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전체 글3659

세 제자의 초대 1976, 7년에 한 교실에서 지낸 애들 셋이 찾아와서 점심을 함께했다.B는 정년퇴직하고 나서 아내가 갖고 있는 거실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그게 불가능해서 다시 직장을 잡아 초봉을 받게 되었고, 그새 세 가지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2년을 더 일해야 휴가도 쓰고 할 수 있어서 내가 가는 곳에도 가서 자고 올 수 있다고 했다. 장하다! L은 내가 보기로는 이 나라에서 제일 착한 사람 중 하나다. 아내와 고기 구워주는 가게를 한다. 마음이 착해서겠지, 환갑을 지내고 인물이 점점 좋아지는 매력적인 녀석이다. 예전 그 교실의 L 그대로다.P는 오랜만이다. 나는 49년 만인가 했는데 오래전 수십 명이 모였을 때 한 번 만났었다. 실수할 뻔했다.30대 중반의 맏아들에게 물려줄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퇴임하고.. 2026. 7. 17.
이 영감탱이 돌았나 봐(짧은 상황극) '띵똥띵똥~' '띵똥띵똥~' (안에서) "누구세요?"(밖에서, 나) "저... 이 아파트 주민인데요."(안에서) "그런데요?"(밖에서, 나) "저... 많이 바쁘시거나 귀찮으신 것 같아서 물 좀 들여놓아 드릴까 싶어서요."(안에서) "...... 물이라니요? 무슨 물 말씀이세요?"(밖에서, 나 '아이고, 답답해!') "제가 댁의 문 앞에 놓인 이 물을 안에 들여놓아 드리겠다고요!" 출입문이 조금 열린다. 깜짝 놀란 여인이 나를 아래위로 살핀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세요?""이 물을 안에 들여놓아 드릴까 싶다니까요? 벌써 일주일째 이렇게 방치되어 있어서요. 이건 정말 아니잖아요.""아니, 이 영감탱이 돌았나 봐. 여보! 여기 나와 봐요. 웬 미친 노인이 하나 왔어요! 얼른 와요! 얼른 와서 이 영감탱이를 .. 2026. 7. 16.
나도 이제 살게 됐네! 월급에서 방세 내고 밥 사먹고 마을 노인들 환갑 칠순 팔순 구순 잔치에 축의금 내고 초상 때 부조금 내고 경로잔치 때 떡값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돈을 받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노인들만 남은 산골은 초저녁부터 캄캄했고 개구리들이 울어댔다. 개구리울음은 여백을 허용하지 않았고, 시간과 공간을 긁어댔다. 새벽에는 개구리울음이 그친 자리에서 별들이 와글거렸다. 나는 때때로 노량진 집현전 원룸의 어둠을 가르던 지하철 전조등 불빛과 거리에서 짐승처럼 울어대던 버스의 에어브레이크 소리를 생각했다. 섹스가 끝나면 영자는 (…) 2018년 여름, 어느 월간지에서 김훈의 단편소설 〈영자〉를 읽다가 이 대목을 필사해 두었는데 가능하다면 내 초등 동기 H에게 보여주었으면 싶어서였다.. 2026. 7. 15.
옷 버리기 이런 얘기 하면 “좋은 옷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세탁해 단정하게 입으라는 뜻”이라고 변명(설명)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만, 오늘도 내 '카톡카톡'에는 ‘나이가 들수록 좋은 옷을 잘 차려입어야 한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퇴임 직후 아내가 내게 당장 요청한 것은 옷 좀 정리하자는 것이었다.많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여름옷, 겨울옷 몇 벌에 엉뚱하게도 봄가을에 입으면 좋을 옷도 두어 벌 있어서 장롱이 비좁았다. 나는 그때까지 그 사정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연예인이나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퇴임 직전 병원을 드나들면서 깨달은 것은 나는 언제든 저승으로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아내는 내 옷 치우는 일만 해도 고생깨나 하지 싶은 것이었다. 무슨 염치로 그 일까지 번거.. 2026. 7. 14.
내 선배 세 분의 노년 나에겐 내 진로를 걱정해 준 선배 세 분이 있다.더 있지만, 존재 자체가 시시하고 희미한 사람에게 뭐가 그리 많으냐고 할 것 같아서 미리 셋으로 압축해 놓았다. 압축? 선발? 선출? 선정? 에이, 어쨌든 셋이다.연령은 나보다 세 살 혹은 열 살 정도 더 많다나는 그분들을 그리워하며 지낸다.저절로 내게 영향력을 미치던 시절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스타일은 달라도 세 분 다 열정적으로 살아온 분들이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지금까지 나는 그 시절 그분들의 그 모습들을 떠올리여 살아왔다.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에 나답지 않은 점이 있었다면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세 분의 모습이 베어 들어 제2의 내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1974년, 가장 먼저 만난 분은 열정 겸손 지혜로 뭉쳐진 돌 같은 분이.. 2026. 7. 13.
이신율리 / 밍톈* 오토바이가 일제히 출발했다악보 없이 연주하는 시나위처럼 하롱베이엔 더 많은 오토바이가 있다고 네가 말했고나는 오토바이가 사라질 때까지연주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서 있었다 사라져도 좋은 것들이 천천히 사라지는풍등 날리기 좋은 날씨였다 여기도 복사꽃이 피네높게 핀 그늘에서 사진을 찍었다이상하게 나왔다고 우리는분홍이 아닌 것 같다고 길가에서 자라는 화분은 꽃이 잘 피는 것 같아잘 자라는 풀처럼 네가 말했다 어디든 섭섭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는뿌리 없는 식물처럼 자랐다 모르는 나무에 이름을 붙여주면서몇 번을 불러도 꽃이 피지 않을 것 같아서밍톈. 그늘 없는 푸른 의자에서화남으로 불어오는 플라스틱 바람을 맞았다천만에요 괜찮습니다이국의 말을 알려줬지만 너는딴생각을 하느라 친절하게 미안했고 우리가 날린 풍등이 소원.. 2026. 7. 12.
댓글 답글을 짧게 써야지! 내 댓글, 답글이 길거나 횡설수설이거나 구태의연한 내용이어서 부담스러웠겠지? 장문(장문)의 댓글이 실린 걸 보면 가슴이 철렁 했겠지?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데 마치 평범한 수준의 계몽 대상에게 제공할 강의록처럼 쓴 글을 보면 실없다 싶었겠지? 긴 글을 써주면 좋아할 줄 안 걸까 싶었겠지? 남의 블로그에 와서 왜 이러나 싶었겠지?내 블로그에 내가 쓴 글이라도 그렇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심하다 싶었겠지? 의견교환이 불필요한 소재인데도 뭐라고 성격이 분명하지 않은 댓글을 단 걸 보면 내가 이 노인네와 지금 이런 걸 가지고 토론을 해야 하나 싶었겠지? 이미 글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내가 중언부언하는 댓글 단 걸 보면 이 늙은이가 지금 나와 정담(情談)을 나누자는 걸까, 싶었겠지? 이 늙은이가 속으로 '.. 2026. 7. 11.
노인의 눈, 노인을 보는 눈 아파트 화단 둘레의 회양목 위에 얹힌 낙엽을 한 잎 한 잎 일일이 집어내는 여자 노인을 보았다.'저건 잘하는 일일까?'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세상의 친절」이 생각났다."두 줌의 흙이 던져질 때는 / 거의 누구나 이 세상을 사랑했었다." 키가 크고 활달하고 날씬하고 두 자녀를 둔, 이 아파트의 어느 아주머니는 노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늘 웃으며 인사해주고 스스럼없이 대한다.키가 작고 몸집이 좀 통통하고 자녀가 하나인, 이 아파트의 다른 어느 아주머니는 노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쌀쌀하다. 노인이 인사를 먼저 하면 겨우 받거나 받는 둥 마는 둥하고 다음에 만나도 결코 먼저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키가 크거나 작거나 몸집이 좀 통통하거나 날씬하거나 자녀가 둘이거나 하나이거나, 그런 것이 그 아주머니들의 .. 2026. 7. 10.
나는 저 여인이 좋아 아내와 나는 저 여인이 있는 곳 바로 아래 테이블에서 순댓국을 먹었다.나는 뜨거운 그 국을 식혀 가며 먹었고, 그렇게 하면서 여인을 올려다보곤 했다.나는 저런 스타일이 좋다. 전엔 몰랐다. 여든까지는 뭐가 뭔지 모르고 살았다. 지금은? 하하하...뭘 어떻게 해볼까 싶다는 얘긴 아니다. 그럴 수 있을 때가 따로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언제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혹은 얻는 것 없는데도 호의적인 태도가 본색인? 결코 쌀쌀맞게 대하지는 않는? 공연히 까다롭게 굴지는 않는? 그렇다고 헤프진 않은?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사람일 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저 풍성한 머리칼이 빨강꽃인 줄 알고 날아들어 헤집고 다니는 나비와 벌들을 다 그냥 두고 있다.순댓국이나 김치들이나 깔끔은 했는데, 아내는 마음에 .. 2026. 7. 9.
김광규 / 교대역에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로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마지막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없었다 그와 나는 모두서울에 살고 있지만곽효환 시인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있다. 언제 한번 보자고 또는 언제 식사 한번 하자고 으레 건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 3호선과 2호선 전철이 교차하는 교대역, 사람들로 북적대는 통로에서 만난 사람이 있다. 그것도 반세기 만에. 가장 가슴이 뜨거웠을 십대 후반 혹은 스물 초반에 함께 웃고 울었을 얼굴. 하얗게 센 머리만 빼고는 그대로인 그.. 2026. 7. 8.
내년엔 또 어떤 밭이 되려는지 여기는 대추밭이다.의왕인가 어디 피부과 의사 선생님이 2022년 가을에 일꾼을 사서 대추나무 묘목 수십 그루를 심어 놓고 이듬해 봄 하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일요일, 부인과 함께 와서 어수선한 밭을 대충 정리하고 서둘러 돌아가더니 얼마 후 또 일꾼을 구해서 온밭에 검정비닐을 깔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조립식 창고도 하나 세워 놓고 하더니 이후로는 잠깐 다녀가긴 했는지 몰라도 근 4년 단 한 번도 못 만났다.잡초가 제세상인 줄 알 수밖에 없다. 시간이 가버리면 비닐 같은 것 가지고 잡초를 당할 수는 없다!2023년 여름, 저 밭을 개망초가 점령해 버려서 나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남몰래 좀 황홀했고 그만큼 미안했다. 미안한 건 보는 사람이 나 말고도 좀 있으면 좋으련만 그 의사 선생님과 동.. 2026. 7. 7.
정현아, 미안해 오후에 정현이 연락을 했다.번호를 보는 순간 이건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반갑고 죄송하고 기쁘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내 음성이 참 좋다고도 했다. 얘는 1972년에 만났다. 아, 이런... 54년 전이다.그 시골로 전학을 왔고, 거의 말이 없고 조용하기만 한 1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도시로 나왔으므로 그 4년이 새록새록 생각나는 좋은 시기였다고 했다.2008년 연말에 잠깐 연락이 있었지만, 만나고 어쩌고 하지는 못했다. 그때 얘는 난(蘭)까지 사두었다고 했는데 그렇겠지, 처음에는 내일, 아니 모레, 하다가 다음 주, 다음 달, 다음 해가 되고 그렇게 하다가 2026년이 되었고, 일이란 그렇게 되기 쉬운 법이다. 이번엔 어떻게 될지 그건 또 두고 봐야 하겠지. 나는 아주 단.. 2026.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