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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박두순 동시집 《칼의 마음 》

by 답설재 2024. 7. 15.

박두순 동시집 《칼의 마음

청색종이 2024

 

 

 

 

 

 

오랜만에 나온 설목의 동시집이 '왈칵' 어린 시절을 불러왔다. 프로필에는 문학활동만 나타내고 있지만 그가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어서 그럴까? 책갈피를 펼쳐 책이라고는 교과서와 여름·겨울 방학생활뿐이었던 그때처럼 잉크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 굴곡진 삶에 위안을 주는 것들을 찾아보면 '세상의 돈'만큼은 아니겠지만 간단히 열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무상의 것이라면? 하늘? 구름? 바람? 바다? 음악? 시냇물?...

詩는? 시는 무상의 것일까?

 

 

불쌍한 로봇

 

 

로봇이 태어나 보니

사방에 많은 사람이 빙 둘러서 있다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엄마가 없다

엄마, 불러 보고 싶은데

엄마, 울어 보고 싶은데

예쁜 우리 아기라고 불러 주는

엄마가 어디에도 없다

로봇은 슬펐다

평생 시키는 대로 일만 하고

피곤해도 안길 엄마 품이 없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린 장르 소설이 자주 눈에 띄게 되었다. 뒤늦은 후회조차 가벼운 서정에 지나지 않을, 정말로 삭막한 세상에서 기계인간이 인간성을 갖고자 하는 경우도 보였다. 과학자들이나 그 과학자들을 지원하는 권력자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면 세상은 필경 삭막하기만 한 곳이 되고 말 것이다.

 

 

힘들었겠다

 

 

석가모니는 힘들었겠다

아들 두고

아내 두고

집을 나오느라고.

 

석가모니는 힘들었겠다

왕자 자리 버리고

왕궁 버리고

집을 나오느라고.

 

석가모니는 또 힘들었겠다

이런 거

잊느라고.

 

 

석가모니 이야기 읽을 때마다 '나는?'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설목은 그저 담담하다. 힘들었겠다, 힘들었겠다 할 뿐인데 그게 참 깊게 다가온다.

 

 

조그만 바다

 

 

조그만 바다가

어디 있냐고?

 

바닷가 모래밭에

작은 구덩이를 파 봐

바닷물이 얼른 달려와 들어오지

그게 조그만 바다지

 

요건 내 집

들어온 바다는 좋아서

가만히 있지

 

끼룩 끼룩

갈매기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있지

 

조그만 바다는

조그맣게 있지.

 

 

이우환 화가의 에세이가 생각났다. 그의 소재 중에는 돌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일본 사는 그가 귀국해서 어느 유적지에서 갖고 간 돌 하나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까마득한 옛날 일을 생각해 본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에게 돈이 없었겠나? 큼직한 기념품을 살 수 없었겠나?

그 넓은 바다의 곁에서 작은 바다를 만들었을 설목을 떠올려보았다.

 

 

─ 소의 해(2021)에

 

 

큰 입을 가지고도

물지 않는다

 

큰 눈으로

보기만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이 물었을까......

 

 

새의 말을 들어 봐

 

 

새가 노래만 한다고?

아니야

새의 말은 다 노래라고?

아니야

 

아파 아파 할 때도 있고

괴로워 괴로워 못 견뎌 할 때도 있고

슬퍼 슬퍼 울 때도 있고

배고파 배고파 조를 때도 있고

힘들어 힘들어 쉬고 싶을 때도 있고

외로워 외로워 어울리고 싶을 때도 있고,

 

이런 말 새겨듣지 못하고

우린 아, 좋아 좋아 라고만 하지.

 

 

새가 울더라고 하면 당장 그건 우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것이라고 덤벼들듯하는 이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뭐라고 하기가 싫어서 요즘은 '새소리'라고만 쓰고 있다.

설목이 이 시를 발표한 것은 2022년 가을이었는데 나는 《시선》이라는 문예지를 본 적이 없어서 그걸 몰랐다. 알았더라면 왜 그런 이들에게 이 시를 보여주지 않았겠는가. 지금이라도 좀 보여주고 싶지만 그게 누구누구였는지 생각나질 않는다. '이런 사람은 으레 이렇지' 생각했고, 굳이 기억해 두기가 싫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다. 새들도 나처럼 지낸다는 것도 '너무나' 좋다. 그게 위안이 된다. 시에게, 시인에게 우리는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지난 주말 안동의 김원길 시인이 전화로 얘기해 주었다.

"시에는 원고료가 없는 경우가 더 많을걸요. 심지어 게재료와 책값 10만 원, 20만 원을 요구하는 데도 있지요."

"미쳤네! 아니, 그럼 시인은 뭘 먹고 살지요?"

"그래서 상을 받고 싶어 하죠. 상금이 많은 상이 더 큰 상이죠. 상(상금)을 받으려고 애들을 쓰죠...."

"아, 저런! 그야말로 자본주의시대의 시인들이네요...."

그 김원길 시인은 이번에 한국문인협회로부터 제17회 한국문학백년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은 크기만 하고 상금은 없단다. 그 참...

이런! 설목의 동시집 이야기를 다른 시인 수상 이야기로 끝낼 뻔했네?

다음에 설목을 만나면 내가 밥을 사야 한다. 나는 그렇다 치고 시인이 쩔쩔매는 꼴은 생각만 해도 미안하다.

 

시를 이렇게 옮겨 쓰는 것도 다 표절인데 너무 많이 옮겼다. 시인들은 표절에 대해서조차 말이 없다. 그렇게만 보면 세상에 시인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