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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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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정인지 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이윤식 옮김, 솔 1997      한학(漢學) 공부 좀 할 걸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정치인들이 사자성어나 고사, 옛 문헌의 한 구절 혹은 어떤 단어를 들어 남을 헐뜯을 때다. 그런 걸 인용해서 덕담을 하는 경우는 보기 어려웠다. 그렇거나 말거나 '저 사람은 그렇게 분주한 생활을 하는데도 한학을 깊이 한 것 같은데 난 뭘 했지?' 한탄을 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시경(詩經)을 한번 읽어봤는데 나로서는 아는 척할 때 써먹을 만한 부분을 눈 닦고 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제 책을 읽을 만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므로 아는 척할 때 써먹으려고 책을 들여다보는 무모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노릇도 소질이 있어야 하는 건가?' '.. 2024. 7. 6.
아서 프리먼·로즈 드월프 《그동안 당신만 몰랐던 스마트한 실수들》 아서 프리먼·로즈 드월프 《그동안 당신만 몰랐던 스마트한 실수들》10 DUMBEST MISTAKES SMART PEOPLE MAKE AND HOW TO AVOID THEM송지현 옮김, 애플북스 2011      이 책을 10년도 더 갖고 있었다.누가 내게 선물로 주었을까?('답설재는 실수를 좀 하는 편이니까 이 책이 필요할 거야.')나 자신이 실수를 잘하는 걸 자각하고 그걸 좀 방지해 보려고 내가 산 책일까?지금도 읽히나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건재'하고 있다('그렇다면 그냥 버릴 순 없지.') 인지치료에 관한 책이다(발췌). 01치킨 리틀 신드롬 유명한 전래동화로 2005년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치킨 리틀〉의 주인공 꼬마 닭 리틀은 머리에 도토리를 맞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으로 착각해 재앙이 일어났.. 2024. 7. 3.
김사람 「인공 우주 광시곡」 인공 우주 광시곡  김사람  눈을 뜨니 한 세계가 멸망했다이유는 몰랐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노력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고밤이 낮보다 환했다 이전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세계가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처음 보는 새가 익숙한 음률로 울었다 인기척 찾아 산책을 했다바다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일렁이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나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기에우리는 이름과 노래를 잊었다 별이 사치스러운 밤이었다영원을 떠도는 바람에게소원을 빌었다 세상이 망해서였는지사랑이 보잘것없어선지 눈물이 오래 멈추질 않았다 늘 젖어 있던 우리는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머문 곳을 떠날 때마다밀랍 인형들이.. 2024. 7. 2.
이 편안한 꽃밭 주인양반은 의사 선생님이어서 너무 바쁘다.지난봄 어느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부부가 와서 잡초를 대충이라도 제거하고 돌아갔었는데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이렇게 자욱한 꽃밭이 되고 말았다. 이 꽃밭 사진을 본 시인은 참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전에 진달래였던가, 내가 무슨 봄꽃을 이야기했을 때는 '점령(占領)'이라는 말을 썼었는데 이번에는 또 편안해 보인다고 한 것이다. 그 시인은 내 모든 열매를 직박구리가 거의 다 따먹는다며 미워하자 미운 건 당신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내가 다시 뭐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그의 말을 부정하는 건 아무래도 완벽하게 논리적이진 않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그가 이 사진을 보고 참 편안해 보인다고 한 걸 그 의사 선생님께 일러바칠 수도 있다.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 2024. 7. 1.
두꺼비 짝 찾기 저기 어디쯤에서 어제 비가 내린 후로 웩! 웩! 웩! 웩! 뭔가가 계속 웩웩거린다.체면도 없고 밤낮도 없다.두꺼비인가?간혹 개구리 소리도 들린다. 개개개개...(아니라면 갤갤갤갤...) 개구리는 훨씬 가늘게 간혹 가다가 운다.(두꺼비가 아니라면 두꺼비들에게는 미안하다.)아마도 짝을 찾는 소리겠지?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는 게 아니라 노래라고 하겠지?저게 노래인지 한번 와서 들어보라고 하고 싶다.정말이지 저렇게 쉬지 않고 웩웩거리는 건 나는 싫다.지겹지도 않나?무슨 짝을 저렇게 악착같이 찾나?저건 도무지...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다른 볼일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웩웩거리기만 한다.절박하겠다 싶긴 하다.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가 좋으면 지금은 습지가 되어 있는 저곳은 즉시 말라붙을 것이기 .. 2024. 6. 30.
브뤼노 블라셀 《책의 역사》 브뤼노 블라셀 《책의 역사》권명희 옮김, 시공사 2002       도판(사진)이 많아서 읽기에 좋다나는 박사학위논문도 혹 볼 만한 도표나 그림, 사진이 들어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 훌훌 넘겨보고 대부분 실망스러워서 바로 책장 속에 넣어두곤 했다. 컬러판 그림에 가까운 건 면지에 심사한 교수들이 찍은 도장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은 소설책을 들고서도 혹 삽화가 있나 싶어서 여기저기 살펴본다.도판이 많은 이런 책은 당장 읽지도 않으면서 일단 사놓았던 것들이다.  제1장 손으로 만든 책(13)제2장 구텐베르크, 논란의 발명자(41)제3장 인쇄술의 승리(69)제4장 검열의 시대(91)제5장 최고의 책(109)기록과 증언(129)  신기한 얘기를 찾으며 읽었다(예). 책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온(bi.. 2024. 6. 30.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는 공정한 평가 (2024. 6. 28)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모든 이가 다 천재다. 그렇지만 나무를 오르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Everybody is a genius. But if you judge a fish by its ability to climb a tree, it will live its whole life believing that it is stupid.)” 끔찍한 상황의 물고기가 가련하다. 조금 더 생각해서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그런 처지가 아닌가 싶으면 어떻게 끔찍하고 가련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인슈타인의 이 충고는 누구나 수긍할 만한 카툰(풍자만화)을 통해서도 소개되고 있다. 교육자가 분명한 늙은이가 권위를 상징하는 커다란 책상 위에 서.. 2024. 6. 28.
가브리엘 루아 《전지전능한 할머니가 죽었다》 가브리엘 루아 《전지전능한 할머니가 죽었다》이소영 옮김, 이덴슬리벨 2012       할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살고 있다. 사 남매를 둔 할머니의 자손은 여러 명이다. 이제 그 아이들 이름도 잊었고, 그 손주들은 지나는 길에 들러 단 5분도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떠나버린다.여섯 살 외손녀 크리스틴이 어머니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할머니 댁에 머물게 되어 따분해하자, 할머니는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찾아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고 멋진 모자에 여행 가방을 갖추어 곧 여행을 떠날 공주 차림의 인형을 만드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크리스틴은 못하는 게 없을 할머니를 좋아하게 된다. "우린 늘 우리가 바라던 일에서 벌을 받기 마련이지. 난 삶이 편안하고 질서가 제대로 잡히기만을, 그래서 애들이 치마폭에 매달려 시도 .. 2024. 6. 26.
김복희 「요정 고기 손질하기」 요정 고기 손질하기  김복희  쌀가마니 같네이 무게가 합하면아이 여러 명 같네 여기서 나온 국물과 살로먹일 입에는 좋은 일이네 이 생각이쌀가마니의 쌀을 다 털어 먹도록떠날 기색이 없어서 뼈를 정리했지뼈에서 분리한 숨을 모았어 이게 정말 맛있는 건데너무 가벼워 금세 사라져버린다니까입김에 날아가 버린다니까 나는 숨을 죽여야 했지 강아지 망아지 송아지그 모든 부드러운 혓바닥을느꼈던 순간을 합친 것보다더 조심스럽게 숨을 거둬두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헤아렸어사람을 사랑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목회자가 되는 사람도,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고건물 아래로, 다리 아래로사람의 품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사랑이 때와 재능을 만나 사랑만 하는 사람도 있지나는 요정을 사랑해서요정 고기를 손질하나 손질할 때마다가장 .. 2024. 6. 24.
어떤 깨달음의 순간 교육부 근무는 시종일관 어려웠습니다. 3년간 파견근무를 마치고 정규직 발령을 받은 것은 1993년 6월이었습니다.편수국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직원은 장학관(담당관)과 연구관, 연구사 합해서 7, 8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걸핏하면 출장을 나갔습니다. 당연히 신임인 내가 사무실을 지켰습니다. '교육부는 이렇구나...' 하면 그만이었는데 다른 부서 직원이 와서 무슨 말을 하면 그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니? 나중에 내가 과장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전입된 장학관 C 씨는 우리 과 장학관(팀장) 회의 때 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팀원들에게 업무 전달을 하지 못했고 계속 그렇게 근무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내 다른 과로 옮겨갔는데 장학실 실장이 그에게 대통령.. 2024. 6. 23.
지금 여기에서의 사랑과 행복 젊음을 교단에 바쳤다고는 하지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 건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 당시에는 부모 결손 가정이 흔하지 않아서 그런 점에서는 편한 교사 생활을 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담임한 아이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눈에 띄면 마음만으로라도 특별히 유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D시에 전입해서 맨 처음에 만난 아이는 아버지가 없어서였는지 자주 내게 다가왔는데 나는 그게 오히려 고마워서 지금도 그 아이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잘 살고 있겠지' '이제 초로의 할머니가 되었겠구나...' 교육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마지막 5년 반 동안 교장으로 지낼 때는 여기서나 저기서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 그런 아이들은 예.. 2024. 6. 22.
가브리엘 루아 《싸구려 행복》 가브리엘 루아 《싸구려 행복》이세진 옮김, 이상북스 2010      몬트리올 근교 소도시 생 탕리, 레스토랑 '십오센트'의 열아홉 살 플로랑틴 라카스는 가냘프지만 예뻐서 뭇 사내들의 눈길을 끈다. 장녀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 싸구려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한다.하필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세를 하려는 기계공 장 레베스크에게 끌려 혼신을 바치고 버림을 받는다.플로랑틴의 아버지 아자리우스는 말만 번지레하고 너무나 무능하다. 그의 아내 로즈 안나는 열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발버둥을 치지만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지기만 한다.플로랑틴은 입대하여 휴가를 나온 유복한 가정의 에마뉘엘 레투르노의 눈에 들었지만 마음속엔 장 레베스크가 자리 잡고 있어 거짓 사랑을 나누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유럽.. 2024.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