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by 답설재 2024. 5. 15.

L 시인이 내게 보내 내것이 되어준, 화가 이우환의 시 '보이는 것'이 생각나게 하는.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김연덕

 

 

산속에 묻혀 있던 우리 집에서 언니는 한밤중에도 비이올린을 켜곤 했다 언니 방 방문에는 검은색 니트를 입은 카라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언니가 활을 꺼내 송진을 문지를 때마다 그 지휘자 옆으로 사라져버릴까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흑백의 세계로 언니가 사랑하는 외국으로 빨려 들어갈까 무서웠다 언니 방 바깥으로는 창문과 너무 가까이 뻗어 자란 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높은음을 켤 때마다 잔가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기진한 채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할 것처럼 조금씩만 떨리곤 했다 가지 몇 개가 어둡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어린 나는 활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거칠고 고집스러운 흑백의 사랑을 느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바깥의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 우리 집에서의 무성한 연주는 계속되었다 오빠 방 뒤편으로는 꿩이나 고슴도치 날것의 빛이 자주 나타나는 허허벌판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오빠의 피아노 연주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야생동물들이 자기들 발끝으로 빠르고 미묘한 날갯짓으로 악보의 음표들을 약간 흐릿하게 쪼아 먹는다거나 비나 눈이 만들어낸

긴 상처에 의해 도굴된 빛이 악보 전체에 뛰어 들어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키 큰 잡초들은 꼭 사려 깊은 음악에 굶주린 사람들 다른 세계로

한순간 건너가고 싶은 사람들 같아서 밤새 피아노의 너그럽고 산만한 음률들을 기다려온 듯해서 오빠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방해하고 이해해준 그 차가운 땅 자신의 악보와 이상하게 어긋나는 땅을 뒤로하고 기나긴 연주를 이어나가곤 했다

 

언니와 오빠는 가끔씩만 함께 연주했고 남매의 연주를 어디에도 전달해주지 않던 인왕산은 산자락 입구에 꽃잎이나 낙엽으로 조금 떨어져 있던 선율들마저 흡수해 오래

쥐고 있다가 내가 조금 컸을 때 건네주었다

 

나는 언니와 오빠의 투박하고 투명한 악기 나뭇가지와 두더지와 흙냄새가 묻어 있는 악기를 반씩 물려받아 같은 집에서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연주했으나

그들의 연주를 지켜볼 때만큼의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은 좀체 느낄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언니는 카라얀의 흑백 객석으로 오빠는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잡초밭으로 사라졌다 내가 충분히 클 때까지 나를 기다려준 언니와 오빠는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 산속으로

산 밖으로 나갈 방법을 쉼 없이 연구했던 것이다 산과 최대한 멀어지는 것

더 가까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은 그런 것이었고 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

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

 

 

 

..............................................................

김연덕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 등단.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

 

 

 

 

L 시인에게

『현대문학』 5월호에서 보았습니다.

'언니'와 '오빠'와 '시인'이 내게 그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기억, 그 순간들이 나의 현실과 전혀 달라서 더 그립습니다.

 

이 시인이 유명한지, 더 유명해질 것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어떤 시를 썼는지, 어떤 시를 쓸 것인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 그대로 두고 앞으로 영영 이 시인을 좋아하겠습니다.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시인은 시로써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굳이 시를 그렇게 자주 쓸 것도 없지 않을까요?

같은 시를 자꾸 쓰는 것도 우습고, 더구나 시인은 그 생애가 시가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