한 밤길을 어떻게 내려갔을까.내가 이곳에 오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걸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여름부터였다.헤어져야 한다면 정을 떼고 가야 하나, 더 붙이고 가야 하나?떼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더 붙이는 수밖에 없다.나는 여기에 둘 수 있는 건 다 두고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가을이 오니까 더 적적해지고 있다.저 꽃 피는 걸 보려고 둔 건.. 2026. 10. 17.
《동방순례》... 유보하기 지난 3월, 《現代文學》에 《동방순례(헤르만 헤세)》가 실렸다.나는 이 소설을 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읽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그리웠다. 처음 뵈온 건 63년 전 봄이었다.읽고 나서 저렇게 등표지를 꾸며 책장 속에 넣어 놓았었다.겨우 일곱 달 전의 일이다.겨우 일곱 달 전인데, 내 마음은 파란곡절을 겪은 뒤 같다. 하기야 그땐 봄이었고 이미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어떻게 하나, 하다가 다시 서장에 넣었다. 유보(留保). 내가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것도 유보일 것이다. 2026. 10. 16.
정나래 / 바다는 종일 고기 잡고돌아온 배받아 안고 누웠습니다바다는 잠들지 않고밤새 배를 흔듭니다삐걱삐걱배가 코를 골며 잡니다희미한 불빛도 따라와곁에서 잡니다. 출처 :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2025.7.12 '내가 읽은 동시') 억지스럽지 않다. 보고 생각한 걸 그대로 쓴 시다. 내 생각대로 이야기하면 말놀이를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다.그렇긴 하지만 저 표현 때문에 아마 10명이면 10명, 100명이면 100명이 제각기 얼마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 싶다. 그런 걸 생각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싶고, 그런 생각들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 아닌가 싶다.요즘 아이들은 어른스럽기도 하고 어른보다 더 넓게 깊이 아는 부분이 많은데도 어떤 사람은 그게 좋은 줄 아는지(혹은 '유아시'라는 장르를 만들려는 .. 2026. 10. 15.
김원길 / 찔레라도 누구는 가버린 사랑을이슬에 씻기운 한 송이장미로 보듬는데그대 내 가슴에사철꽃도 잎도 안 피는메마른 가시넝쿨로 남아바람이 일 적마다서걱서걱살을 저민다.나는 애써찔레라도 피우고파찔레라도피워 가지고파눈물로 물 준다만추억이여,한송이 가시없는 풀꽃으로나왜피어 남지 않고.- 金源吉 시집 『들꽃다발』(1994, 길안사)에서추억과 그 추억 속의 한 부분이 된 인연(因緣)에 대해서라면, 이 시인의 어느 시 한 편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절절한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낸 세월이 50년이 훨씬 넘었고(《들꽃다발》이 나오기 전에 이미 여러 편의 시를 봤으니까), 이후 어디에서도 이 일로 더 나은 시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김원길 시인은 책을 내거나 특별한 작품을 쓰면 내게 연락이 온다.지난여름에는 자신을 '엘.. 2026. 10. 14.
흐느껴 울고 있는 여자 그냥 되는 대로 살아서일까? 이가 또 왕창 무너졌다. 전에 어금니 다섯 개를 빼내고 그중 두 군데만 인공 이를 심었는데, 이번에는 앞니 여러 개가 한꺼번에 무너졌다.몇 년 아닐 테니까 그냥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아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하루이틀이면 몰라도 불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불편한 건 지금까지도 그랬다. 나는 늘 마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료실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바로 옆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젊은 여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드러내어 그렇게 우는 여자를 모처럼 본 것 같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참으며 우니까 숨을 몰아쉴 때 흐느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이가 아파서?' 내가 봐도 그건 아니다. 이가 아프다고 그렇게 흐느껴 우는 사람은 없다. 왜 저렇게 서러울까? 아주머니 한.. 2026. 10. 13.
전철역에서 엄마를 찾는 아이 아이는 거기 계단 언저리에서 울부짖고 있었다."엄마―!"눈을 어디에 두어야 사람들 속에 섞여 환영처럼 사라져 가는 엄마를 놓치지 않을 수 있지?내려오는 사람들, 올라가는 사람들, 저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저쪽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엄마―!" 하고 울기도 해야 하고, 잠시 쉴 수도 없고, 눈물 때문에 제대로 살필 수나 있나? 나는 좀 바라보다가 ‘중요한 일’이 있어 가던 길을 가야 했다.중요한 일이었지, 아마?아, 그럼! 당연히 아주 중요한 일이었겠지!의심할 필요 없이 너무나 중요한 일로 그곳을 벗어났겠지. 그로부터 십수 년, 나는 중요한 일들을 실컷 하고, 더는 할일도 없게 된 처지여서 정기적으로 만나는 지인들과 점심을 먹고 나니까 할 일이 전혀 없게 된 긴.. 2026. 10. 12.
파란만장한 이 하루 하루하루가 가고 한 주일, 한 달이 가고 일 년, 십 년이 가는 걸 보면 빈틈이 없고 어김없어서 하등의 차질이 없고 때로는 성큼성큼, 정신을 차릴 수도 없어 어이가 없고, 심지어 대충 간 것 아닐까, 하루에 이틀씩 가 놓고는 그렇지 않은 척하는 건 아닐까, 내가 속은 것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을 보면 이 하루가 파란만장하다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고? 무슨 일이 그리 많았느냐고? 할 말이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내게는 정말 조용하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그렇지만 종일 내가 바라본 혹은 들여다본 나무나 풀들은 제각기 이 좋은 가을날 하루를 시각에 맞추어 만끽하는 것 같았다. 아침 식전에는 기온이 겨우 6℃여서 좀 아슬아슬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추석 무.. 2026. 10. 11.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2) 파스칼 키냐르는 「피에르 아벨라르에 대한 엘로이즈의 반론」에서 이렇게 썼다(《은밀한 생》 266). 몽환적 편지의 필자를 밝히는 여자들은 드물다.직무 임기 동안에 공개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는 여집사들이나 수녀원장들은 더욱 드물다.나는 어떻게 하면 엘로이즈의 대담함을 느끼게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음란한 장면을 하느님의 신전에서조차도 잊지 못한다. 한 술 더 떠 엘로이즈는 연인의 거세에 대해 다시 언급함으로써 논거를 연장하는데, 다시 한 번 엘로이즈의 그 말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편을 거세했던 두 사람은 재판을 받고, 거세되고, 그런 연후에 두 눈동자가 제거되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의 거세는 엘로이즈의 육체에서 떠나지 않는 피에르의 거세 장면에 대한 그녀의 상상을 조금도 진정시켜 주지 못한다. .. 2026. 10. 10.
수도사와 수녀의 사랑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1) 사랑의 편지를 묶은 책이다. 아벨라르(1079-1142)는 프랑스 팔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스콜라 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교회 교사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특히 '보편 논쟁'을 일단락 짓는 데 기여했고, 신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저작들을 발표했다.파리에서 명성을 떨치던 아벨라르는 성당 참사회원 퓔베르의 조카 엘로이즈(당시 17세, 1101-1164)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이내 사랑에 빠졌고 아들을 낳은 후 비밀리에 결혼하였다. 퓔베르는 자신의 가문을 모욕했다며 사람을 보내어 아벨라르를 거세해 버렸다. 이 일로 아벨라르는 생드니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 수녀원 수녀가 되었다.엘로이즈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했고, 학문과 고전 읽기, 글쓰기에 .. 2026. 10. 9.
나의 K 선배님 선배님은 직원들에게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보이거나 꾸중을 한 적이 없다.어떠한 결재도 머뭇거리거나 유보하거나 거부한 적도 없다.개별적이거나 전체적인 요청 사항을 모두 들어주었고, 구두로 이야기하는 것도 머뭇거리거나 거절하거나 부정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그런데도 아무런 사고나 아슬아슬한 고비 없이 지낼 수 있었으니 신기한 일이었다.나는 선배님처럼 살고 싶어서 교육부를 나와 학교에서 근무한 5년 6개월간에도 선배님을 생각하며 그렇게 결재해 주었고, 허락해 주었는데 교직원들은 그러는 나를 이상해했다.선배님의 기억력은 어마어마했다.교육부 편수국을 거쳐간 인물들을 모두 기억했고, 그들의 전공과목과 직책, 발령받아 나간 직장을 술술 얘기했다.초등교사 시절에 중등 사회과 지리, 역사, 일반사회 세 과목 시험에 모두.. 2026. 10. 8.
내게 반말을 찍찍 해대는 여인들 어제 아침 다시 마트 앞 내과를 찾아갔다.추석 연휴 이틀 전부터였으니까 보름이나 된 A형 독감이 주사 맞고 닷새치 약 먹고 했는데도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타이레놀과 판피린을 연달아 먹고 마셔도 오후만 되면 미열이 오르고 그러면서 두통이 오고 마른기침도 나고 해서 이렇게 해서 언제 말끔한 정신이 돌아오겠나 싶었다."추석 연휴 전전날 왔을 때, 선생님께서 A형 독감 판정을 하셔서 주사 맞고 약도 먹었는데요......""왔다 갔지."여자 의사는 이 PC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자초지종 설명을 늘어놓네 하는 표정이었다."오후만 되면 미열과 함께 두통이 오네요.""자, 아~ 해 보고. 음, 뒤로 돌아앉아 윗옷 올리고..."오십대 중반쯤이어서 내 딸 또래의 그 의사는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를 .. 2026.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