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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by 답설재 2024. 7. 7.

 

 

 

블로그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에서 한여름의 정원을 보고 아름다운 가곡이 흘러나올 것 같다고 했더니 숲지기님은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쑥쑥 자라 있는 잡목들과 웃자란 잔디를 겨우겨우 제압했지만 제압한 것처럼 보일 뿐 머잖아 성큼 자라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숲지기님은 워낙 바빠서 답글을 읽고 또 댓글 쓰는 걸 자제해 왔는데 이번에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도 그렇다.  온 힘을 다해 제압해 버리고 돌아서며 이내 굴복하고, 다시 제압하고 굴복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게 참 힘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다른 일 같으면 벌써 던져버렸을 일인데 단 하나 의무처럼 남은 것 같은 이 일에만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잡초에 대한 숲지기님 생각에 몇 자 덧붙였지만 사실은 다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옛 성현들은 노인이 되면 마침내 도가 통하고 거의 신선처럼 살아간 것 같은데 나 같은 범부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그런 경지는 그림 속에라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죽는 날까지 이렇게 와신상담으로 살아가며 이래저래 주변 사람들을 귀찮고 어렵게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숲지기님의 답글에 대한 공감의 글 끝에 "시지프스의 신화"(알베르 카뮈) 생각이 난다는 말도 썼다. 시시포스는 지금도 바위를 굴러 올리고 있을 것인데 난들 무슨 다른 수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신들이 시시포스에게 내린 형벌은 바위 하나를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굴려 올리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산꼭대기에서는 돌이 제 무게로 다시 떨어져 내리곤 하기 때문이었다. 신들이 헛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엔 뭔가 일리가 있었다.

(......)

시시포스가 부조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열정뿐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그는 부조리의 주인공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그의 경멸,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무(無)를 성취하는 데에 온 존재를 써야 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형벌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지상에서의 열정을 위해 치러야만 하는 값이다.

 

 

내가 시시포스를 잊지 않는다면 이 부분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초 작업이 무슨 대단한 일인 양 시시포스 이야기를 하나 싶겠지만 내게는 모든 일이 다 그렇게 다가온다는 걸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

더구나 (아무나 하는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숲지기라는 사람이 해준 이야기여서 더 인상 깊었을 것이다. 오늘 보니까 이런 답글이 덧붙여져 있었다.

 

 

호미를 씻으며 오늘 한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시지푸스가 돌을 산 꼭대기로 올릴 때도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그 일에 열중하였을 것 같아요.
그거면 되었지 싶습니다.
손이 무릎이 삭을 만큼 일을 해야 이 지구에 존재허가를 받는 사람이 어디 시지푸스뿐일까요.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이 저로 인해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때는 그럴 것 같았는데, 그게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인지 오래전에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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