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刊 臟器
장정일
제호(題號)가 이렇다 보니 저희 잡지를 대한내과이사회나 대한개원내과의사회의 기관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또 어떤 분들은 한국장기기증협회 기관지로 오해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月刊 臟器》는 창간한 지 29년째 되는 순수 문학 잡지입니다. 아(我) 지면을 통해 시인 6789명, 수필가 533명, 소설가 67명, 평론가 21명이 등단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국 대표 시인과 중견 소설가가 즐비하죠. 그냥 해 보는 가정입니다만, 이 분들이 동시에 활동을 멈추게 되면 한국 문학은 그야말로 시체가 되죠. 이분들이야 말로 한국 문학의 심장, 폐, 간, 위, 쓸개, 신장, 비장......이니까요. 연혁이 비슷한 다른 문예지에 비해 저희 잡지가 배출한 작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소수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문학사적 중요도나 성취면에서 이처럼 막강한 작가들을 배출하게 된 비결을 말해 보라면, 모두들 알고 계시는 저희 잡지만의 탁월한 등단 제도를 꼽아야겠죠. 그러면 저희 잡지의 등단 제도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다른 라이벌 잡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부터 볼까요?
10년 넘게 발행 중인 A 문예지는 격월간으로 공모전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 문예지는 지난 1월말 공모전 당선자들에게 등단 비용으로 76만 원을 입금하라는 안내문을 보냈다. 그 서류에 명시된 내역을 보면 작가협회 가입비 60만 원, 1년 치 작가협회 회비 선납분 10만 원, 1년 정기구독료 6만 원 등이었다.
이 문예지는 공모전과 별개로 개별 심사도 운영하고 있다. 공모전 당선자가 내는 등단 비용에 심사비 10만 원, 심사평 의뢰 비용 30만 원, 등단 책자 30권 구입비 30만 원, 작가협회 발전기금 30만 원 등 총 100만 원을 추가 납부하면 공모전을 거치지 않고 등단이 가능하다. 이 문예지의 관계자는 "등단 비용은 사무실 임대료, 문예지 출판 비용, 공모전 당선자 축하 행사 등 꼭 필요한 데만 쓰일 뿐 수익을 남기지 않는 형태로 운용된다"라고 했다. 문예지 운영을 위한 최소 비용이라는 해명이다.
국내 최대 규모 문인 단체의 한 관계자는 등단 장사에 대해 "각 문예지가 사적 자치 형태로 운용하는 것이기에 옳다, 그르다를 평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했다. 문예지와 예비 작가 간 합의하에 이뤄지는 거래이니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다. 여기에 빠진 건 독자에 대한 고려다. 암암리에 이뤄지는 등단 장사에 대해 알지 못한 채 문예지가 부여한 작가라는 이름에 신뢰를 가지고 작품을 읽을 사람들 말이다.*
돈을 받고 등단을 시켜 주는 문예지와 돈으로 작가가 되려는 이들을 욕하지 맙시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려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럼에도 저희는 한국 문학의 발전을 위해 이들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싶습니다. 작가라는 명예스러운 호칭을 고작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니요? 저희는 그런 구태를 강력히 거부합니다. 저희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가 되려는 분들의 장기를 원합니다. 저희는 흔들림 없는 문학 혼으로 어떤 고통도 감내하시겠다는 분들하고만 거래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문학은 돈 놓고 벼슬 사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당신의 심장, 폐, 간, 위, 쓸개, 신장, 비장을 내어놓으십시오. 피를 보지 않으시려거든 《月刊 臟器》의 라이벌인 A, B, C, D, E......로 가십시오. 그러나 격월간 시전문지 《眼目》이나 《季刊 ANUS》로는 가시지 말라고 만류하고 싶습니다. 제호만 봐도 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취급할지 감이 오잖아요? 《眼目》에서는 당신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季刊 ANUS》에서는 당신의 항문을 뽑아 버린답니다.
* 김승환, 「문예지 공모전, 생존을 위한 수단인가? ─ 한국 문학계의 오랜 관행 혹은 불행」, 《문화+서울》, 2019년 4월호.
아침에 숲지기 님 블로그에서 시 '봄비'(배한봉)를 보고 문득 작년에 보았던 장정일 시인의 이 시가 생각났다.
당신은 새 잎사귀의 걸음으로 내게 들어왔다
'봄비'의 첫 줄을 보며 생각했다.
'이 한 행으로도 흡족하지 않은가.'
'자본주의 사회니까 이제부터는 모든 걸 돈으로 쳐서 살아가기로 하고 지금까지처럼 시에 대한 원고료를 장난처럼 계산하지 말고 정확하게 따지기로 하면 이 한 행의 값은 어느 정도라야 할까? 적어도, 아무리 박하게 계산한다 해도 그 시인이 한 달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단 하루라도 재벌 총수처럼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일이 꼭 그렇게 이루어질 수도 없겠지?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는 황폐화해서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하고 그의 주장을 하나하나 들어보면 정말 그렇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가 그리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시의 값을 제대로 계산하자는 걸 가지고 이런 얘기를 하면 "그 참 설득력 있네!" 할 사람이 있기나 하겠나.
시인 중에도 시인답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해서 한결같지도 않다.
한결같지 않아서 고결한 시인이 빛나는 것도 이치에 맞고, 그렇다면 시인들의 세상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장정일 시집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 2019).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희경 「이야기」 "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15) | 2024.05.23 |
---|---|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1) | 2024.05.15 |
오은경 「매듭」 (0) | 2024.04.22 |
장석남 「사막」 (0) | 2024.04.11 |
심보선 「새」 (15) | 2024.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