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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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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독 1. 모르고 같은 책을 두 번 산 적이 있다. 2. 시작하기도 전에 읽기를 포기한 책이 있다. 3. 표지 디자인이 좋다는 이유로 책을 산 적이 있다. 4. 책을 펼쳐 잉크와 종이 냄새를 들이마시면 안정이 된다. 5. 단지 할인한다는 이유로 책을 산 적이 있다. 6. 갑자기 잘 모르는 주제에 깊이 흥미를 느끼고 책을 여섯 권 이상 산 적이 있다. 7. 가족의 눈을 피해 책을 들여오기 위해 근사하고 엉큼한 계획을 짠 적이 있다. 8. 집에 손님이 와서 하는 첫마디가 대개 당신의 책에 대한 언급이다. 9. 침대 옆에 적어도 대여섯 권의 책을 놓아둔다. 10. 책방 직원이 찾지 못하는 책을 당신이 찾아낸 적이 있다. 이 물음들의 제목은 이렇다. ○×테스트 당신은 책 중독자인가? 톰 라비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 2024. 4. 6.
산책로의 오리구이 전문점 나는 산책을 할 때 웬만하면 저 집 앞을 지나가는 길을 선택한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신점·신수·결혼운·사업운·궁합·택일'이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점집이 있다. 나는 무엇을 물어볼 수 있을까... 신수? 그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당신은 워낙 박복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하나?... 생각만 깊어져서 지나간다. 저 방갈로 모양의 집은 오리 고기 전문점이다. 지난 초봄 어느 토요일, 동탄 사는 내 초등학교 친구 부부가 저 집으로 찾아왔었다. 오리구이는 워낙 맛이 좋아서 우리 내외는 먹을 겨를이 거의 없었다. 아내에게 좀 미안해서 며칠 후 둘이서 새로 찾아갔는데 그날은 또 내가 실컷 먹어버렸다. 지금 생각하니까 아내는 어이가 없었을 것 같다. 바야흐로 목련이 한창 피어나기 시.. 2024. 4. 4.
황모과 《언더 더 독》 황모과 《언더 더 독》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돈이 많으면 곧 모든 일을 AI들에게 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겠지? 그런 세상에서도 더러 개(독)만도 못한 생활(언더 더 독)을 할 수도 있겠지? 돈으로 DNA를 편집해서, 그러니까 유전자를 조작(편집 혹은 시술)해서 머리가 최고로 좋게 하고, 온갖 험악한 바이러스를 다 물리치게 하고, 힘들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울퉁불퉁한 인간이 되게 하고, 인물이 훤한 인간이 되게 하고 심지어 지성과 인품마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겠지? 과학자들은 지금 그런 걸 연구하고 있겠지?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 의하면 2050년경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능해진다고 했지? '죽지 않는 인간' '신인류' '신과 같은 인간'이 된다고... 그럼 그게 정말 '인간.. 2024. 4. 3.
잡초는 쉬질 않네 해마다 저 세석 사이로 잡초가 올라온다. 잔디 사이로 올라오는 건 더 쉽다. 봄에만 올라오는 것도 아니다. 한겨울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며칠만 기다리면 그들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다행한가. 그 잡초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게 주어지는 일을 한다. 2024. 4. 2.
봄 속으로 들어간 아이들 어떤 선생님일까... 아이들을 봄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선생님. 2024. 4. 1.
길가메시 프로젝트 : 불멸의 신인류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서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에 그 왕의 이야기를 읽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건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에 대한 인간의 무모한 욕심을 나타낸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그 기억이 흐릿했으나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에서 길가메시 이야기를 다시 읽은 것이 최근이어서 기억에 생생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고 조리있게 설명하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어서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유발 하라리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길가메시 이야기.. 2024. 3. 31.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일기 (2023.3.29) 2024년 3월 4일 월요일 긴장 속 하루였다. 날씨가 좀 쌀쌀했는데 몸도 마음도 분주해서 그런 줄도 몰랐다. 마스크를 쓴 아이가 세 명이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점심식사 때 잠깐씩 살펴보았다. 정겨운 아이들,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 지난해엔 ‘추락한 교권’ 이야기가 참 많았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을까, 곤혹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별일 없을 것을 확신하고 싶다. 아이들 다툼은 충분히 이해시키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학부모와의 소통에서도 그것을 유념하면 그들도 나를 믿을 것이다. 로버트 풀검(「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은 사람의 머릿속에 든 것은 다 다르다면서 “당신은 왜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지 않나요?” 묻기보다는 “그렇게.. 2024. 3. 29.
이 치약 괜찮지 않아? 이 치약 괜찮네 싶어 또 구입하자고 생각했다. 거품이 너~무 심하게 일어도 거북하지만 적어도 가짜 같은 느낌이고, 특이한 맛이 나거나 특이한 냄새가 나면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밍밍하면 지금 장난하나 싶고 적당히 톡 쏘고 적당히 매워야 그럴듯하다. 그럼 이 치약은 평범하면서도 적당한가? 나는 성격이나 취향 같은 건 고약해도 평범한 치약을 좋아하는 '치약적인 면'에서는 평범한 사람인가? 모르겠다. 필요하면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치약에 대해서도 특이하다(평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 그걸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나? 치약 연구가들이나 제조업 종사자들은 비교적 잘 알겠지? 이 튜브에 그걸 밝혀 놓지 않았을까? "이건 평범한 치약의 일종이다.. 2024. 3. 27.
애인(벤야민에 따르면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 2024. 3. 26.
에디슨 흉상 보기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 '에디슨 흉상'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디슨 흉상이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에디슨 흉상을 하나 사고 싶은 걸까? 에디슨은 돈을 많이 벌어서 요즘 갑부들처럼 온갖 호사를 누려보았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에디슨'을 넣으면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도시로 토머스 A. 에디슨의 연구실이 있던 곳이라는 설명도 있고, 영어권의 인명이자 성씨인데 으레 사업가이자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을 가리킨다는 설명도 보인다. 에디슨은 묘한 인물, 재미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병아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달걀을 품고 앉은 그를 어머니가 발견한 이야기, 학폭을 저질 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엉뚱한 짓, 황당한 행동을 하다가 퇴학을 당해서 어머니가 데리고 오며 걱정 말라고.. 2024. 3. 25.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길 2015 본문 앞에 긴 해설이 있다(~64).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해설은 됐고'로 넘겨버리고 69쪽에서 시작되는 『일방통행로』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事實)에 훨씬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2024. 3. 24.
이별하기 사무실에 나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자.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고 헤어지자. 뭐라도 갖고 가게 하자.'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했는데 사람이 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해 놓고도 얻어먹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도 했다. 그리고는 곧 코로나가 번지고 점점 더 심각해졌고 이래저래 사무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소득 없는 아이디어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요즘도 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누굴 만나든, 누가 찾아오든, 이번엔 누가 내야 할까를 계산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를 읽다가 그때.. 2024.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