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사람 「인공 우주 광시곡」

by 답설재 2024. 7. 2.

 

 

 

 

 

인공 우주 광시곡

 

 

김사람

 

 

눈을 뜨니 한 세계가 멸망했다

이유는 몰랐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고

밤이 낮보다 환했다

 

이전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계가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처음 보는 새가 익숙한 음률로 울었다

 

인기척 찾아 산책을 했다

바다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일렁이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

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나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기에

우리는 이름과 노래를 잊었다

 

별이 사치스러운 밤이었다

영원을 떠도는 바람에게

소원을 빌었다

 

세상이 망해서였는지

사랑이 보잘것없어선지

 

눈물이 오래 멈추질 않았다

 

늘 젖어 있던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머문 곳을 떠날 때마다

밀랍 인형들이 우리를 배웅했다

 

기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

김사람  1976년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리토피아』 등단. 시집 『남자들의 눈은 전쟁을 동경한다』『DNA』 등.

 

 

 

끔찍한 세상이다.

내 생전에는 이런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이 시 읽고 한번 빨리 와서 곧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인간들은 후회해도 이미 늦어서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세상은 빨리 가고 그 끔찍한 세상이 얼른 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모든 권력과 금력, 후회, 반성은 물론 정의와 복지, 평등, 과학, 종교 같은 것들까지 무의미한 세상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 그곳을 떠날 때 우리를 배웅하는 것이 밀랍인형뿐인들 어떻게 하랴.

"눈물이 오래 멈추질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아무리 암울하고 쓸쓸한들, 아무리 끔찍한들 지금보다야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다.

 

이달의 『현대문학』에서 보았다.

미래를 보여주는 과학 서적에서나 보던 건조한 문장들이 익숙하게 나열되어 있구나 싶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아, 이렇게 서정적일 수도 있나 싶었다.

이것이, 이 조용한 외침이 일말의 움직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해도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