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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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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길 2015 본문 앞에 긴 해설이 있다(~64).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해설은 됐고'로 넘겨버리고 69쪽에서 시작되는 『일방통행로』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事實)에 훨씬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2024. 3. 24.
이별하기 사무실에 나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자.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고 헤어지자. 뭐라도 갖고 가게 하자.'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했는데 사람이 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해 놓고도 얻어먹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도 했다. 그리고는 곧 코로나가 번지고 점점 더 심각해졌고 이래저래 사무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소득 없는 아이디어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요즘도 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누굴 만나든, 누가 찾아오든, 이번엔 누가 내야 할까를 계산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를 읽다가 그때.. 2024. 3. 22.
시인의 봄 혹은 어처구니 없는 춘분 엄청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 아주 극성스럽게 말고 참 좋은 '아주머니' 혹은 '주부', 아니면 '여성분' '그대로' 살아가며 꽃 같은, 돌 같은, 혹은 강, 도자기, 어쨌든 그런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기를 기대하는 시인이다. 그 시인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그렇게도 함박눈 많이 내리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에요 봄날 건강히 지내셔요. 달력을 봤더니 글쎄 춘분이더라고요 이건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강원도엔 오늘도 눈이 왔는데... 이 꽃은 무슨 봄꽃일까 들여다봐도 평범하질 않으니 알 길이 없네요 (시인의 봄이) 봄꽃 같기를 바라며... 바위틈에서 자라는 앵초란 꽃이에요 ㅎㅎ 계절이 때맞춰 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기한 일이구요 2024. 3. 21.
심보선 「새」 새 / 심 보 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 2024. 3. 20.
세이 쇼나곤 / 새벽에 헤어지는 법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거나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누가 흉을 보겠는가? 밤을 같이 보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남자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한다.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는 재촉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아서도 바로 사시누키를 입으면 안 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듯이 있다가 귓속말로 밤에 있던 일을 속삭이며 슬그머니 속곳 끈을 묶고 일어서야 한다. 격자문을 밀어 올리고 쪽문까지 여자와 함께 가면서 낮 동안에 못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런 식으로 해서.. 2024. 3. 19.
향기로운 구익부인 제(齊) 나라 구익부인(鉤翼夫人) 조(趙)씨는 아리땁고 가녀린 미인으로 청정함을 좋아했는데 6년 동안 앓아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고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그때 망기술사(望氣術師)가 "동북에 귀인의 기운이 있다"고 해서 조정에서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냈다. 무제(武帝)가 그녀의 손을 펴보았더니 옥으로 만든 대구(帶鉤) 하나가 들어 있었고 오그라졌던 그 손이 저절로 펴졌다. 무제가 그녀를 총애하여 소제(昭帝)를 낳았지만 나중에는 권력 문제로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는데 입관한 시체가 차가워지지 않고 한 달 동안 향기가 났다. 마침내 소제가 즉위하여 다시 그녀를 매장하려 했지만 관 속에는 명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신선 이야기 《열선전 列仙傳》에서 봤습니다(유향 지음, 김장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 2024. 3. 17.
나는 한밤에 벨기에에서 찬을 만났다 사람들은 찬이 작다고 깔본단다. " 하하하, 9살인가요?" 찬은 마음대로 웃어도 좋다며 대답한단다. "그렇지만 5분만 지나면 조용해집니다. 그냥 음악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녀는 전율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사람을 콜로라도의 노루님 블로그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한밤에 지구 반대편 벨기에 로테르담으로 떠났고, 거기서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세헤라자데를 들었다. 지휘자는 정말 작은 여성 엘림 찬이었다. 나는 45분간 엘림 찬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고 그 음악을 들었고 5분 정도 더 머물며 청중과 인사를 나누는 엘림 찬을 지켜보았다. 지휘자 찬이 있는 세상이니까 조금 더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헤라자데도 아름답고, 찬도 아름답고, 연주자들도 아름다웠다. 세상은 엉망.. 2024. 3. 16.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알렉스 펜틀런드 《창조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SOCIAL PHYSICS 빅데이터와 사회물리학 박세연 옮김, 와이즈베리 2015 제때 읽었어야 할 책을 '느긋하게' 읽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세상의 변화는 급격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2015년에 읽었다면 '무슨 소리지?' '정말 그럴까?' 했을 부분을 전문지식이라고는 서푼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지!' '그렇지!' 하며 읽었다.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 "전통적인 물리학의 목표가 에너지 흐름이 어떻게 운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는 학문이듯이, 사회물리학은 아이디어 흐름 idea flow이 어떻게 행동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란다(11). '전통적인 물리학'? 물리학이겠지? 저자는 이렇게 정의.. 2024. 3. 15.
김기택 「벽 3」 1989년 봄,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은 오전 내내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내 생애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담임하고 있었고 그해 겨울 서울로 직장을 옮겨 교육행정기관에서 근무하게 되지만 그 봄에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다. 교회 사찰집사님 아들과 그 교회 목사님 아들이 함께 우리 반이 되었다. 목사님 아들은 수더분하고 정직하고 의젓하고 영리해서 저절로 사랑스러웠고, 집사님 아들은 기가 죽을까 봐 스킨십도 자주 하고 이름도 자주 불러주고 했더니 누가 보거나 말거나 걸핏하면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렇지만 자주 풀이 죽고 말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까닭을 물으면 엄마 아빠가 밤새 싸워서 아침도 못 먹고 왔다고 했다. 어느 날, 또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고함을 질러버렸다. "네 엄마 아빠 당장 학교로 오라고 해.. 2024. 3. 13.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몸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조금도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홀가분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920년 머지않아 일어날 전쟁은 머지않아 일어날 전쟁은 첫 전쟁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번 전쟁이 끝났을 때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뉘었다. 패전국에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승전국에서도 역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1936/37년 '나', 살아남은 자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 그 많은 친구들을 잃고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난밤 꿈에 그 친구들이.. 2024. 3. 12.
'오늘의 운세' 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별 희한한 걸 다...' 그 운세가 들어맞든 엉터리든, 뜬구름 잡는 식이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럴듯하든 영 어긋난 것이든 일단 ─지금까지 들어 온 바로는─ 그 사이트에 가입할 때 적어 넣은 내 생년월일이 음력으로 된 것이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운세라는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혹 양력으로 된 기록들을 일일이 음력으로 환산해서 찾은 운세라고 하자. 그래봤자 그렇다. 우리나라 나이가 고무줄 나이인 데다가 내 실제 생년월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비밀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 선친은 내가 태어난 1년 후에 나를 호적에 올렸고 그때 내 음력 생일로 신고했는데 그게 양력으로.. 2024. 3. 11.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전문)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김 현 지상의 강아지 한 마리가 없어진다 때론 명백한 사실이 시적이지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아침 일찍 산책 나오던 한 사람이 사라진다 그는 아직 누워 있다 텅 빈 그를 깨우기 위해 누구도 상냥하게 짖지 않고 침대로 폴짝 뛰어오르지 않기에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일을 (짖어봐!) 사람이 해주지 않아서 (뛰어올라봐!) 사람은 다른 동물에게 바란다 오늘 사람이 잊은 일을 (사랑해주세요.)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꿈의 골목에 강아지가 나타난다 쓰다듬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그의 베개는 젖고 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난다 천국이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그는 우는 얼굴로 기뻐하며 눈을 뜬다 알면.. 2024. 3. 10.