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양반은 의사 선생님이어서 너무 바쁘다.
지난봄 어느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부부가 와서 잡초를 대충이라도 제거하고 돌아갔었는데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자욱한 꽃밭이 되고 말았다.
이 꽃밭 사진을 본 시인은 참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전에 진달래였던가, 내가 무슨 봄꽃을 이야기했을 때는 '점령(占領)'이라는 말을 썼었는데 이번에는 또 편안해 보인다고 한 것이다. 그 시인은 내 모든 열매를 직박구리가 거의 다 따먹는다며 미워하자 미운 건 당신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내가 다시 뭐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그의 말을 부정하는 건 아무래도 완벽하게 논리적이진 않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
그가 이 사진을 보고 참 편안해 보인다고 한 걸 그 의사 선생님께 일러바칠 수도 있다.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면 나는 당장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봤자 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다. 그 의사 선생님은 나이로는 한창때이지만 특별히 점잖아서 "그래요? 편안해 보인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답설재님은 어떤가요?" 할 것이 뻔해서 나만 용렬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괜히 나만 머쓱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의사 선생님께 일러바친 걸 그 시인이 알게 되면 "그래 의사 선생님이 뭐라던가요?" 하면 나는 이쪽저쪽 이중으로 머쓱해질 것도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이 꽃밭을 볼 때마다 강릉 출신 이순원 작가의 어떤 소설을 떠올리곤 한다. 하도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어서 그 장면조차 분명하게 떠오르진 않지만 아마도 첫사랑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의사 선생님이 직접 이 꽃밭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뿐이다. 나는 괜히 걱정스러워서 그 의사 선생님 부부는 저 꽃이 다 지고 나면 오든지, 그렇게 바쁘니까 차라리 내년 봄에나 다시 다녀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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