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치
김연덕
집안의 여자 어른이 갖고 있던 장신구의 이미지를 따라 살게 되는 삶은 얼마나 따뜻하고 끔찍한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
안방의 직각 거울
할머니는 마음 한쪽을 깊이
빼앗긴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을 아기로 다루는 것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곤 했고
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 그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그릇
그릇 안의 크고 작은 브로치들이었다
여러 색의 원석이 도금된 세찬 형태의 브로치들은 꼭 그릇 안에서 잠든 곤충처럼 보였지
할머니는 외출 때를 제외하고 내성적인 그 곤충들을 잘 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
따뜻하고 지루한 대화에 브로치들도 종종 자기들만의 빛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
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유리의 두께를 넘어 거울로 천천히
도달한 브로치들의 광채는
슬픔은
거울의 표면이 뜨겁게 쪼그라들던 순간은
오래전 죽은 사람이 쓴
복잡한 수식과 리듬
문법으로 구성된 문장을 읽고 거울 안쪽으로 빠져드는 기분
*
해외 출장을 자주 가던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엄마의 것으로 반 정도 살아 있는 장신구들을 종종 사 오곤 했다
비행기 아래 내려다보이는 뭉뚱그려진 산과 바위처럼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그가
섬세하고 독창적인 시선으로 골라오는 장신구들의 형태를 볼 때마다
여러 장의 종이에 안전하게 싸인 장신구가 할아버지의 낡은 캐리어에서
하나씩
잠에서 깨어나듯
조용하게 당황하며 등장할 때마다
우리 집 여자들은
미국에서 이탈리아에서
무심한
사랑 속에서 브로치를 집어 드는 그 짧은 순간
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그의 등줄기로 흘러내렸을 외국의 땀과
잠깐 다른 사람이 되어
굉장한 보석 고르기에 몰입했을 한낮이
할아버지의 손끝으로 스쳐 지나갔을 어린
죽은
할머니의 얼굴
살아 있는 곤충들을 집어 들어 그의 캐리어에서 다시 잠들게 하던 방식이
*
어려운 책은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머릿속에 떠다니는 문장들을 계속해 수정하면서 두고 읽게 된다
거울은 지금 이 순간의 수정 평생의
수정을 위한 것
내 얼굴 위로 지루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한 것
거울의 사방을 둘러싼 커튼의 무거움은 이제
할머니의 것이 된 브로치들을 더 외롭고
더 환하게 만든다
이것을 고를 때 미국의 태양 아래서 이탈리아의 어두운 인파 속에서 당신 생각을 했어 이 진주가 토파즈가 호박이 단순한 사랑으로 손상된 당신 얼굴빛과 잘 어울릴 것 같았어 같은 말들을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고
할머니는 단지 사연을 알 수 없는 곤충들의 광채를 화장대 곁 유리그릇에 넣는다
할아버지의 긴 시선
끝에 닿았던 브로치들은 할머니의 먼지 나는 마음에 담겨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을 쓰는데 대부분은
할머니의 책에
아끼는 거울에 가닿지 못한 채 그릇 안에 그대로 갇히게 된다
이후 곤충들 몇 개는 내 엄마에게
몇 개는 작은 엄마들과 잊힌 공간들에게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
안방과 유리그릇과 할머니의 거울 그리고 세공이 아름다웠던 곤충들은 이제 완전히 헤어지게 되었지만
할머니의 브로치 이미지가 내 삶에 주는 어둡고 투명하고 더워 지친 사랑 이야기
조용하게 살아 있는
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
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
김연덕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 등단.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
읽고 또 읽으며 브로치들이 담긴 유리그릇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나서 유감스럽게도 물려줄 것이 없게 된 걸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안하다.
생각으로는 쉬운 일이다. 생각이 아름다우면 생활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고 생활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브로치 같은 것들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쉬운 걸 실현하지 못한 건 생각이 비었기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것조차 없는 걸 확인하게 되면 어떤 생각들을 할까?
"계로록(戒老錄)"(소노 아야코)에는 119 가지의 부탁이 들어 있고, 그 마지막 119번째 부탁은 이렇다.
'자신의 죽음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노력한다'
브로치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그 119번째 부탁이라도 들어주면 좋겠지?
어째 그게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쉬운 일일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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