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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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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프로젝트 : 불멸의 신인류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서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에 그 왕의 이야기를 읽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건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에 대한 인간의 무모한 욕심을 나타낸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그 기억이 흐릿했으나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에서 길가메시 이야기를 다시 읽은 것이 최근이어서 기억에 생생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고 조리있게 설명하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어서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유발 하라리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길가메시 이야기.. 2024. 3. 31.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일기 (2023.3.29) 2024년 3월 4일 월요일 긴장 속 하루였다. 날씨가 좀 쌀쌀했는데 몸도 마음도 분주해서 그런 줄도 몰랐다. 마스크를 쓴 아이가 세 명이었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점심식사 때 잠깐씩 살펴보았다. 정겨운 아이들,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 지난해엔 ‘추락한 교권’ 이야기가 참 많았다. 올해는 어떤 일이 있을까, 곤혹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별일 없을 것을 확신하고 싶다. 아이들 다툼은 충분히 이해시키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학부모와의 소통에서도 그것을 유념하면 그들도 나를 믿을 것이다. 로버트 풀검(「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은 사람의 머릿속에 든 것은 다 다르다면서 “당신은 왜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지 않나요?” 묻기보다는 “그렇게.. 2024. 3. 29.
이 치약 괜찮지 않아? 이 치약 괜찮네 싶어 또 구입하자고 생각했다. 거품이 너~무 심하게 일어도 거북하지만 적어도 가짜 같은 느낌이고, 특이한 맛이 나거나 특이한 냄새가 나면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주 밍밍하면 지금 장난하나 싶고 적당히 톡 쏘고 적당히 매워야 그럴듯하다. 그럼 이 치약은 평범하면서도 적당한가? 나는 성격이나 취향 같은 건 고약해도 평범한 치약을 좋아하는 '치약적인 면'에서는 평범한 사람인가? 모르겠다. 필요하면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치약에 대해서도 특이하다(평범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진 않겠지? 그걸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나? 치약 연구가들이나 제조업 종사자들은 비교적 잘 알겠지? 이 튜브에 그걸 밝혀 놓지 않았을까? "이건 평범한 치약의 일종이다.. 2024. 3. 27.
애인(벤야민에 따르면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 2024. 3. 26.
에디슨 흉상 보기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 '에디슨 흉상'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디슨 흉상이 보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에디슨 흉상을 하나 사고 싶은 걸까? 에디슨은 돈을 많이 벌어서 요즘 갑부들처럼 온갖 호사를 누려보았을까?...... 인터넷 검색창에 '에디슨'을 넣으면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도시로 토머스 A. 에디슨의 연구실이 있던 곳이라는 설명도 있고, 영어권의 인명이자 성씨인데 으레 사업가이자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을 가리킨다는 설명도 보인다. 에디슨은 묘한 인물, 재미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병아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달걀을 품고 앉은 그를 어머니가 발견한 이야기, 학폭을 저질 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엉뚱한 짓, 황당한 행동을 하다가 퇴학을 당해서 어머니가 데리고 오며 걱정 말라고.. 2024. 3. 25.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길 2015 본문 앞에 긴 해설이 있다(~64).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해설은 됐고'로 넘겨버리고 69쪽에서 시작되는 『일방통행로』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事實)에 훨씬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2024. 3. 24.
이별하기 사무실에 나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자.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고 헤어지자. 뭐라도 갖고 가게 하자.'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했는데 사람이 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해 놓고도 얻어먹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도 했다. 그리고는 곧 코로나가 번지고 점점 더 심각해졌고 이래저래 사무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소득 없는 아이디어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요즘도 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누굴 만나든, 누가 찾아오든, 이번엔 누가 내야 할까를 계산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를 읽다가 그때.. 2024. 3. 22.
시인의 봄 혹은 어처구니 없는 춘분 엄청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주 극성스럽게 말고 참 좋은 '아주머니' 혹은 '주부', 아니면 '여성분' '그대로' 살아가며 꽃 같은, 돌 같은, 혹은 강, 도자기, 어쨌든 그런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기를 기대하는 시인이다. 그 시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렇게도 함박눈 많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에요 봄날 건강히 지내셔요. 달력을 봤더니 글쎄 춘분이더라고요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강원도엔 오늘도 눈이 왔는데... 이 꽃은 무슨 봄꽃일까 들여다봐도 평범하질 않으니 알 길이 없네요 (시인의 봄이) 봄꽃 같기를 바라며... 바위틈에서 자라는 앵초란 꽃이에요 ㅎㅎ 계절이 때맞춰 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구요 2024. 3. 21.
심보선 「새」 새 / 심 보 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 2024. 3. 20.
세이 쇼나곤 / 새벽에 헤어지는 법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거나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누가 흉을 보겠는가? 밤을 같이 보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남자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한다.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는 재촉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아서도 바로 사시누키를 입으면 안 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듯이 있다가 귓속말로 밤에 있던 일을 속삭이며 슬그머니 속곳 끈을 묶고 일어서야 한다. 격자문을 밀어 올리고 쪽문까지 여자와 함께 가면서 낮 동안에 못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런 식으로 해서.. 2024. 3. 19.
향기로운 구익부인 제(齊) 나라 구익부인(鉤翼夫人) 조(趙)씨는 아리땁고 가녀린 미인으로 청정함을 좋아했는데 6년 동안 앓아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고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때 망기술사(望氣術師)가 "동북에 귀인의 기운이 있다"고 해서 조정에서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냈다. 무제(武帝)가 그녀의 손을 펴보았더니 옥으로 만든 대구(帶鉤) 하나가 들어 있었고 오그라졌던 그 손이 저절로 펴졌다. 무제가 그녀를 총애하여 소제(昭帝)를 낳았지만 나중에는 권력 문제로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는데 입관한 시체가 차가워지지 않고 한 달 동안 향기가 났다. 마침내 소제가 즉위하여 다시 그녀를 매장하려 했지만 관 속에는 명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신선 이야기 《열선전 列仙傳》에서 봤습니다(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 2024. 3. 17.
나는 한밤에 벨기에에서 찬을 만났다 사람들은 찬이 작다고 깔본단다. " 하하하, 9살인가요?" 찬은 마음대로 웃어도 좋다며 대답한단다. "그렇지만 5분만 지나면 조용해집니다. 그냥 음악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전율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콜로라도의 노루님 블로그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밤에 지구 반대편 벨기에 로테르담으로 떠났고, 거기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세헤라자데를 들었다. 지휘자는 정말 작은 여성 엘림 찬이었다. 나는 45분간 엘림 찬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그 음악을 들었고 5분 정도 더 머물며 청중과 인사를 나누는 엘림 찬을 지켜보았다. 지휘자 찬이 있는 세상이니까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데도 아름답고, 찬도 아름답고, 연주자들도 아름다웠다. 세상은 엉망.. 202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