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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어떤 깨달음의 순간

by 답설재 2024. 6. 23.

 

 

교육부 근무는 시종일관 어려웠습니다. 

3년간 파견근무를 마치고 정규직 발령을 받은 것은 1993년 6월이었습니다.

편수국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직원은 장학관(담당관)과 연구관, 연구사 합해서 7, 8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걸핏하면 출장을 나갔습니다. 당연히 신임인 내가 사무실을 지켰습니다. '교육부는 이렇구나...' 하면 그만이었는데 다른 부서 직원이 와서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나중에 내가 과장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전입된 장학관 C 씨는 우리 과 장학관(팀장) 회의 때 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팀원들에게 업무 전달을 하지 못했고 계속 그렇게 근무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내 다른 과로 옮겨갔는데 장학실 실장이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상신해 주는 걸 보고 죽어라 일을 하는 사람과 상을 받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기야 그 실장이 나를 불러 대통령 표창을 받으라고 했을 때 나는 공적조서 쓸 시간이 없다고 해버렸습니다.

나중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각 과에 배정되어 수습 기간을 거치는 걸 보고 '나도 수습 기간이 있었으면 오죽 좋았을까' 싶었습니다. 사무관은 5급으로 출발하는데도 수습기간을 주면서 어제까지 교사였던 사람에게 오늘은 편수관 혹은 연구사로 근무하라는 건 너무나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건 대면(對面)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조금 더 설명해 달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가 오는 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정적인 전화는 담당 직원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내일 다시 전화하라고 하면 모면할 수 있었는데 어찌할 수 없는 건 교원들의 전화였습니다. 시도 교육청, 시군구 교육청(지금의 교육지원청 : N 대통령의 지시는 교사들을 찾아가서 지원하고 가르쳐주고 하라는 의미였는데, 허울만 좋은 '지원'이 붙어서 이름만 길어졌죠), 각급학교에서 오는 선생님들의 전화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교육과정해설서 몇 페이지 몇째 줄 이러이러한 내용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는 실업계 고등학교인데 지침의 이러이러한 내용은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였지 않습니까?

 

그런 위기는 그해 겨울까지 계속되었는데 사무실에 혼자 남는 건 나더러 죽어라는 것이냐고 하면 담당관이나 연구관은 미소만 짓지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한 번만 받으면 덥지도 않은데 속옷이 다 젖어 사우나에서 땀도 닦지 않고 사무실로 쫓아 들어온 사람 같았고 겨울인데도 웃옷을 벗어버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본 다른 과 직원은 화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교육과정 자료들을 갖고 귀가해서 밤이 이슥하도록 읽었습니다. '읽으나마나'이던 내용들이 슬며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나는 전문가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어려워하면 내가 나서서 설명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의 때 시도 교육청에서 온 장학사들은 나를 보고 "걸어 다니는 교육과정"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사부님이 나를 소개하자 이 노인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타는 듯이 뜨거운 손이었다. 그 손을 촉감하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들어왔던 그의 행적,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나무』에서 읽었던 내용을 온전하게 납득했다. 나는, 빠리에서 공부할 당시부터 신학적인 명상을 물리치고, 갱생한 막달레나로 거듭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정도로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신비의 불꽃을 이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신비주의적 삶과 십자가에 대한 사랑으로 그를 이끈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와 그와의 질긴 관계, 그리고 설교하는 열도에 놀란 교단이 피신시킬 겸 그를 라 베르나 수도원으로 보낸 까닭도 이해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모습은, 그와 형제가 되어 심오한 심령의 사상을 주고받은 성녀의 얼굴처럼 다정스러워 보였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상)》(열린책들, 1994 : 95)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노인은 우베르티노라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한참 동안 나의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을 만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더러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돈도 이렇게 벌 수 있었다면 나도 지금 부자일 것입니다. 돈만 많으면 동생이 형도 되고, 바꾸면 안 될 것도 바꿀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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